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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leb 인생 사용설명서 열네 번째 | 가슴 뛰는 선물

“저놈은 될 것 같다”

프로레슬러 김민호 인생을 바꿔놓은 노지심 관장의 한마디

글 | 김명희 기자 사진 | 조영철 기자

입력 2012.12.17 17:57:00

1960, 70년대 프로레슬링은 어르신부터 꼬마까지 온 동네 사람들을 TV 앞으로 불러 모은 최고 인기 스포츠였다. 하지만 드라마, 영화 등 볼거리가 넘쳐나면서 급속히 인기가 추락해 지금은 선수도 몇 명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나라에 단 한 명뿐인 20대 프로레슬러 김민호는 여기에 모든 희망을 걸었다. 학창시절 책받침 속 영웅이던 노지심 관장과의 만남이 그의 인생을 바꿨다.
“저놈은 될 것 같다”


희고 고운 피부, 울퉁불퉁한 근육, 검정색 레슬링 팬티와 무릎 보호대…. 김민호 선수(25)의 첫 인상은 만화 캐릭터 ‘아톰’의 성인 버전 같다. 프로레슬링하면 보통 험상궂은 이미지가 떠오르지만 그의 앳된 얼굴은 지구의 평화를 지키러 동분서주하는 만화 영화 속 영웅 이미지와 더 가까워 보였다. 이 순진해 보이는 청년의 어깨에 실제로도 한국 프로레슬링의 미래가 걸려 있다. 한때 최고 인기를 구가했던 프로레슬링은 점차 사양 종목으로 접어들어 이제 전국적으로 등록된 선수가 고작 12명에 불과하다. 그나마 20대는 김민호 선수가 유일하다. 인기가 없으니 스폰서를 잡기가 힘들어 1년에 경기도 몇 차례 안 열린다. 레슬링만으로는 생계가 어려운 것은 당연지사. 선수들 대부분 부업으로 살아간다. 김민호도 보안업체에서 하루 10시간 씩 근무하고, 퇴근 후 3시간 정도 훈련을 하고 있다. 그는 왜 돈은 안 되면서 몸은 몇 배로 힘들고 때로는 부상까지 걱정해야 할 프로레슬러의 길을 택했을까.
“학창시절부터 이왕표·노지심 선수 사진을 책받침으로 만들어 갖고 다닐 정도로 레슬링을 좋아했어요. 처음에는 재밌고 신기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직접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2006년 고등학교 졸업 후 그는 무작정 노지심(54) 관장이 운영하는 도장의 문을 두드렸다. 당시 그의 몸무게는 140kg(키 183cm), 아무리 힘을 쓰는 레슬링이라 해도 운동을 하기에는 버거운 체격이었다. 김 선수는 매일 웨이트트레이닝과 유산소 운동을 6시간씩 하며 5개월 반 만에 46kg을 감량했다. 체중 감량 후 컨디션을 회복하는 데만 1년이 걸렸다. 이후 스쿼트 1천 개, 푸시업 3백 개, 복근 운동 5백 회를 하는 입단 테스트를 가볍게 통과했다. 처음에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노 관장이 그제야 눈길을 줬다
“입단 테스트는 체력도 체력이지만 근성을 보는 것 같았어요. 레슬링이라는 운동이 과정이 워낙 고되기도 하고, 또 링 위에서 죽는 한이 있어도 관중들에게 뭔가 보여주겠다는 근성이 있어야 하거든요.”
그런 과정을 거쳐 2008년 4월 첫 프로 데뷔전에 섰다. 그는 긴장했던 탓에 경기 내용은 잘 생각나지 않는다고 했다.
“테마곡에 맞춰 등장할 때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링에 올라 ‘땡’ 하고 공이 울리는 순간부터는 백지 상태가 돼요. 정신을 차려보면 경기 내용은 생각나지 않고 온 몸이 쑤시고 아프기만 하죠(웃음).”
흥분 상태에서 모든 것을 운동 신경에 맡겨야 하기 때문에 레슬러는 평소 자신의 몸을 더 혹독하게 단련해야 한다. 공격도 공격이지만 맹수 우리 같은 링 안에서 자신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다. 그래서 ‘범프’라는 낙법과 충격 흡수를 위해 상대 기술을 받아내는 훈련을 한다. 하지만 아무리 단련이 잘 돼 있다고 해도 가족이 보기엔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그의 어머니 역시 아들 몰래 경기를 보러 왔다가 대성통곡하는 장면을 그에게 들키고 말았다. 이삿짐을 나르는 아버지를 도와 평생 봉제 일을 하면서 힘들게 아들을 키운 어머니였다. 손에 굳은살이 박여 딱딱해질 때까지 일했지만 월세를 전전하며 고생스럽게 살아온 어머니의 눈물은 그의 가슴을 후벼 팠다. 그는 “그 눈물 때문에 가슴도 아팠지만 결과적으론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동기부여가 됐다”고 말했다.

처음엔 눈길 한 번 안주던 스승, 근성 인정하고 제자로 받아줘

“저놈은 될 것 같다”

김민호 선수의 별명은 ‘근성의 아이콘’이다. 좀처럼 후배에게 눈길을 주지 않는 노지심 관장도 그의 근성을 인정하고 마지막 제자로 받아들였다.



데뷔전을 치른 얼마 후 그는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레슬링 인기가 시들한 우리나라와 달리 일본은 프로레슬러가 3백 명이 넘고, 경기가 있는 날엔 잠실야구장만한 경기장에 관중이 꽉 들어찬다. 그는 여기서 매일 토할 때까지 지독하게 훈련을 했다. 그렇게 3개월 동안 하드 트레이닝을 받고 돌아오자 뜻밖의 선물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늘 같은 선배 노지심 관장이 그를 직접 지도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노 관장이 이처럼 후배들에게 인색한 데는 그 나름의 이유가 있다. 레슬러가 되겠다는 포부를 안고 도장을 찾아오는 선수는 적지 않다. 하지만 고된 훈련을 극복하고 진짜 프로가 되는 선수는 손에 꼽을 정도다. 그나마 제자로 받아들인다고 해도 생계 문제 등으로 대부분 이종격투기 같은 인기종목으로 갈아타거나 중도에 포기하고 만다.
“키워 놓으면 도망가고, 할 만하면 도망가니까 관장님도 어느 순간 (제자를 키우는 것에 대한) 마음을 접으신 것 같아요. 저를 받기 전에 한 스무 명은 그렇게 나갔다고 하더라고요. 저도 이렇게 버틸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 하다가 일본에서 훈련을 견디고 오니까 진짜 자식으로 받아들여 주신 거죠. 지금도 제가 마지막 제자라고 하세요. 다시는 가르칠 일이 없다고. 사실 제가 버틸 수 있었던 건 연습생 시절 관장님의 말 한마디 덕분이었어요. 관장님이 혼잣말로 ‘저놈은 될 것 같다’고 하신 걸 우연히 들었는데, 그간 고생한 게 싹 씻겨 나가고 힘이 솟더라고요.”
노지심 관장은 학창시절 아마추어 레슬링 선수로 출발해 17세 때 한국 레슬링의 전설인 고 김일 선수가 운영하던 도장에 들어가 프로레슬링을 시작했다. 노 관장은 일찍 아마추어 레슬링부터 시작했기 때문에 기본기가 탄탄하다.
“제가 다른 사람보다 늦게 운동을 시작해서 기초가 많이 부족했는데 관장님 덕분에 그런 것들을 빠른 시간 안에 보완할 수 있었죠. 관장님을 만난 게 제 인생 최고의 행운이 아닌가 싶어요.”
그는 다른 선수보다 길고 고된 연습생 기간을 버텨내 프로레슬링 계에서는 ‘근성의 아이콘’으로 불린다. 주특기는 상대를 들어 올려 던지는 슈플렉스. 전체적으론 관절꺾기보다 잡고 던지는 기술에 능하다. 그의 바람은 레슬링이 지금보다 사랑받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그는 “단지 상대를 힘으로 제압해 이기는 것이 목표인 다른 격투기와 달리 레슬링은 오락적인 면이 강하며 스토리가 있기 때문에 여성들도 재밌게 즐길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레슬링 경기를 보면 약자가 결국엔 이기기도 하고, 정의의 레슬러가 악당을 물리치기도 하죠. 레슬링을 통해 저처럼 힘든 상황에 처한 분들에게 용기를 주고 싶어요. 또 저로 인해 눈물 흘렸던 어머니가 언젠가는 저 때문에 기쁨의 눈물을 흘리도록 하고 싶고, 제자로 삼아주신 관장님께도 보답하고 싶어요.”

여성동아 2012년 12월 58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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