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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 디자이너 이정민이 밀라노에서 보내온 편지

삼성그룹 최연소 여성 임원 출신

글 | 구희언 기자 사진 | 조영철 기자, 최애경 제공

입력 2012.09.18 14:14:00

디자이너에게 ‘꿈의 무대’로 통하는 이탈리아 밀라노. 그곳에서 자신의 이름을 내건 브랜드로 우뚝 선 한국 패션 디자이너가 있다. 외국인에게 배타적이고 여성보다는 남성, 게이 디자이너의 가치를 훨씬 높게 치는 편견의 장. 그곳에서 ‘입으면 행복해지는 옷’을 만들어온 패션 디자이너 이정민이 보내온 편지.
패션 디자이너 이정민이 밀라노에서 보내온 편지


‘삼성그룹 최연소 여성 임원’.
2003년 1월, 패션계는 패션 디자이너 이정민(44)에게 주목했다. 삼성그룹 제일모직에서 해외 진출을 모색하며 그를 영입한 것. 그는 상무보로 영입된 지 2년여 만인 2004년 9월 제일모직 이탈리아 밀라노 법인의 패션 브랜드 ‘데렐쿠니(Derercuny)’를 선보이며 까다롭기로 소문난 할리우드 스타와 엘르, 보그 같은 패션지 편집장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밀라노에서 자신의 이름을 건 브랜드 ‘미나 제이 리(Mina J Lee)’를 론칭하고 아동복 편집숍 ‘by BE’를 운영하며 바쁘게 사는 그가 패션업계 이야기와 밀라노에서의 삶을 담은 자서전 ‘밀라노, 이곳에서 나는 영원히 시작이다’를 출간했다. 얼마 전 국내 모피 브랜드 ‘사바티에((주)볼륨원)’전무로 영입돼 밀라노에서 론칭할 새로운 프로젝트를 구상 중인 그를 서울 압구정동 한 카페에서 만났다. 다음 날 오전 비행기로 출국한다는 말에 부리나케 사진부터 찍자고 들이대는 기자에게 그는 “이렇게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 하는 인터뷰는 처음이다”라며 호호 웃었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구김살 없이 밝은 그의 표정에서 건강한 에너지를 느낄 수 있었다.
수많은 브랜드가 생겨나고 없어지는 패션의 성지 밀라노에서 창조의 산통을 겪고 있는 그에게 ‘귀찮을 정도로 많은 질문’을 담은 편지를 보냈다. 얼마 후 온 답장. 활력 넘치던 말투와 태도가 고스란히 담긴 메일이었다.

트렌드 따르지 않는 디자인으로 승부
▼ 국내 모피 브랜드 ‘사바티에’ 전무로 영입돼 밀라노에서 신규 프로젝트를 준비 중이라고 들었어요.
“내년 2월 밀라노 컬렉션 기간에 맞춰 모피 라인과 여성복 라인 새 브랜드를 론칭할 예정이에요. 모피 라인은 사바티에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인 이은영 이사가, 여성복 라인은 제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맡았죠. 미니 컬렉션으로 작지만 강하게 론칭할 생각이죠. 수많은 브랜드가 생겨나고 없어지는 밀라노에서 최대한 주목받을 수 있게 브랜드 아이덴티티가 살아 있는 강렬한 컬렉션을 선보이고 싶어요.”

▼ ‘밀라노, 이곳에서 나는 영원히 시작이다’, 이 책을 쓴 계기가 있나요.
“오래전부터 글 쓰는 것이 꿈이었어요. 고등학생 때는 매일 일기든 편지든 습작처럼 많이 썼어요. 결정적인 계기는 예전 제일모직 상무로 있으면서 ‘데렐쿠니’ 프로젝트를 할 당시 인터뷰한 기자와의 인연이었죠. 그가 제게 ‘밀라노 패션계의 12월’이라는 주제로 칼럼을 써서 보내달라더라고요. 흔쾌히 오케이했죠. 글을 받아 본 기자가 전화해서 “글이 너무너무 좋아요, 글 한번 써보세요! ” 하더라고요. 한편으로는 ‘이 바닥에서 오랫동안 살면서 일해보지 않은 사람은 쓰지 못할 이야기’를 쓰고 싶다는 욕심도 있었어요.”

▼ 어릴 적 꿈이 작가와 디자이너였는데, 두 가지를 모두 이룬 셈이군요.
“겨우 책 한 권 내고 작가의 꿈을 이뤘다고 하는 건 말도 안 되죠. 그래도 책을 내니 어릴 적 꿈을 조금이라도 이룬 느낌이라 만족해요.”



▼ 밀라노라는 도시가 패션 디자이너들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나요.
“패션계는 밀라노와 파리, 뉴욕과 런던이 중심으로 돌아가요. 패션은 철저히 상업예술이라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컬렉션을 만들었다 해도 발표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어요. 그렇기에 세계 시장에서 인정받으려면 국적 불문하고 전 세계 바이어와 취재진이 몰려드는 이 도시들 중 한 곳에서 컬렉션을 발표하고 평가받아야 해요. 모든 신진 디자이너와 브랜드가 이곳의 문을 두드리는 이유죠.”

▼ 험난하고 치열한 경쟁의 세계, 그것도 남성이면서 동성애자인 디자이너들이 ‘대세’인 곳에서 ‘동양인 여성’으로서 당신의 무기는 뭐였나요.
“저는 트렌드를 따르지 않아요. 옷을 보면 ‘아, 이건 미나 제이 리의 옷이다’ ‘이정민만의 느낌이다’라는 말을 들을 수 있도록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도 아이덴티티를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죠. 중요한 건 입을 수 있는 옷을 만든다는 점이었죠. 저는 옷이 스펙터클한 예술 작품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일상에서 늘 입어야 하는 것이고, 제가 만든 옷이 일상의 즐거움과 기쁨이 됐으면 해요. 대세나 트렌드에 휩쓸리지 않고 저만의 디자인을 한 것이 무기라면 무기일까요.”

패션 디자이너 이정민이 밀라노에서 보내온 편지

▼ 지금껏 만든 작품 중 가장 애착이 가는 것이 있다면.
“보그 이탈리아에 주목할 만한 신진 디자이너로 선정된 ‘데렐쿠니’의 2006년 가을·겨울 컬렉션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보그 이탈리아 편집장 프랑카 소차니가 전 세계 바이어들과 기자들 앞에서 저를 소개했죠. 떨리는 마음으로 마이크를 넘겨받아 컬렉션 콘셉트를 소개하던 제 모습이 아직도 생각나네요.”

▼ 함께 작업하면서 기억에 남거나 영감을 준 모델이 있나요.
“제 패션쇼에 빠지지 않고 선 블라다는 제가 가장 예뻐하는 모델이죠. 올가 셰러는 제 옷을 참 잘 소화했어요. 톱모델답지 않게 착하고 매너 있는 코코 로샤, 어여쁜 한국 모델 혜박, 한혜진, 김다울…. 너무 많네요.(그는 책에서 고 김다울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기도 했다.)”

패션 디자이너 이정민이 밀라노에서 보내온 편지

최근 국내 모피 브랜드 사바티에 전무로 영입된 이정민 씨.



▼ 자신의 성향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오래 알고 지낸 사람들은 ‘언제나 똑같은 사람’ ‘참 안 변하는 사람’ ‘여전한 너’ 이렇게들 말하더라고요.”

▼ 디자이너의 삶, 무엇을 포기하고 무엇을 얻는 삶인가요.
“6개월을 주기로 쉼 없이 돌아가기에 시간을 두고 여유 있게 즐기는 일은 일단 포기해야 해요. 출산 전날까지 패션쇼를 준비하고, 출산 후 5일이 지나 바로 일을 시작했죠. 출산과 육아 휴가가 한국에 비해 많이 보장된 곳이지만 이탈리아에서 6개월에 한 번씩 컬렉션을 발표하는 디자이너가 6개월의 출산 휴가를 다 쓴다는 건 지나가는 개도 웃을 일이죠(웃음). 디자이너들은 앤티크 마켓과 빈티지 시장을 돌아다니고 디자인과 미술전을 보러 다니며 좋아하는 사진작가와 건축가의 작품집을 봐요. 파리의 오래된 서점에서 1940년대 인테리어와 의상으로 가득한 책을 찾으면 흥분하고, 런던 에인젤 거리에서 오래된 빅토리아 시대 비딩 드레스를 발견하곤 환호하죠. 이스탄불 뒷골목 고물상에서 옛날 장신구나 색 바랜 책을 보며 영감을 얻고요. 그런 데서 삶이 열정으로 채워진다고 해야 할까요.”

▼ 자신을 워커홀릭이라고 생각하나요.
“‘때로는 워커홀릭’이라는 말이 맞을 것 같아요. 사실 잠든 순간을 빼면 늘 머릿속에서 일을 생각하니 워커홀릭 기질이 없지는 않죠. 100%는 아니에요. ‘시도 때도 없이’ 일하긴 하지만 ‘항상’ 일하는 건 아니거든요. 일하고 싶을 땐 새벽 3시건 4시건 디자인하고 메일을 쓰곤 해서 많은 사람이 ‘도대체 몇 시에 자느냐’고 놀라곤 했죠.”

▼ 디자이너로서 보람을 느낄 때는 언제인가요.
“‘여자를 행복하게 해주는 옷’ ‘저를 느낄 수 있는 옷’ ‘몇 년의 시간이 지나도 가장 아끼는 옷’ 같은 이야기를 들으면 행복해요. 입어도 입어도 질리지 않는다고, 입고 나갈 때마다 누구 옷이냐고 묻는다는 이야기를 주위 사람들에게서 들으면 보람을 느끼죠.”

▼ 스트레스가 많이 쌓이는 직업일 듯한데 어떤 식으로 푸나요.
“사실 어마어마하게 스트레스가 쌓이는 직업이지만 그나마 다행인 건 제가 스트레스를 덜 받는 타입이라는 거죠. 낙천적인 아버지의 성격을 빼닮아 긍정적인 편이에요. 최악의 상황에 대한 대비가 부족한 건 단점이지만, 유학 문제처럼 인생의 큰 터닝 포인트에서는 그런 게 강점으로 작용했어요. 스트레스를 받으면 책을 읽어요. 그다음은 여행. 떠난다는 것만큼 언제나 마음을 설레게 하는 것도 없죠.”

▼ 좋아하는 음악과 음식이 궁금해요. 요리 실력은 어떤가요.
“르네 오브리(Rene Aubry)의 음악을 좋아해요. 한국 가요 중에선 이문세의 ‘그녀의 웃음소리뿐’ ‘휘파람’. 너무 80년대 감성인가요(웃음). 음식에는 관심도 많고 요리도 잘하는 편이에요. 이탈리아 토스카나와 시칠리아의 음식을 좋아해요. 한국 음식은 수제비, 칼국수, 한정식 등 다 좋아하지만 가장 맛있는 건 각종 나물과 미더덕 넣은 된장찌개랑 총각무와 조기 구이가 있는 엄마표 집밥이죠.”

▼ 책에서 ‘아플래야 아플 수 없는 인생’이라고 했는데, 실제로 컬렉션 준비하다가 아파서 고생한 적은 없나요.
“어릴 적엔 참 몸이 약했는데, 이탈리아 와서 체력이 많이 좋아졌죠. 육체는 정신의 지시를 따른다는 말을 믿거든요. 패션쇼를 하루 앞두고 지독한 목감기 때문에 말을 하려고 하면 통증이 심해 눈물날 정도인 적도 있었어요. 신기하게도 쇼장에 도착하니 목소리가 잘 나오는 거예요. 인터뷰까지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데 그때부터 다시 아파서 ‘악’ 소리가 날 지경이었죠. 참, 이런 건 뭐로 설명해야 할까요. 불가사의하죠(웃음).

▼ 디자이너가 안 됐다면 뭘 하고 있을까요.
“소설가가 돼 20대처럼 방황하며 글을 쓰고 있을 것도 같고, PR 매니저나 마케팅 전문가가 돼서 신나게 일할 것 같기도 해요. 분명한 건 무언가 직업을 가지고 그 일을 열심히 하고 있을 거란 거죠.”

▼ 평소에 즐겨 입는 스타일을 소개해주세요.
“하이웨이스트 원피스와 높은 굽의 샌들. 코쿤형의 두툼한 코트에 하늘하늘한 시폰 드레스. 트렌치코트에 블랙 팬츠와 화이트 셔츠. 그리고 앤티크 귀걸이와 힐. 보통은 제 컬렉션 옷이나 빈티지 옷을 주로 입어요.”

패션 디자이너 이정민이 밀라노에서 보내온 편지

1 디자이너 루이자 베카리아와 이야기하고 있는 이정민 씨. 2 이정민 씨가 백스테이지에서 모델 올가의 옷을 점검하고 있다. 3 모델 블라다(왼족), 혜박과 함께. 4 미나 제이 리 2012 FW 컬렉션.



출산 후 아동복에도 관심 생겨
▼ 결혼하고 15년 만에 아이(유진)를 얻었는데, 비교적 늦은 나이여서 감회가 남달랐겠어요.
“한국 나이로 마흔하나에 첫아이를 낳았으니 늦은 편이죠. 세상에서 가장 잘한 일이 아이를 낳은 거라는 이야기를 친구들에게 수없이 들었지만 별로 와 닿지 않았어요. 문득 30대의 끄트머리에서 ‘지금 안 하면 내 인생에서 영원히 할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임신 기간 내내 정말 행복했고 아이가 태어날 때 감동이 지금도 생생해요. 몇 달간 이름 짓느라 남편과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죠. 유진(Eugene)은 ‘잘 태어난’이라는 뜻이에요. 한국 이름 같지도 이탈리아 이름 같지도 않은, 부르기 좋은 이름을 짓고 싶었거든요.”

▼ 출산 경험이 여러 면에서 디자이너 이정민을 바꿔놨겠군요.
“디자이너 이정민이 아니라 인간 이정민의 인생을 바꿔놨죠. 이 세상에 ‘이렇게 오로지 사랑스럽기만 한 것이 존재하는구나’를 깨달았어요. 성격도 좀 좋아진 것 같고…(웃음). 제가 이렇게 엄마 노릇을 잘할 수 있을 줄 예전에는 미처 몰랐죠. 새로운 삶의 에너지가 차오르는 느낌을 받고 있어요. 아동복에도 관심이 생겨서 아동복 편집숍 ‘by BE’를 열었어요.

▼ 가장 최근에 산 것은 뭔가요.
“암스테르담 스키폴 공항에서 유진에게 줄 선물로 토이 스토리 미니 트롤리 백을 샀어요. 산에 놀러 갈 때 벌써 곰 인형과 물안경, 그림책을 넣어서 달달달 끌고 갔죠.”

▼ 제일 연락을 자주 주고받는 사람은 누구인가요.
“로레나. ‘데렐쿠니’ 프로젝트부터 함께해 지금은 ‘by BE’를 함께 운영하는 오랜 친구죠. 하루에도 문자와 메일을 몇 통씩 주고받아요. 10년 넘게 같이 일하다 보니 이제 남편보다 더 자주 연락하는 사이가 됐어요.”

▼ 남편이 밀라노에서 실내공간 디자이너로 활동하고 있죠. 부부 디자이너로 사는 데 장점과 단점이 있다면(동갑내기 남편 김범수 씨와는 서울에서 만나 결혼 후 함께 이탈리아로 유학을 왔다.)
“단점은 없어요. 장점이 많죠. 남편은 저랑 정반대 성격을 가진 사람이죠. 훨씬 꼼꼼하고, 눈썰미도 좋고 상황 판단력도 뛰어나요. 저는 제 기분대로 상황을 쉽게 판단하는 편인데, 남편은 객관적으로 세심하게 상황 판단을 하는 사람이라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조언을 많이 해줘요. 처음에는 ‘무슨 그런 소리를 해? 아냐, 내 말이 맞아’ 하다가도 시간이 지나면 남편의 직관이 맞은 적이 많죠. 디자인뿐 아니라 커머셜한 일도 하고 있어서 여러 방면으로 조언해주고 있어요.”

▼ 각자의 디자인에 대해 평가도 하나요.
“저는 좀 세세하게 조언하는 편이고 남편은 큰 틀을 보며 조언하는 편인데, 서로 자기가 맞다고 우기죠(웃음). 남편이 의견을 말하면 대충 듣는 척하지만 사실은 새겨듣고 있어요.”

▼ 인생 선배이자 업계 선배로서 후배들에게 조언한다면.
“겁내지 말고 오직 자신을 믿을 것. 열정과 에너지, 호기심이 나를 지탱해준다는 것. 실행해보고 안 되면 그때 깨달아도 늦지 않으니 미리부터 안 될 거라고 절망하지 말 것. 이 세상의 아름답고 예쁜 것, 재미있는 것, 맛있는 것을 사랑할 것. 사진과 건축, 디자인, 현대 미술에 관한 책을 많이 읽고 여행을 많이 할 것. (그는 책의 한 챕터를 젊은 후배들에게 조언하는 데 할애했다.)”

▼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해요.
“이번에 밀라노에서 사바티에와 론칭하는 새로운 브랜드에 올인할 계획이에요. 세계 시장에서 인정받는 브랜드를 만들고 싶어요. 한국에 유럽 아동복 편집숍 ‘by BE Seoul’을 열 생각으로 파트너를 찾는 중이라 그것도 최선을 다해야죠.”

▼ 10년 후 이정민은 뭘 이뤘거나 어떤 것에 도전하고 있을까요.
“글쎄요, 10년 후면 54세인데…. 저도 궁금하네요. 그래도 언제나 그래 왔고 지금도 그렇듯이 무언가를 열심히 하고 있겠죠. 그거 하나는 확실해요.”

참고도서 | 밀라노, 이곳에서 나는 영원히 시작이다(예담)
장소협찬 | 커핀그루나루 압구정역점, 사바티에

여성동아 2012년 9월 58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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