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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

#movie #issue

젠더와 인종의 벽 뛰어넘는 디즈니 공주님들

Dream Big, Princess

EDITOR 김우정 기자

2019. 08. 15

젠더 감수성이 기본 덕목으로 떠오르고 탈코르셋 선언이 줄을 잇는 요즘, 영화 ‘알라딘’의 자스민을 필두로 디즈니의 공주들에게도 변화가 찾아왔다.

알라딘

알라딘

7월 18일 영화진흥위원회 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에 따르면 영화 ‘알라딘’의 누적 관객 수가 1천44만여 명을 기록했다. 역대 국내 개봉작 중에는 25번째, 디즈니 실사 영화로는 처음으로 1천만 관객을 달성한 것이다. 가이 리치 감독의 영화 ‘알라딘’은 1992년(국내 1993년) 개봉한 동명의 2D 애니메이션을 ‘라이브 액션(Live Action)’, 즉 실사(實寫)로 리메이크한 작품이다.

여성에게도 술탄을 허하라

2019년작 ‘알라딘’은 대체로 원작 애니메이션의 줄거리를 따른다. 아그라바 왕국의 저잣거리에서 좀도둑으로 살아가던 알라딘(메나 마수드)이 우연히 궁을 빠져나온 자스민(나오미 스콧) 공주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는 이야기다. 알라딘은 램프의 요정 지니(윌 스미스)의 힘을 빌려 자신의 본모습을 속인 채 자스민의 마음을 얻으려 한다. 하지만 이내 자신의 모습을 솔직히 밝히고 기지와 용기로 왕국을 손에 쥐려는 음험한 마법사 자파(마르완 켄자리)를 물리친다. 영화에서 눈에 띄는 것은 알라딘을 압도하는 자스민의 존재감이다. 원작 애니메이션과 달리 실사 영화 속 자스민은 자신의 욕망과 언어를 가진 존재다. 백성들의 처지에 공감하며 아버지의 뒤를 이어 통치자인 술탄이 되고자 하지만 여성은 술탄이 될 수 없다는 법 앞에 좌절한다. 그러나 알라딘과 함께 위기를 극복하며 자신의 용기를 증명한 자스민은 결국 아버지에게 술탄의 자격을 인정받는다. 이에 따라 알라딘과의 사랑도 입지전적 남성의 성취가 아닌 최초의 여성 술탄 자스민의 선택으로 그려진다. 극 중 자스민 역의 나오미 스콧이 열창하는 테마곡 ‘Speechless’의 가사에도 억압 앞에 침묵하지 않겠다는 강인한 여성상이 잘 드러난다. 

월트디즈니사는 자사가 개최한 디즈니 아이스쇼에 여자 아이들 대부분이 공주 드레스를 입고 온 것을 보고 공주가 되고 싶은 소녀들을 ‘취향 저격’해 1990년대 중반 ‘디즈니 프린세스(Disney Princess)’라는 미디어 프랜차이즈를 만들었다. ‘알라딘’의 자스민을 비롯해 백설공주, 신데렐라, 오로라(‘잠자는 숲속의 미녀’). 에리얼(‘인어공주’), 벨(‘미녀와 야수’) 등이 대표적이다.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공주님이 멋지고 용감한 왕자님과 선보이는 로맨틱한 사랑 이야기. 원작 애니메이션 개봉 후 길게는 수십 년이 지났지만 디즈니 프린세스 프랜차이즈가 생명력을 유지하는 이유다. 

하지만 디즈니 프린세스는 동시에 상당한 ‘안티’를 거느리고 있다. 소녀들이 동경하는 애니메이션 속 캐릭터가 왕자의 구원을 기다리는 수동적 존재라는 비판이 점차 힘을 얻었기 때문이다. 남성 캐릭터의 연인으로서만 의미를 갖는 여성 캐릭터가 과연 어린아이들에게 바람직한 롤 모델이 될 수 있겠냐는 것이다. 부러질 것만 같은 가느다란 몸매와 서구인을 연상케 하는 캐릭터들의 생김새도 문제로 꼽힌다. 아이들이 획일적인 미의 기준을 학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영국 출신의 배우 키이라 나이틀리는 지난해 미국 유명 토크쇼 ‘엘런 디제너러스 쇼’에 출연했을 당시 자신의 딸에게 디즈니 애니메이션 ‘신데렐라’와 ‘인어공주’를 못 보게 한다고 밝혔다. “돈과 능력을 가진 남성이 자신을 구원해주길 기다리는 신데렐라와 남성을 위해서 자기 목소리를 내준 인어공주처럼 수동적 여성 캐릭터가 아이에게 잘못된 성별 고정관념을 심어줄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라고 했다. 



이러한 시대의 변화에 맞춰 디즈니사가 그리는 공주 캐릭터도 변화하고 있다. ‘자스민’이라는 제목을 붙여도 어색하지 않은 영화 ‘알라딘’ 전부터 조금씩 변화는 감지됐다. 먼저 기존의 ‘오리지널 프린세스’와는 다른 성격의 ‘뉴웨이브 프린세스’들이 대거 등장하기 시작했다. 특히 1998년 중국의 ‘화목란(花木蘭)’ 설화를 모티프로 제작된 ‘뮬란’은 뉴웨이브 프린세스의 상징적 존재다. 극 중 뮬란은 아버지 대신 남장을 하고 전장에 나가 공을 세우고 나라를 구한다. 공주로 태어나지도, 왕자와 결혼하지도 않았지만 뮬란은 여성 전사이자 영웅으로서 8번째 디즈니 프린세스가 된다. 


메리다

메리다

2012년 개봉작 ‘메리다와 마법의 숲’도 서사와 캐릭터 면에서 새로운 디즈니 프린세스의 모델을 보여줬다. 주인공 메리다는 스코틀랜드 부족국가의 공주로 활쏘기가 특기다. ‘메리다와 마법의 숲’의 골자는 결혼 문제를 두고 대립하던 메리다와 어머니 엘리노 왕비가 겪는 갈등과 화해다. 주연이라 할 만한 왕자 캐릭터는 없다. 제멋대로 뻗친 빨간색 곱슬머리에 주근깨 있는 얼굴을 가진 메리다의 외모도 기존 디즈니 프린세스의 공주상과는 거리가 멀다. 


모아나

모아나

12번째이자 현재까지는 마지막인 디즈니 프린세스 모아나도 비슷하다. 2016년 개봉한 영화 ‘모아나’의 주인공 모아나는 폴리네시아를 모티프로 삼은 모투누이 섬 족장의 딸이다. 모아나 또한 위기에 처한 부족을 구하기 위해 금기시되던 바다로의 모험을 감행하고 아버지에 이어 새로운 족장이 된다. 항해술을 익히며 성장하는 캐릭터이니만큼 다른 디즈니 프린세스에 비해 현실적인 몸매도 눈에 띈다. ‘모아나’는 키이라 나이틀리가 ‘도리를 찾아서’ ‘겨울왕국’과 함께 자신의 딸에게 권하는 애니메이션이기도 하다.

큰 꿈을 꿔요, 공주님

뮬란

뮬란

영화 ‘알라딘’이 여성 술탄 자스민을 앞세워 흥행한 가운데 또 다른 디즈니 프린세스 실사 영화 제작도 이어져 관심을 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적극적 여성상뿐 아니라 인종 다양성을 의식해 변화하는 디즈니 프린세스의 모습이다. 

우선 내년에는 중국계 미국인 배우 류이페이가 주연을 맡은 ‘뮬란’이 개봉 예정이다. 백인이 아닌 중국인, 그것도 강인한 여성 전사 뮬란이 디즈니 프린세스 실사 영화의 다음 타자로 나선 것이다. 류이페이는 5개 대륙에서 몰려든 1천여 명의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뮬란 배역을 얻었다. 중국어와 영어에 능통할 뿐 아니라 탄탄한 액션 연기 실력이 강점으로 꼽힌다. 실제로 류이페이는 2008년 할리우드 진출작 ‘포비든 킹덤’, 2011년 리메이크작 ‘천녀유혼’ 등에서 화려한 무술 연기를 선보였다. 감독을 맡은 니키 카로가 영화 ‘뮬란’을 “대단한 소녀의 무술 서사시”로 규정한 것과 무관치 않은 캐스팅이다. 

당초 영화 ‘뮬란’은 백인 여배우인 제니퍼 로렌스가 주인공에 캐스팅됐다거나, 원작에 없는 백인 남성 캐릭터가 등장해 뮬란과 사랑에 빠진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이에 SNS에는 ‘#MakeMulanRight(뮬란을 제대로 만들어라)’라는 해시태그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류이페이 캐스팅으로 이러한 논란이 일단락됐다. 

7월 3일 월트디즈니사는 내년 촬영이 시작되는 영화 ‘인어공주’의 주인공 에리얼 역에 가수 할리 베일리가 캐스팅됐다고 밝혔다. 할리 베일리는 언니인 클로이 베일리와 R&B 듀오 ‘클로이 앤 할리’를 결성해 활동해온 아프리카계 미국인 가수다. 이번 실사 영화에 메가폰을 잡은 롭 마샬 감독은 할리 베일리가 에리얼 역에 맞는 “정신과 열정, 젊음, 순수함과 아름다운 목소리”를 갖췄다고 치켜세웠다. 


에리얼

에리얼

원작 애니메이션에서 에리얼은 하얀 피부에 ‘진저 헤어(Ginger Hair)’라 불리는 빨간색 머리를 가진 것으로 묘사됐다. 아프리카계 미국인인 할리 베일리의 외양과는 크게 다른 모습이다. 일각에서는 SNS에 ‘#NotMyAriel(내 에리얼이 아니다)’이라는 해시태그를 달아 할리 베일리 캐스팅을 반대하고 나섰다. ‘흑인 인어공주’는 1989년작 애니메이션 속 에리얼은 물론, 덴마크 동화 작가 안데르센의 원작에도 부합되지 않는다는 것. 이런 움직임에 디즈니 측은 SNS를 통해 “덴마크 사람이 흑인일 수 있는 것처럼 덴마크 인어도 흑인일 수 있다”며 반박했다. 디즈니 프린세스 실사 영화의 인종 다양성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모양새다. 하재근 문화평론가는 이러한 분위기에 대해 “최근 세계적 페미니즘 열풍에 따라 여성 등 소수자에 대한 의식이 제고되었다. 디즈니 제작진 내부에도 극 중 여성 캐릭터의 위상을 높이는 흐름이 정착된 것으로 보인다”고 평가했다. 

월트디즈니사가 운영하는 디즈니 프린세스 프랜차이즈 공식 홈페이지에서 처음 눈에 띄는 문구는 ‘Dream Big, Princess(큰 꿈을 꿔요, 공주님)’다. 이제껏 수많은 ‘덕후’와 안티를 모두 낳은 디즈니 프린세스. 이제 디즈니 프린세스가 보여주는 꿈의 모습과 색깔도 점점 다채로워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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