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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든, 이순재의 화양연화

“인생은 긍정적으로 사는 것이 좋아. 80이지만 ‘60이구나’ 하고 사는 거지”

글·김명희 기자|사진·조영철 이기욱 기자, tvN 제공

입력 2014.05.15 17:32:00

드라마 겹치기 출연은 기본이고 예능 프로그램도 나갔다 하면 대박이다.
연기파 배우의 필수 코스인 연극 무대에서도 그와 호흡을 맞춰보려는 배우들이 줄을 서 있다.
인생의 황혼기를 화양연화로 만든 이순재의 내공과 매력.
여든, 이순재의 화양연화
“너는 나이가 몇 살이니? 나는 80살이야.”

tvN 예능 프로그램 ‘꽃보다 할배’(이하 ‘꽃할배’) 스페인 편 1회에서는 이순재가 여행을 앞두고 회화를 공부하는 장면이 나온다. 낄낄대며 웃었지만 할아버지 열정이 참 대단하다 싶었다. 몇 회 뒤에는 이서진에게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며 “만주에서 말을 탄 적이 있었노라”고 고백한다. 별에서 온 외계인이 드라마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세상에 만주라니! 그가 멀고 먼 세월을 건너 우리 앞에 있음을 새삼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상투적으로 말하지만, 이름 옆에 따라붙는 숫자의 의미가 얼마나 무거운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동안이니 노안이니 하는 외모에 대한 평가, 어린 사람이 건방지다느니 늙은 사람이 나잇값을 못한다느니 하는 뒷담화는 때론 소름이 끼칠 만큼 예리하다. 그러니 이런 이야기를 한 귀로 듣고 흘려보낼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늙기는 쉽지만 거기에 걸맞은 품격을 갖추기는 쉽지 않은 요즘, 이순재는 나이 듦에 대한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꽃할배’에서도 여행을 떠나기에 앞서 어디로 가면 좋겠는지 먼저 의견을 내고, 비행기를 타는 12시간 동안 쉬지 않고 책을 읽으며 불평 없이 상황을 정면 돌파하는 모습을 통해 황혼은 더 이상 인생의 휴식기가 아니며 얼마든지 의욕적으로 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요즘 유행하는 말을 빌리자면, 창조적으로 나이 들어가는 그 앞에서 문득 부끄러운 생각이 든다.

“나이 먹었다고 주저앉아서 어른 행세하고, 대접받으려고 하면 더 금방 늙어버려. 우리 나이쯤 되면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끝을 생각하기보단 현재에 최선을 다하며 살아야지. 나는 내일 당장 할 일이 있으니까 그저 ‘하면 된다’ 하고 살아. 인생은 긍정적으로 사는 것이 좋아. 80이지만 ‘60이구나’ 하고 사는 거지.”



여든, 이순재의 화양연화
내일 어떻게 될지 모르기에 매 순간 최선 다해

늘 새로운 모습을 보이기 때문에 김수현도 아닌데, 아니 ‘꽃할배’가 곧 ‘화양예예’라는 제목으로 중국에서 리메이크될 예정이라 김수현 못지않은 인기를 누리게 될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이순재의 다음 행보에는 기대를 갖게 된다. 그는 연극 ‘사랑별곡’을 차기작으로 정했다.

2014년 연극열전 시리즈의 첫 작품 ‘사랑별곡’은 노부부의 끈끈한 사랑 이야기다. 2010년 초연 당시 죽음을 마주한 부부의 미련, 미안함, 용서를 담담하게 표현해 죽음마저 삶으로 끌어안는 통찰력을 선사했다는 호평을 받았던 작품이다. 5월 2일부터 서울 대학로 동숭아트센터에서 상연되는 이 연극에서 이순재는 평생 다른 남자를 마음에 품고 떠나보내지 못하는 아내가 미워 무던히도 속을 썩이다가 그녀의 죽음 앞에서 비로소 용서를 비는 남편 박씨 역을 맡았다.

여든, 이순재의 화양연화

연극 ‘사랑별곡’에서 부부로 호흡을 맞추는 이순재와 고두심. 서로 오래도록 파트너가 되길 소원했다고. 두 사람 외에도 연극에는 송영창(박씨 역 더블 캐스팅), 서현철, 남문철, 김현, 황세원 등 베테랑 배우들이 출연한다.

기자 간담회가 열리던 날 이순재는 취재진보다 한발 일찍 도착해 관계자들과 정담을 나누고 있었다. 이순재가 약속 시간에 늦었다거나, 대본을 못 외워 NG를 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살아 있는 전설’ ‘모든 배우들의 멘토’라고 불리는 데는 이런 기본적인 품성에 대한 존경심이 깔려 있다. 오랜만에 시골 촌로 역을 맡아서인지, 머리가 백발이다. 꾸벅 인사를 했더니 악수를 청한다. 60년 가까이 무수히 많은 대본이 거쳐갔던, ‘허준’의 유의태도 되고, ‘사랑이 뭐길래’의 대발이 아버지를 만들어내고 ‘거침없이 하이킥’의 ‘야동 순재’도, ‘꽃할배’의 ‘직진 순재’도 들어 있는 그 손에서는 따뜻한 온기와 함께 힘이 전해졌다.

이번 작품에서 그와 호흡을 맞추는 배우는 고두심이다. 고두심이 이번 연극을 하겠다고 맘먹은 것도 이순재 때문이다.

“이순재 선생님이 이번에 시간을 내겠다고 하시니까 저도 욕심이 나더군요. 영화 ‘그대를 사랑합니다’ 때도 선생님 파트너로 제의를 받았는데, 그때는 너무 바빠서 못 했거든요. 그랬더니 두고두고 후회가 되더라고요. 언젠가는 선생님을 붙들고 꼭 한번 해보리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기회가 오긴 오네요(웃음).”

“나도 고두심 씨와 한번 멜로 연기를 해봤으면 하는 생각이 충만했어요. 이 친구가 젊을 때 절세미인이었거든요. 그런데 나는 TBC, 고두심 씨는 MBC 소속이라 같이할 기회가 없었지. 그렇게 얼렁뚱땅 시간을 보내다 1990년대에 KBS ‘목욕탕집 남자들’에서 시아버지와 며느리로 만났어요. 부부로 만났으면 좋았을걸. 그때 내 안사람 역은 강부자 씨가 맡았었지요.”

선배의 미모 예찬에 예순을 넘긴 고두심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이순재가 재빨리 칭찬의 방향을 바꾼다.

“고두심 씨는 정말 좋은 배우입니다. 젊어서 잘하는 배우는 많지만 나이가 들어가면서 거기에 맞춰 변신을 하는 배우는 많지 않아요. 내가 연기를 시작한 이후로 수백 명의 남녀 주인공이 지나갔지만 지금 남은 사람은 몇 명 안 돼요. 고두심 씨도 젊어서 주인공, 베드신, 키스신 다 해봤지. 나도 다 해봤는데 안 해본 사람이 한 명 있어요. 누구냐고? 신구(웃음). 아무튼 그런 과정을 거쳐 배우로 살아남은 건 기초가 튼튼해서 어떤 배역이든 소화할 수 있는 역량을 갖췄다는 이야기죠.”

연기는 돈보다 예술이 목적

그의 연기 인생은 대학교 3학년 때 시작됐다. 서울대 철학과를 다니면서 대학 연극 동아리에서 활동을 했다. 자유극장, 실험극장, 극단 산하를 지나 TV가 나오면서 방송국으로 활동 무대를 옮겼다. 그 당시에는 TV에 전문 인력이 없어서 연극계 인력이 대거 참여했다. 연극 연출가가 TV로 가서 연출을 했고, 연극배우가 TV로 가서 연기를 한 것이 드라마의 시작이었다. 한 가지 일에 1만 시간을 투자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데, 이순재는 그 몇 곱절의 시간을 보낸 것이다. 그래서 그는 요즘 후배들로부터 종종 이런 질문을 받는다. “선생님쯤 되면 연기가 무엇인지, 말씀해주실 수 있지 않느냐”는.

“연기란 무엇이냐, 그건 스타니슬랍스키 같은 사람들이 쓴 책에 다 나와 있어요. 다만 우리 같은 경우엔 (연기를 시작)하게 된 동기가 무엇이냐가 중요한 것 같습니다. 1960년대 초반만 해도 이 직종은 두 가지 핸디캡이 있었어요. 전혀 수익성이 없고, 사회적으로도 인식이 열악했죠. 지금은 부모의 70%가 권장한다는데, 당시는 자식이 배우가 된다고 하면 90%가 반대했어요. 그런데 왜 시작했느냐. 그 당시 외국에서 기가 막힌 영화들이 많이 들어왔어요. 돈만 생기면 외화를 보러 극장에 갔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사실주의를 추구했던 이탈리아의 네오리얼리즘 계열, 장 뤽 고다르와 프랑수아 트뤼포의 누벨바그 영화,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을 보면서 이건 예술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하기에 따라서는 얼마든 새로운 것을 창조해낼 수 있겠다 싶었죠. 실제로 영국에서는 음악가나 미술가들과 함께 배우에게 귀족 작위를 주기도 합니다. 예술이라는 것을 인정해주는 거죠. 우리도 돈을 벌겠다는 목적이 아니라 예술적 차원에서 연기에 접근하는 후배들이 많이 생기면 좋겠습니다.”

여든, 이순재의 화양연화
노배우의 목소리가 달뜨기 시작했다. 연기를 사랑하는 배우라는 사실이 온몸으로 전달되는 순간이다. 오랜 세월이 지났는데도 연기에 대한 사랑은 줄어들기는커녕 더 뜨거워지고 있다. 연기가 매번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작업이라는 생각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다.

“일상적인 패턴의 TV 드라마도 시청자들이 보기에는 차이가 미세할지 모르지만 우리는 항상 과거의 반복이 아니라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겠다,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겠다는 마음가짐으로 합니다. 연기는 숙련 과정에 따라 1차원에서 4차원까지 나눌 수 있지만 기본적인 훈련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중에서도 배우는 특히 화술이 중요한데, 일부 대학의 외국에서 공부한 교수는 우리말에 대한 전문성이 떨어져서 학생들에게 화술을 가르치는 걸 건너뛰기도 하는 것 같더군요. 젊은 연기자가 ‘헉’ 또는 ‘허걱’이라고 하는 걸 본 적이 있는데, 그런 건 몇 년이 지나면 다 사라지는 말들입니다. 배우는 표준어를 보존해야 할 책임이 있고, 배우가 전달하는 말은 시대와 계층, 연령을 초월해야 합니다.”

적어도 1백년 후 내다보는 안목 가져야

빛의 속도로 바뀌는 세상이다. 연극판이나 영화판은 더더욱 트렌드에 민감해 젊은 사람들조차 변화의 속도를 따라잡기 힘들다. 현장에서 만나는 연출가들은 그의 나이 절반에서 이쪽저쪽, 연륜으로 치면 이순재를 따라올 수 없다. 그럼에도 젊은 연출가들이 맘껏 자신을 변주할 수 있도록 믿고 맡긴다.

“우리 연배 연출가 중에 쟁쟁한 사람이 많았는데 불행하게도 다들 일찍 세상을 떠서 남아 있는 이가 별로 없어요. 이 좋은 세상, 오래 살았더라면 좋은 작품을 많이 남겼을 텐데…. 그들에게 연극은 배우의 예술이라는 관념이 있어서 자신들을 드러내기보다 배우가 돋보이는 연출을 많이 해줬어요. 요즘 연출가들은 개성이 강해 작품을 자기 관점으로 재해석하는 걸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그럴 경우 원작의 품격을 얼마나 승화시키는가 하는 부분에서는 회의적일 수도 있고, 결과물이 원작보다 못한 경우도 있어요. 하지만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자체가 좋은 일이고, 시행착오를 거치다 보면 발전이 있기 마련이죠. 그래서 일단 작품을 시작하면 연출가를 100% 믿고 가는 겁니다.”

‘노인은 살아 있는 도서관’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도전과 응전의 결과로 얻은 지혜를 고스란히 축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 이순재는 얻어낼 것이 무수히 많은, 화수분 같은 도서관이다. 인터뷰를 마치며 스페인에서는 무엇을 배워왔는지 물었다.

“좋은 걸 많이 봤습니다. 특히 가우디의 건축물들을 보면서 우리도 이제부터 건물을 짓거나 물건을 만들 때 1백 년 후까지 내다볼 필요가 있겠다 싶었어요. 20세기 초에 만든 건축물이 1백 년 동안 한 도시를 먹여 살리지 않았습니까. 긴 안목으로 미래를 내다보고 후손들을 위해 아름다운 부가가치를 창출해내는 것이 우리 세대가 해야 할 몫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여성동아 2014년 5월 60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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