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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정세영의 공간 도슨트

“막걸리 마시며 파티 즐기는 이발관” ‘우정’ 이예람 대표

정세영 기자

2024. 01. 11

40년 중곡동 터줏대감으로 불리던 이발관이 MZ들의 성지이자 막걸리 신의 중심으로 다시 태어났다.

생활의 미감을 끌어올리는 공간을 찾아간다. 트렌드는 물론 고유성과 정체성을 갖춘 디자인부터 특별한 음식, 공간 속 숨은 이야기까지.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없는 보고, 듣고, 먹는 특별함을 선사한다.

지하철 5·7호선 군자역 4번 출구를 나와 오르막길이 있는 좁은 골목을 지나면 ‘우정 이발관’을 만날 수 있다. 세월의 흔적이 역력한 주택과 신축 빌라 사이 자리한 이곳은 내비게이션이 없으면 쉽게 찾아갈 수 없는 장소다. 현재 우정 이발관이라는 간판을 달고 있으나 실제 이름은 ‘우정’이다.

서울 광진구 중곡동에서 40년 넘게 이발관으로 운영됐던 이곳은 2년 전 우정이라는 이름의 전통주 보틀 숍 & 바로 탈바꿈했다. 재미있는 점은 여전히 여느 시골의 소박한 이발관 모습이라는 것. 술집이라는 것은 감히 상상하지 못할 정도다.

낡은 우드 톤 문을 열고 들어서면 마치 시간 여행을 시작한 듯 빈티지 느낌의 소품들이 넘쳐난다. 빛이 바랜 것은 바랜 대로, 반짝 빛나는 것은 빛나는 대로 제자리에서 도도한 매력을 뽐내는 듯하다. 시간이 흘러 흐려진 조명도 그만의 색과 고유의 자태로 시선을 끌고, 곳곳에 보이는 벗겨진 시멘트 벽도 레트로 분위기에 큰 역할을 한다.

메뉴 구성, 이벤트 기획, SNS 등 우정의 모든 것을 혼자 해내고 있는 이예람 대표.

메뉴 구성, 이벤트 기획, SNS 등 우정의 모든 것을 혼자 해내고 있는 이예람 대표.

우정은 SNS에서 겉과 속이 철저히 다른 술집으로 불린다. 우정 이발관이라는 간판을 달고 있지만 전통주를 팔며, 젊은 층을 겨냥한 다양한 행사를 진행하기 때문. 이는 곧 MZ들의 호기심을 자극했고, “이발관에서 막걸리 한잔 어때?” “이발관에 숨은 막걸리 주점” 등 수많은 키워드를 낳으며 화제가 됐다.
찾아가는 길이 복잡할 것 같아 지하철을 타고 움직였다. 군자역에 내려서도 내비게이션을 켠 채 수많은 골목을 지나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했다. 빈티지 특유의 절제된 카리스마로 시선을 압도하는 이곳. ‘사장이 누군지 몰라도 공간을 보는 안목이 기가 막힌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30대 후반에서 40대쯤의 남성이겠거니 나름 추리를 했는데, 기자의 예상은 보기 좋게 깨졌다. 마중 나온 이는 귀여운 인상의 30대 초반 여성, 이예람 대표. 빈티지 자체를 너무 옛것으로 치부한 기자의 패착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순간이었다. 매장 운영부터 관리, 이벤트 기획, SNS 등 모든 일을 혼자 해내고 있다는 그의 말에 공간에 대한 궁금증은 더욱 커졌다. 이 대표가 꿈꾸는 우정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우정 이발관’ 간판에 담긴 트렌드

우정의 ‘정’은 한자 우물 정(井)을 뜻한다. 다양한 맛의 물들이 모여 있는 곳이란 의미를 담고 있다.

우정의 ‘정’은 한자 우물 정(井)을 뜻한다. 다양한 맛의 물들이 모여 있는 곳이란 의미를 담고 있다.

우정 이발관 간판을 그대로 유지한 건 콘셉트인가요.

처음에는 자금이 없어서 떼질 못했어요. 당시 철거, 폐기물 비용이 엄청 크게 느껴졌거든요. 동네 분들도 이해를 못 하시더라고요. 막걸리 집인데 왜 이발관 간판을 달고 있냐며 볼멘소리도 하셨죠. 고민도 많았지만 그때마다 ‘돈을 벌어서 좀 더 완성도 있는 간판을 멋지게 달아야지’ 생각하며 꾹 참았어요. 지금은 간판이 신의 한 수가 됐죠(웃음). 간판이 주는 효과가 엄청 크더라고요. 인플루언서들이 찾아와 간판 사진을 찍어간 뒤 SNS에 “이발관에서 막걸리 한잔 어때?”라는 키워드를 달아주세요. 덕분에 가게가 화제가 됐고요. 간판 덕을 너무 많이 보고 있어서 계속 유지할 생각입니다.

내부 인테리어도 빈티지해요. 찐 오리지널 빈티지 느낌이에요.

인테리어도 크게 손대지 않았어요. 우정 이발관의 큰 틀은 그대로 남겨두고 새롭게 자잘한 소품들로만 채웠어요. 벽은 이발관에서 사용했던 천장 타일을 떼어서 그대로 붙였고, 바 테이블은 목수 아저씨께서 직접 짜주셨어요. 바 테이블과 의자 리스 칠은 제가 하고, 집에 있는 서랍을 가져와 소품으로 활용했죠. 인테리어 비용이 크게 들지 않은 거죠. 시간이 지나면서 소소하게 변하긴 했지만 전체적인 분위기는 크게 바뀌지 않았어요.

우정 이발관에서 사용했던 타일을 붙여 내부 벽 인테리어를 완성했다. 각종 빈티지한 소품이 가득한 모습.

우정 이발관에서 사용했던 타일을 붙여 내부 벽 인테리어를 완성했다. 각종 빈티지한 소품이 가득한 모습.

원래 빈티지 스타일을 좋아했나요.

우정을 운영하면서 알게 됐어요. ‘내가 빈티지를 좋아하는구나’. 자금 문제도 있었지만, 이곳만의 안락함과 특유의 레트로 분위기가 너무 좋았어요. 또 빛바랜 색감이나 폰트 등이 주는 세월의 흔적은 그 어떤 기술로도 흉내 낼 수 없잖아요. 이 모든 것들이 누군가에겐 특별함으로 다가올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또 우정처럼 정통 빈티지 스타일을 ‘새롭다’고 느끼는 분들도 많더라고요. 그런 모습을 보면 지금 이대로도 충분히 사람들을 끌어모을 수 있겠다 느끼고요.

우정 이발관을 운영하셨던 사장님도 이곳을 보셨나요.

그럼요. 가게 위층에 사장님 가족이 살고 계시거든요(하하). 간판을 떼지 않겠다고 했을 때 사장님 가족이 엄청 걱정하셨어요. 빈티지는 이미 몇 년 전에 유행이 지났다고요. 요즘 트렌드에 맞게 새로운 공간으로 변모하길 바라셨던 거죠. 하지만 간판 덕분에 이곳이 나름 유명해지니까 누구보다 기뻐하셨어요. 사모님은 가끔 내려와서 가게 청소도 해주세요. 얼마 전에는 사장님 손자분이 왔는데 엄청 신기해하시더라고요. 천장 타일, 바닥 등 어렸을 때 뛰놀았던 이발관 공간이 그대로 남아 있다고요. 그런 모습을 보면 그대로 남기길 잘했다는 생각도 들어요.

사실 이곳을 찾아오기 쉽지 않았어요. 길도 복잡하고 상권에 있는 것도 아니고요. ‘동네 장사하는 곳인가’라는 생각도 들었어요.

중곡동은 우정을 열면서 처음 알게 된 곳이에요. 처음에는 걱정도 많았어요. 접근성도 떨어지고 동네에 젊은 사람도 많이 없거든요. 대부분이 이곳에서 태어나 20~30년 사신 분들이에요. 이사를 고민한 적도 있지만, 이 동네 사람들만의 끈끈함과 다정함을 놓치고 싶지 않더라고요. 조용한 동네에 젊은 사람이 와서 술집을 차린다고 하면 배척하실 만도 한데 다들 응원하고 도와주세요. 힘들어하면 “5년만 버티면 잘될 거야”라며 농담 섞인 격려도 해주시고요. 수많은 불리한 조건에도 이곳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동네 사람들 때문이에요.

몇 년 후에는 이 동네가 핫해질 수도 있겠네요. 우정을 방문하는 젊은 층이 많아지고 있으니까요.

그렇게 되면 너무 좋죠. 소망이기도 하고요. 식물 숍, 디저트 가게 등 구석구석 재미있고 좋은 가게들이 많거든요. 하지만 알려지지 않아 안타까워요. 몇 달 전에 우정에서 피자 파티를 한 적이 있는데 이곳 주민자치위원회 회원분들이 깜짝 놀랐다고 하더라고요. 젊은 사람들이 우르르 모여 길거리에서 피자와 술을 먹는 모습을 보고요. “이 동네 30년 살면서 처음 본 광경”이라며 엄청 좋아해주셨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해요. 사실 저는 소음 때문에 조금 걱정했는데, 개의치 않고 오히려 함께 즐기는 모습을 보며 이런 행사를 자주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우정의 최종 목표는 ‘전통술 대중화’

우정은 전통술을 취급한다. 이예람 대표는 손님들에게 술에 대한 역사와 맛, 향 등을 큐레이팅해주고 있다.

우정은 전통술을 취급한다. 이예람 대표는 손님들에게 술에 대한 역사와 맛, 향 등을 큐레이팅해주고 있다.

우정에서는 다양한 이벤트를 진행하는 걸로 알고 있어요.

우정을 단지 술집이 아닌 놀이 공간으로 만들어나가고 싶어요. 이를 위해 주기적으로 이벤트나 행사를 진행하고요. 가장 반응이 좋은 건 냉털(냉장고 털이)회예요. 냉털회는 ‘무엇을 먹을 건지’에 대한 라인업이 없어요. SNS를 통해 참석 인원 7명 정도를 모은 뒤 해당 날짜에 사람들이 모이면 공 뽑기를 해요. 각 공에는 금액이 적혀 있어요. 공에 적혀 있는 금액만큼 냉장고에 있는 막걸리를 자유롭게 마시면 됩니다. 각각 금액에 맞춰 먹기도 하고, 모인 분들끼리 금액을 합쳐서 함께 즐길 때도 있어요. 이 밖에도 근처에 있는 디저트 맛집 ‘아에드’, 타코 전문점 ‘타코아재’ 등과 함께하는 페어링, 양조장 사장님들을 모시고 전통주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토크 시음회 ‘주담’ 등도 진행하고 있습니다.

우정의 주메뉴가 ‘막걸리’라는 점도 재미있어요.

원래 꿈은 퍼스널 브랜드를 만드는 거였어요. 대학 전공도 브랜딩을 했고, 졸업 후 관련 스타트업에서 일했었죠. 워낙 막걸리를 좋아해서 제 이름을 건 양조장을 차리는 게 최종 목표였어요. 회사에 다니면서도 막걸리 관련 수업을 들으며 열심히 준비하고 있었죠. 그러다 함께 수업을 듣던 지인이 중곡동에 양조장을 작게 차릴 건데 한쪽에서 막걸리 보틀 숍을 운영해보라고 제안해주셨죠. 고민 없이 하겠다고 했어요. 마침 퇴사해서 퇴직금도 있고 시간도 있고 모든 게 딱 맞아떨어졌거든요. 그러다 올해 3월에 양조장 사장님이 성수동으로 이사 가시면서 우정을 전적으로 제가 맡게 됐어요. 취향에 맞는 전통주를 전문적으로 판매하고 큐레이팅까지 하는 저만의 공간이 탄생한 거죠.

막걸리가 왜 그렇게 좋으세요.

원래 술을 잘 못 마시는 편이에요. 대학생 때 사람들과 어울리려면 술을 잘 마셔야 할 것 같더라고요(하하). 여러 가지 술을 마셔봤는데 도수가 낮고 목 넘김이 좋은 막걸리가 저와 가장 잘 맞았어요. 무슨 패기였는지 모르겠어요. 당시 주량을 늘리기 위해 막걸리를 진짜 자주 마셨거든요. 그런데 먹을수록 묘한 매력이 있는 거예요. 브랜드마다 고소함, 청량감, 탄산도 등이 다르고 시간에 따라 변하는 맛이 매력적이었죠. 또 누룩의 함량에 따라 수백 가지 맛이 나는 것도 놀라웠고요. 점점 호기심이 생기면서 막걸리를 깊이 있게 공부했고, 전통주에 애착이 생겼어요. 당시 공부하면서 가장 안타까웠던 게 국내 고퀄리티 막걸리가 제대로 홍보되지 못한다는 점이었어요. 우리나라만의 고유 술임에도 와인보다 못한 대접을 받는 것 같았죠. 그때부터 막걸리 숍을 차리게 되면 국내 다양한 전통술을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우정을 운영하면서 그 꿈을 조금씩 실현하고 있고요.

냉털회, 시음회, 바자회를 비롯해 피자, 타코, 프랑스 디저트 가게와 합작해 다양한 이벤트를 진행하고 있다.

냉털회, 시음회, 바자회를 비롯해 피자, 타코, 프랑스 디저트 가게와 합작해 다양한 이벤트를 진행하고 있다.

막걸리는 호불호가 강한 술이에요. 운영상 어려운 점도 있을 것 같아요.

제한성이 확실히 있어요. 맥주나 소주보다 대중적이지도 않고, 뒤끝이 좋지 않다는 인식도 있죠. 사실 여전히 고민 중이에요. 이곳이 전통술을 알리는 데 정말 도움이 되는지, 다른 술도 취급하며 우정을 좀 더 확장해야 할지요. 솔직히 지금 SNS에서 화제가 되는 가장 큰 이유는 ‘간판’ 때문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순수하게 전통술을 먹기 위해 이곳을 찾는 분들은 많지 않아요. 지금의 관심이 거품처럼 사그라지진 않을까 걱정도 됩니다. 또 혼자 운영하다 보니 모든 걸 다 책임져야 한다는 부담감도 커요. 동네 분들이 많이 도와주시기는 하지만 한계는 있죠. 시간이 지날수록 모든 것이 점점 더 어려워지는 것 같아요.

우정은 앞으로 어떻게 변화할까요.

일단 전통주가 메인인 건 변하지 않을 거예요. 여러 가지 어려움은 있지만, 우정을 처음 열었을 때 다짐했던 ‘전통주 알리기’라는 목표는 이루고 싶거든요. 지금까지는 그 방법이 우정이라는 공간에만 국한돼 있었다면, 앞으로는 여러 분야와 협업을 통해 다양한 공간에서 전통술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가지려 합니다. 또 ‘전통술은 한식과 먹어야 한다’는 선입견도 깨고 싶어요. 이를 위해 각종 디저트, 양식, 일식 등과의 컬래버레이션도 모색하고 있고요. 전통술을 좀 더 다양하고 맛있게 즐길 수 있는 방법을 전파하고 싶어요. 아, 그리고 절대 변하지 않을 한 가지가 더 있어요 ‘간판’이요! 제가 이 일을 그만두지 않는 한 우정 이발관 간판은 절대 없어지지 않을 거예요.

#우정이발관 #우정 #전통술 #막걸리맛집 #여성동아

사진 김도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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