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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병 김정운 vs 수컷의 향기 허태균

자뻑과 자학 사이, 한국의 중년 남자를 말하다

글 | 이지은 동아일보 문화부 기자 사진 | 양회성 동아일보 사진부 기자

입력 2012.04.17 15:10:00

“한국 사회의 모든 문제는 분단이나 이념이 아닌 40~50대 중년 남자의 불안에서 기인한다”는 남자가 있다. 또 다른 남자는 “한국 중년 남자의 뿌리 깊은 신념이 실은 착각에 의한 것일 때가 많다”고 주장한다. 감추고 싶은, 혹은 알면서도 모른 척 해온 중년 남자의 ‘거무튀튀한’ 속내를 여지없이 파헤친 책을 비슷한 시기에 펴낸 김정운 명지대 인문교양학부 교수와 허태균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가 바로 그 두 남자다.
왕자병 김정운 vs 수컷의 향기 허태균

40~50대 중년 남자들의 심리를 유쾌하면서도 심도 있게 풀어낸 김정운 교수(왼쪽)와 허태균 교수.



김정운(50) 교수는 2009년 철들지 않는 한국 남자들의 심리를 콕 집어낸 책 ‘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로 베스트셀러 작가 반열에 올랐고, 신작 ‘남자의 물건’(21세기북스)도 온오프라인 서점의 종합베스트셀러 5위권을 유지하며 인기몰이 중이다. “우리는 늘 착각 속에 살지만, 결국 ‘자뻑’(자기도취)하고 살아야 행복하다”는 내용을 담은 허태균(44) 교수의 처녀작 ‘가끔은 제정신’(쌤앤파커스)도 2월 첫째 주 인문 분야 베스트셀러 1위(예스24 집계)에 오른 뒤 꾸준히 사랑을 받고 있다.

“40대 후반 철없는 내 이야기에 모두 공감하더라”
두 교수가 한국 중년 남자에 대한 이야기를 허심탄회하게 나누는 자리를 마련해보자는 생각을 한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하나는 두 교수가 펴낸 저서의 주요 독자층이 40~50대 중년 남성이라는 점. 김 교수는 “한국 중년 남성의 솔직한 마음을 40대 후반의 철없는 ‘내 이야기’를 통해 가감 없이 전달했더니 많은 내 또래들이 공감을 전해왔다. 덕분에 과분할 정도의 관심과 사랑을 받았다”고 말했다. 허 교수도 상황은 비슷하다. 기자에게 “허 교수의 ‘가끔은 제정신’이 너무 재미있다”고 이야기한 사람은 ‘주간동아’에 ‘한기호의 책동네 이야기’를 연재하고 있는 한기호 출판마케팅연구소장이었다. 올해 쉰네 살인 그는 “우리 사회를 이끌고 있는 한국 중년 남성은 모두 ‘자뻑’과 자학 사이에서 살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며 나와 비슷한 중년 남성의 ‘자뻑’ 사례에 묘한 동질성과 위안을 얻었다”고 전했다.
다른 하나는 두 교수가 고려대 심리학과 81학번 및 87학번으로 함께 목욕탕까지 가는 친한 선후배 사이라는 점. 선배 김 교수는 저서를 통해 후배 허 교수의 별명을 ‘수컷의 향기’라고 ‘폭로’했다. “가슴에 털까지 수북한 허 교수는 목욕하고 나올 때 와이셔츠에 넥타이까지 다 맨 다음에야 비로소 팬티를 입는다. 그만큼 자신 있다는 거다. 그는 세상의 모든 남자를 둘로 분류한다. 팬티를 ‘가장 먼저 입는 남자’와 ‘가장 나중에 입는 남자’. (허 교수는) 목욕탕에 갈 때마다 나를 한없이 동물적 열등감에 빠뜨린다.”(‘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
이 같은 내밀한 속사정까지 말할 정도로 친하다면, 두 교수는 걸쭉한 ‘수다’를 떨면서 한국 중년 남자에 대한 ‘충격적’인 진실까지도 다 보여줄 수 있지 않을까. 이 같은 기자의 제안을 두 교수 모두 흔쾌히 수락했다. 3월 8일 오전 김 교수가 소장으로 있는 여러가지문제연구소에서 두 교수를 만났다.

‘나 없으면 세상 무너진다’는 믿음도 알고 보면 불안

왕자병 김정운 vs 수컷의 향기 허태균

40~50대 중년 남자들의 심리를 유쾌하면서도 심도 있게 풀어낸 김정운 교수(왼쪽)와 허태균 교수. 김 교수와 허 교수가 ‘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 일본어판을 보고 있다. 김 교수는 여기서 허 교수의 남성성에 대해 공개적으로 언급했다.





서울 한남동에 있는 연구소에는 인터뷰 공간이 따로 있다. 여성의 세미 누드를 표현한 팝아트 작품이 걸린 곳으로 사진 촬영도 꼭 여기서만 한다고 했다. 김 교수는 “가슴 페티시가 있어 이 그림을 보면 기분이 좋아진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그는 올해 안식년을 맞아 일본에 갔다가 잠시 한국에 들어왔다고 했다. 오랜만에 만났다는 두 사람은 김 교수가 폭로한 허 교수의 별명인 ‘수컷의 향기’를 화제 삼아 말문을 열었다.

허태균 “김 선배(허 교수는 김 교수를 선배라고 불렀다)가 갑자기 전화를 했어요. ‘책이 나온다. 책에 네 이야기도 나오는데, 좋은 내용이야. (책에 나오는 걸) 동의한 거다’라며 딱 끊었어요. 솔직히 제 실명까지 거론할지 몰랐어요. 덕분에 우리 과 학생들까지 제 내밀한 속사정을 다 알게 됐지요.”

김정운 “허 교수의 남성성을 널리 알렸으니 나한테 고마워해야지. 골프채 세트를 사줘야 한다니까. 하하.”
두 교수가 만난 날 여야는 총선을 앞두고 공천 명단을 발표했다. 탈락한 현직 국회의원들이 강하게 반발하고, 객관적으로 볼 때 당선 가능성이 낮은 인물도 한사코 출마하려는 모습에 대해 두 교수는 “남자의 불안이 극단적으로 표출되는 사례”라고 꼬집었다. 자연스레 대화는 한국 중년 남성의 권력욕에 대한 이야기로 흘러갔다.

김정운 “40~50대 한국 중년 남성들은 사회 활동을 그만둔 후에도 50년 가까이 살아야 한다는 것에 엄청난 불안을 느껴요. 열심히 일만 해온 이들은 ‘계급장’을 떼면 남는 게 하나도 없어요. 그러니 쥐꼬리만한 권력이라도 놓지 않으려고 노력하죠.”

허태균 “또 그들은 스스로 여전히 대단하다고 믿습니다. 자신이 없으면 세상이 무너질 거라고 생각하죠. 저는 책에서 이런 믿음이 실은 거의 다 착각이라고 신랄하게 말했어요. 주요 독자가 30, 40대 남성인데, 재미있게 받아들이는 30대와 달리 40대 이상은 그 내용을 부정하고 싫어하죠.”

김정운 “흥미로운 건 권력을 비판하고 민주화와 정의를 추구했던 ‘386세대’, 이제는 50세를 바라보는 그들에게서도 이런 모습이 짙게 드러난다는 점이에요. 그들은 젊은 시절 사회구조적인 문제를 고민하고 투쟁하느라 개인의 삶과 행복에 대해 생각할 겨를이 없었어요. 그러다 보니 그들에게 가장 친숙한 건 일이었고, 또 지위가 올라가면서 일이 곧 권력이 됐죠.”

허태균 “그들은 젊을 적 옳고 그름으로만 세상을 판단하며 살아왔지만, 지금 사회는 다원화되면서 정사(正邪)가 불분명해짐은 물론 인생 자체가 불확실해졌어요. 이 같은 불확실성을 즐겨본 적이 없는 이들은 실존에 대한 불안이 커질 수밖에 없고, 그렇기에 가장 익숙한 권력에 매달리는 겁니다.”

김정운 “40~50대 가장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해가면서 자녀를 위해 헌신하는 것도 그 이면엔 자신의 존재 불안을 해소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어요. 교육 문제는 심리적으로 접근해야지, 제도적으로 접근하면 절대 해결될 수 없어요.”

허태균 “내가 괴롭고 힘들지만, 그만큼 노력했기에 자식은 잘될 거라고 착각하는 겁니다. 인고의 개념으로 보는 거죠. 노력이 문제인 게 아니라, 노력의 방향이 잘못됐다는 겁니다.”

김정운 “이들은 삶이 재미있으면 불안하고, 행복하면 죄의식을 느끼죠. 예를 들어 주말에 늦잠 자고 TV 보면서 빈둥거리면 괜히 마음이 불편해지는 거죠. 그래서 ‘나 자신과 싸워 이긴다’며 강박적으로 자신을 괴롭혀요.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불안한 사람들이 보통 적을 분명히 함으로써 극복하고자 한다는 점입니다. ‘보수 꼴통’ 아니면 ‘좌빨’만 남는 한국의 정치 사회가 이 같은 상황을 극명히 보여주죠. 이런 중년 남자가 ‘성질 고약한 늙은이’로 늙으면 엄청난 사회 갈등을 야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만의 물건, 나만의 이야기를 만들어라

왕자병 김정운 vs 수컷의 향기 허태균

‘남자의 물건’에 소개한 김 교수의 만년필. 사진 제공 21세기북스.



봇물 터지듯 두 교수의 한국 중년 남자에 대한 비판이 이어졌다. 하지만 두 교수도 딱 그 또래의 한국 남자. 이 같은 비판도 결국 40~50대 한국 남자들, 즉 자신들이 어떻게 삶을 살아가야 할지에 대한 심리학적 고민에서 나온 것이다.

김정운 “한국 남자들이 나이가 들수록 우울해지고 슬퍼지는 건 자기 이야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명함이 날아가는 순간 인생이 끝나는 거죠. 지금부터라도 나만의 이야기를 만들어야 합니다. 최소한 나를 대표할 만한 물건 하나라도 가져야 하죠. 남과 경쟁하지 않고 사회에 해악을 끼치지 않는 나만의 물건과 나만의 이야기는 그 자신뿐 아니라 우리 사회도 성숙하게 만들죠. 개인적으로 전 만년필을 모읍니다.”

허태균 “저는 모자를 모아요. 유학할 때 머리를 길러 묶은 적이 있어요. 머리가 너저분하게 느껴질 때 모자를 썼거든요. 그러고는 모자를 하나둘 사기 시작했죠. 보수적인 집안에서 태어난 저는 스스로 억압하며 사는 스타일이에요. 머리를 기른 것도 엄청난 모험이었죠. 이런 제게 모자는 유일하게 자유를 주죠. 요즘에 머리를 다시 길러볼까 하는 ‘발칙한’ 생각도 합니다. 하하.”
또 두 교수는 “중년 남자가 자신의 노하우를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장을 사회가 만들어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공식적인 문화 학습의 장에서 그들이 마음껏 지식과 능력을 발휘한다면, 지금처럼 시도 때도 없이 아무 데서나 ‘가르치려 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게 된다는 것.

남자는 태어날 때부터 왕자병

왕자병 김정운 vs 수컷의 향기 허태균


대화가 자못 심각해졌다. 분위기를 돌릴 필요가 있었다. 문득 허 교수의 저서에서 소개한 ‘남자의 착각’에 대한 흥미로운 에피소드가 떠올랐다.
“대학교 2학년 때 한 친구가 같이 수업을 듣는 예쁜 여학생을 가리키며 ‘저 학생이 나한테 관심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친구는 그 여학생이 자기를 무려 13번씩이나 쳐다봤다고 했다. 나는 그렇게 예쁜 여학생이 그 친구에게 관심을 가진다는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문득 내 머릿속에 천재적인 의문이 떠올랐다. ‘여학생이 13번 쳐다본 걸 알려면, 내 친구는 그 여학생을 최소한 몇 번이나 쳐다봐야 했을까.’(‘가끔은 제정신’)
두 교수에게 남자는 태어나면서부터 ‘왕자병’을 가지고 있고,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자신이 여전히 이성에게 어필한다고 생각한다는데, 그게 사실인지 물었다. 두 사람 모두 “당연하다. 나 역시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허태균 “이 착각은 절대로 깨지면 안 됩니다. 하하. 그러는 순간 남자는 자신감을 잃고 무기력해지며 열등감에 빠지게 되죠. 이는 한 개인뿐 아니라 사회 전체를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하지만 다행인 건 이 착각은 수컷의 본능상 쉽사리 깨지지 않는다는 점이지요.”

김정운 “저 역시 젊은 여인과 이야기를 나눌 때 그 여인을 항상 여자로 바라보죠. 그러다가 문득 그 여인이 저를 ‘선생님’으로만 본다는 걸 깨달을 때 마음이 서늘해지죠. 젊음이 부럽진 않지만, 늙어가는 건 슬프지요.”
한 걸음 더 나아가 “잘생기고 키도 크며 몸매도 좋은 20대 아이돌 가수나 배우를 보면 부럽다는 생각이 들지 않냐”고 물었다. 두 교수 모두 손사래를 치며 “청춘은 아름답지만, 그들이 부럽지는 않다”고 강조했다.

허태균 “부러움은 그 대상을 가질 수 있을 때 생기는 것이에요. 어린아이들이 막 뛰어다니는 모습은 전혀 부럽지 않아요. 근육을 키우고 주름을 없애는 등 그들과 같아지고자 하는 방식으로 젊은이와 경쟁하면 오히려 우리가 불행해지죠.”

김정운 “내가 요즘 하도 잘나가니까 부러운 대상은 없지. 하하. 어린아이보다는 차범근, 안성기처럼 그만의 느낌과 향기를 가진 사람에게 질투가 나요. 자기 세계에 품위가 있고 격이 있는 이들을 보면, 저렇게 늙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요.”
특히 김 교수는 “젊은이처럼 꾸밀 필요는 없지만, 굳이 중년 남자들이 전형적인 ‘아저씨’처럼 보이지 않게 외모를 가꿀 필요는 있다”고 강조했다.
“제 인생은 파마하기 전과 후로 나뉘어요. 파마 전엔 머리가 빠지는 것을 고민했지만, 지금은 자연스러운 볼륨감에 만족하죠. 또 배 위로 올라오는 아저씨 바지나 지나치게 큰 옷도 입지 않아요. 그랬더니 나이보다 젊어 보이는 건 물론, 삶이 풍요롭고 즐거워졌어요.”
마지막으로 사족 둘. 인터뷰 후 ‘결혼을 후회한다’던 김 교수의 아내를 만났다. 저서에서 ‘팔뚝 굵다’고 김 교수의 ‘구박’을 당한 아내는 무척 미인이었다. “남편이 부부간 사생활을 여기저기 이야기하고 다니는 게 불편하지 않냐”고 물었더니 그는 “덕분에 돈 많이 벌어 좋다”며 호탕하게 웃었다. 과연 그 남편에 그 아내다.
‘수컷의 향기’란 별명처럼 남성미가 폴폴 넘치는 허 교수는 로맨티시스트라고 한다. 젊은 시절 그는 당시 애인인 아내에게 의미 있는 날을 골라 장미꽃을 선물했다. 만난 지 1백 일째 1백 송이, 스물한 살이 되던 날 21송이, 스무 살의 마지막 날 20송이, 2백 번째 만나던 날 2백 송이, 그 밖에 몇 송이를 더 선물해 1년 동안 총 3백65송이를 선물했다. 이 같은 적극적인 사랑의 표현을 지금도 꾸준히 하고 있다고 한다.

여성동아 2012년 4월 58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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