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제공 · REX
하지만 영어 글쓰기는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어느 날 갑자기 영어로 글쓰기를 시작한다고 해서 만족할 만한 수준의 글이 나올 리 없다. 읽기, 말하기, 듣기와 마찬가지로 쓰기 역시 낙서나 그림 같은 수준에서 시작해 차츰 수정 보완하는 과정이라고 이해하면 된다.
영국에서는 눈이 오면 대부분의 학교가 문을 닫고 아이들은 하루 종일 신나게 눈사람을 만든다.
아이의 꿈틀거리는 표현 욕구에 주목하라
1 그림① 정현이가 네 살 때 그린 그림. 코끼리 ‘엘머’를 그린 뒤 지그재그로 제목을 달아 놓았다. 2006년 9월 20일. 2 그림② 남자아이의 모습. 역시 알 수 없는 선으로 제목을 달았다. 2006년 10월 19일.
“준용아, 이거 뭘 그린 거야?”
“Space!”(그 시절 늘 나는 한국어로 묻고 아이들은 영어로 대답했다)
“(가운데 꿀벌 모양을 가리키며) 이건 뭔데?”
“It’s me!”
“뭐하고 있는 거야?”
“Flying in the sky!”
여기까지 듣고 나는 준용이의 쓰기 연습을 위해 침대를 포기하기로 했다. 그날 신기했던 것은 준용이가 그린 그림보다 자신의 그림을 놓고 조목조목 설명하는 모습이었다. 이야기를 좀 더 듣고 보니 준용이는 그 무렵 자기가 가장 좋아하던 애니메이션 영화 ‘토이 스토리(Toy Story)’의 주인공 중 한 명인 ‘버즈’처럼 스스로 우주로 날아가는 꿈을, 그림이라는 방식을 빌려 표현한 것이었다.
이렇게 그림이든 글이든 아이가 어떠한 모양을 통해 전달하려는 메시지가 있다면 그것이 글쓰기의 출발점이라 해도 좋다. 처음에는 그림만 그리던 아이가 차츰차츰 그림 옆에 제목을 달거나 두세 단어로 간단한 설명을 붙여놓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자기의 생각이나 느낌을 표현하고자 해도 글자를 모르면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아이가 자신의 그림 옆에 덧붙여나가는 흔적을 잘 살펴보면 재미있는 점을 발견하게 된다. 어떤 아이는 그림 한쪽에 세모·네모· 동그라미와 같은 도형을 나열해놓기도 하고, 어떤 아이는 그냥 지그재그로 선을 그어놓기도 한다. 이보다 조금 발전해 파닉스를 알아가기 시작하면 아이는 들리는 대로 글쓰기를 시도한다. 또 부모나 선생님과 함께 책을 읽어가면서 통문자로 익혀두었던 글자 형태를 하나의 그림처럼 흉내 낸다. 물론 모르는 철자가 나오면 그냥 하이픈(hyphen)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3 그림③ 강아지를 그린 것. 외계 언어 같은 알파벳이 적혀 있다. 2006년 11월 8일. 4 그림④ 동생의 모습을 그린 것. 2006년 11월 15일. 5 그림⑤ 정현이의 손바닥 그림. 대문자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2006년 11월 30일.
정현이도 영국 학교에서 ‘Emergent Speller’의 시기를 거쳤다. 그림①과 그림②는 정현이가 만 네 살 때 학교 쓰기 과목 시간에 한 활동들이다. 그림①은 어린이들에게 인기 있는 코끼리 엘머(Elmer)를 그린 것이고 그림②는 남자아이를 그린 것이다. 2개의 그림 사이에는 재미있는 공통점이 있다. 글씨도 아닌 지그재그식의 알 수 없는 도형으로 그림 제목을 붙여놓은 것이다. 이러한 ‘Emergent Spelling’에 대해 담임 교사는 틀렸다고 고쳐주기보다 아이들의 방식을 인정하고 해석을 덧붙이는 수준에서만 개입했다. 그림에서 보이듯이 선생님은 그림①에 ‘Elmer’라는 제목을 병기해놓았고 그림②에는 ‘I like colouring’이라고 써놓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정현이도 자신의 그림에 스펠링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파닉스와 읽기 시간에 배운 것을 실제 쓰기에 적용한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외계인의 언어와 같다. 눈에 힘을 주고 자세히 살펴봐도 무슨 말을 쓰려 한 것인지 쉽게 알 수가 없다.
그림③과 그림④에 적힌 ‘muoepetisadog’와 ‘upjupcumpcumtheugietrul’은 각각 ‘My pet is a dog’와 ‘Up jumped the ugly troll’이라는 문장을 쓴 것이다.
그림⑤의 ‘IamshcfolformueelitlBruthe’는 ‘I am thankful for my little brother’라고 쓴 것이다. 아직까지도 띄어쓰기 개념은 없어 보이지만 그림③과 그림④에 비하면 그림 ⑤에서는 대문자를 사용하려는 시도가 보인다.
6 그림⑥ 선생님의 해석이 필요 없을 만큼 쓰기 실력이 발전해 교장 선생님이 주는 스티커를 받아왔다. 2007년 2월 21일. 7 그림⑦ 2개 이상의 문장을 쓰기 시작했다. 2007년 5월 10일.
매일매일 이러한 과정을 반복하며 학교에 입학한 지 5~6개월이 흘렀을 무렵, 드디어 선생님의 해석이 필요 없을 만큼 아이의 쓰기 실력이 발전했다. 교장 선생님이 주는 스티커를 받은 것도 이 무렵이다(그림⑥ 2007년 2월 21일). 차츰차츰 여러 개의 문장을 쓰고자 시도하고 거의 완벽한 2개 이상의 문장을 쓰기 시작했음을 볼 수 있다(그림⑦ 2007년 5월 10일).
정현이와 준용이가 다닌 영국 초등학교에서는 1년간 ‘예비반(Reception)’을 거쳐 1학년(만 5세)이 되면 ‘빅 라이팅(Big Writing)’이라는 쓰기 수업을 진행했다. 여전히 대다수의 아이들은 숫자 2와 5를 헷갈려 하고 때로는 숫자 3이나 영어 철자 J의 좌우를 바꿔 쓰기도 한다. 이런 아이들이 ‘빅 라이팅’을 해낼 수 있을까? 물론 개인차가 있지만 다섯 살 아이들의 작문이라는 것은 수업 시간에 배운 내용을 반복해서 한 번씩 다시 써보는 과정이라고 이해하면 된다. 예를 들어 가을을 주제로 하는 시를 배울 때 울긋불긋한 단풍잎을 표현하거나 낙엽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표현하는 형용사를 익힌 후 이를 이용해 가을에 관한 시를 써본다. 시를 쓴다고 해서 새로운 글을 짓는 것이 아니다. 배운 시를 반복해서 쓰는 것이 대부분이며, 선생님은 아이가 소리를 나타내는 형용사와 색깔을 나타내는 형용사를 확실하게 구분하는지 확인하는 정도에 그친다.
1 집 안에서 이불과 의자 등을 이용해 텐트를 치고 그 속에서 책을 읽고 있는 준용이. 2 미국 유학 시절 금요일마다 열리는 초등학교 전체 조회 시간에 정현이와 친구가 바이올린으로 미국 국가를 연주했다. 앞에 서 있는 사람은 교장 선생님.
3 정현이가 4학년 때 쓴 이야기. 4 준용이가 그리고 쓴 ‘My Comic Book’ 내용. 주인공 마틴은 자신이다.
학년이 올라가도 빅 라이팅은 계속된다. 4학년(만 8세)이 되면, 정해진 날에 일정한 양의 쓰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완성하는 것이 아니라 한 주제에 관한 글을 쓰고자 계획(planning)하는 단계부터 시작하는 훈련에 들어간다. 그러는 동안 아이의 작문 실력이 조금씩 늘다가 어느 순간 깜짝 놀랄 만큼 향상된다.
하나의 글을 완성하기 위해 작문 시간마다 자신의 생각을 먼저 정리하고, 글의 구성을 손보는 훈련을 한다. 아이들의 이러한 노력보다 더 인상적인 것은 글이 완성되지 않은 단계에서 모든 아이들의 글을 반복해서 읽고 자세하게 코멘트를 달아주는 선생님의 역할이다. 초등학교 저학년부터 시작된 바로 이러한 형태의 글쓰기 교육이 쌓여서 대학에 진학해 ‘에세이’라고 불리는 소논문을 쓰는 바탕이 되는 것 같다.
중·고등학교에서 아무런 훈련이 되지 않은 상태로 대학에 가서 글쓰기 교육을 따로 받아야 하는 우리나라 대학생들의 처지와 비교하면 영국 아이들의 글쓰기 훈련이 어려서부터 얼마나 체계적으로 진행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침대 낙서로 시작해 코믹 북 쓰기 도전
아이들의 영어 쓰기 훈련이 학교 교육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준용이가 침대 구석에 낙서와 같은 그림을 그린 것처럼 아이들은 누구나 자신만의 공간에 무엇인가를 표현하고자 한다. 하지만 표현의 방법은 아이마다 다르다.
정현이는 요즘 한국에서도 큰 인기를 누리고 있는 ‘윔피 키드의 일기(Diary of Wimpy Kid)’를 재미있게 읽은 후 한동안 주인공 그레그(Greg)처럼 그림을 섞은 자신만의 일기를 썼다.
반면 준용이는 ‘포켓몬’ 관련 책을 모조리 읽더니 포켓몬 카드, 닌텐도 포켓몬 게임, 포켓몬 캐릭터 따라 그리기에 열중했다. 마지막에는 두꺼운 노트 표지에 ‘My Comic Book’이라는 제목을 쓰고 자신이 주인공인 포켓몬 만화를 그려나갔다.
아이들의 글쓰기에는 자기만의 방식이 있다. 또 자기만의 방식에 몰입할 때 비로소 좋은 글이 나온다. 처음부터 정해진 틀에 맞추려 하기보다 아이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글쓰기를 시도하는 것이 훨씬 좋다. 글쓰기 소재로서의 아이들의 상상력을 뒷받침해주려면 충분한 인풋(input), 다시 말해 충분한 읽기와 듣기가 선행돼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오미경은 1994년부터 2005년까지 서울의 한 고등학교에서 영어 교사로 재직하다 2005년 가족과 함께 영국으로 이주해 6년, 다시 미국에서 1년을 살다 귀국했다. 서강대와 영국 워릭대학교(University of Warwick)에서 각각 영어교육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세 살과 한 살이던 두 아들은 열 살과 여덟 살이 돼 한국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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