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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leb 아빠의 자격

낭만파 아빠 고형욱 & 시니컬한 아들 고창빈 티격태격 42일간 유럽 여행

글·구희언 기자 사진·지호영 기자

입력 2011.09.29 13:56:00

‘나를 똑 닮은 아들과 함께 긴 여행을 갔다 오는 것’을 아빠의 자격으로 꼽은 이가 있다. 그래서 떠났다. 말썽꾸러기 사춘기 아들과 단둘이. 태어나서 유일하게 잘한 일이 ‘아들과의 여행’이라 말하는 고형욱씨와 아들 창빈이에게 들은 유럽에서의 1천 시간.
3주간 무단결석 vs 단둘이 유럽 여행

낭만파 아빠 고형욱 & 시니컬한 아들 고창빈 티격태격 42일간 유럽 여행


“그분이 휴대전화가 없어서 (일정 잡는 데) 시간이 좀 걸릴 거예요.”
스마트폰 사용자 1천만 시대에 이게 무슨 소리인가. 처음 고씨 부자를 만나려고 연락한 출판사에서 들은 대답이었다. 인터뷰 당일에도 아들의 휴대전화로 겨우 연락해 중간 지점에서 아빠 고형욱씨(45)와 아들 고창빈군(16)을 만날 수 있었다. 고형욱씨에게 휴대전화가 없으면 불편하지 않느냐고 묻자 “나는 편하고 다른 사람들이 불편하지”라며 껄껄 웃었다.
아빠 “지난해 5월 휴대전화를 없앴어요. 운전면허도 없고, 인생을 살면서 증서란 증서는 하나도 없죠. TV도 안 봐서 ‘남자의 자격’이 뭔지 몰랐어요. 책 제목이요? 출판사에서 정해줬어요. 다큐멘터리도 어느 정도 가공되듯 책도 그러게 마련인데, 최대한 가공하지 않은 진짜 부자간의 이야기를 쓰고 싶었어요. 일반 책에 나오는 아이들은 너무 똑똑해요. ‘넌 어떻게 생각하니’ 물으면 ‘난 이렇게 생각해요’ 하고 똑 부러지게 대답하죠. 와우, 브라보. 그런데 아이들은 각자 다 달라요. 솔직하고 무덤덤한 아이라고 해서 고민이 없는 건 아니잖아요.”
이런 아빠가 또 있을까. 아들이 3주간 무단결석으로 처리된다는데도 수업보다는 여행을 택했다. 조금은 괴짜 같은 이 아빠는 “개학하면 ‘혹성탈출’ 리메이크 버전을 조퇴시켜서라도 보여줄까 생각 중”이라며 유쾌하게 웃었다.
아빠 “그런 걸 통해서 뭔가를 느낄 수 있다면 수업 이상의 가치가 있죠. 처음 유럽 여행을 준비할 때는 현장학습 확인서를 내면 출석이 처리되는 줄 알고 별 걱정 안 했는데 3주간 무단결석 처리된다는 거예요. 결심하기까지는 어려웠지만, 그냥 갔어요.”
아들 “그땐 중학생이었고 외고 갈 것도 아니었으니까….”
두 남자, 쿨하다. 이런 쿨함이 여행을 성공리에 마칠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을지도 모른다. 고씨 부자는 지난해 8월부터 9월까지 42일간 서유럽 다섯 국가를 유랑했다. 여행이라기보다는 기행. 수많은 국가 중 ‘유럽’을 고른 건 아빠의 생각이었다.
아빠 “과거 영국에서는 상류층 아이들이 교양 교육으로 ‘그랜드 투어’를 많이 했거든요. 대륙에 가서 옛것을 보는 여행 말이죠. 아들에게 아주 고루하고 낡은 19세기 개념의 ‘그랜드 투어’를 시켜주고 싶었어요. 대학 가면 유럽 여행이야 할 테니, 이번에는 제대로 된 여행이 뭔지 보여주고 싶었죠.”
아들 “처음에는 농담인 줄 알고 얼떨결에 간다고 했어요. 친구들에게 아빠와 단둘이 여행을 떠난다고 했더니 ‘아빠와 싸워서 반 시체가 돼 돌아오지 마라’고 농담처럼 이야기하더라고요.”

화난 아빠 vs 무심한 아들
‘모든 부모의 마음은 똑같다. 여행을 갔다 오면 아이가 뭔가 바뀌겠지 하는. 하지만 그건 영화와 소설 속 이야기일 뿐이다.’
영화계에 몸담았던 아빠의 이야기라서 더 의미심장하게 들린다. 강우석 사단에서 영화기획 일을 한 그는 현재 영화·음식·와인평론가로 일하고 있다. 글을 쓰고 라디오에서 영화 음악 코너도 진행한다. 앞으로도 아들과 함께 펴낼 몇 권의 책을 구상 중이며, ‘서울의 전통 음식’에 관한 다큐멘터리도 찍고 있다. 그는 “드라마나 영화는 허구의 세계”라며 말을 이었다.

낭만파 아빠 고형욱 & 시니컬한 아들 고창빈 티격태격 42일간 유럽 여행




아빠 “한국 사람은 드라마를 너무 믿어요. 그건 ‘저스트 쇼’예요. 드라마나 만화, 영화는 허구의 세계예요. 그러나 여행 갔다 와서 책을 허구로 썼다면 오히려 평생 짐이 됐을 거예요. 제가 자유로운 건 책에서 뻥을 안 쳤기 때문이죠. 소설이 아니라 진짜 있었던 사실을 적었거든요. 제 감정을 솔직하게 썼죠. 여행 떠나기 전에는 ‘참을 인(忍)’이면 되겠지 생각했는데, 여행이 현실이 되는 순간 아빠가 아닌 한 명의 ‘화난 인간’이 될 수 있다는 걸 알았어요. 부들부들 떨리면서.”
그의 말처럼 이들의 여정이 마냥 즐겁거나 순탄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프랑스 니스에서는 아들이 실종돼 발을 동동 굴렀다. 아빠는 아들이 타국에서 길을 잃었을까, 혹시 납치된 건 아닐까 불안해하며 땡볕에 해안가를 뒤지고 다녔다. 땀으로 흠뻑 젖은 채 숙소로 돌아온 아빠의 눈에 아들이 들어왔다. 아들은 숙소 로비 계단에 쪼그리고 앉아 홀로 게임을 하고 있었다.
아빠 “가슴이 움푹 패도록 ‘참을 인’을 새긴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에요. 아들 덕에 인내심 키우는 연습을 한 셈이죠. 스페인의 나사리에스 궁전에서 벽에 정교하게 새겨진 장식을 보여주며 ‘이 장식들 전부 사람 손으로 만든 거야’라고 설명해줬죠. 아들이 그걸 멍하니 바라보다 하는 소리가 ‘…개 삽질했네?’였어요. 오, 맙소사. 기가 막혔죠. 손이 올라가려는 걸 꾹 참았다니까요.”
아들 “그날 너무 더웠어요. 멋지긴 한데 지치고 귀찮기도 했고.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말한 거였는데 아빠 표정이 굳는 걸 보고 ‘아차’ 싶더라고요. 나중에 아빠랑 하이파이브하고 화해했어요.”
아빠 “이왕 다니는 거 기분 좋게 다니는 게 좋잖아요.”
그럼에도, 변화는 있었다. 여행에서 돌아온 아들은 고등학교 1학년 첫 시험에서 전교 2등을 했다. 아빠가 자랑스럽게 이야기하자 “그때뿐이었다”라며 쑥스러워하는 아들.
아들 “수준별 수업 진단평가에서 국어랑 수학, 영어 세 과목을 봤는데 그렇게 나왔어요. 대학교에서는 심리학과나 국문학과를 전공하고 싶어요. 또래 아이들 상담도 많이 해주는 편이고, 눈치가 빠르다고 해야 하나, 약삭빠르다고 해야 하나. (친구들 심리를) 찔러보면 다 맞는 게 재밌어요. 작가나 교사가 되고 싶어요.”
아빠와 아들은 유럽에서 노트북으로 꾸준히 일기를 썼다. 그렇게 쓴 일기를 모은 것이 ‘아빠의 자격’이다. 같은 공간에서 같은 경험을 하고도 서로의 단상이 다른 점이 ‘냉정과 열정 사이’라는 책을 떠올리게 한다. 아빠의 글과 교차하는 아들의 일기는 읽는 재미를 더한다. 책에 실린 사진 대부분은 아들이 찍었다. 그 밖에도 아들이 어렸을 적 아빠가 유럽에서 찍은 사진도 실렸다.
아들 “아빠가 오르세 미술관 가는 길에 사진을 찍어주셨거든요. 10년도 더 전의 일인데 아빠는 사진 찍었던 자리를 어떻게 기억하는지 모르겠어요. 어릴 적 루브르 박물관에도 갔었더라고요. 기억은 안 나지만 증거가 남아 있어요. 아빠가 내미는 사진이죠. 지금도 신기해요. 어딜 갔는지, 어디에서 사진 찍었는지 어떻게 다 기억하나 싶고.”
아빠 “암기력에 관해서는 자신 있어요. 어릴 때 별명이 ‘박사’였거든요. 루브르 박물관 ‘승리의 여신’ 조각상 앞에서 사진을 찍어줬죠. 어릴 적에 니케상을 보더니 ‘와, 팅커벨이다!’ 하고 소리를 지르더라고요. 걸음마 시작하면서부터 저랑 여행했는데, 창빈이 기억엔 없지만 꽤 많은 사진이 남아 있어요.”
유럽 여행에서 “투우랑 축구가 인상적이었다”며 “축구장은 처음이었다”는 아들의 말에 아빠는 “2002년에 상암동 축구장에 같이 갔는데 기억 못해? 오, 이런”이라며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유럽 민박집에서 “라면 두 개도 못 끓이느냐”는 주인의 핀잔에 “외동이라서 한 개밖에 끓여본 적 없다”고 태연하게 말하던 아들. 여행에서 아들에게 힘이 된 것은 아이스크림이었다.

낭만파 아빠 고형욱 & 시니컬한 아들 고창빈 티격태격 42일간 유럽 여행

아빠와 유럽을 누비며 아들의 궁금증은 커져만 간다. ‘아빠는 어떻게 10년도 더 전에 사진 찍은 장소를 기억하고 있는 걸까?’ 프랑스 파리 오르세 미술관 가는 길(왼쪽). 프랑스 파리 루브르 박물관 내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앞에서(오른쪽).



낭만파 아빠 고형욱 & 시니컬한 아들 고창빈 티격태격 42일간 유럽 여행


아빠 “‘젤라토 사줄까?’하고 물으면 힘들어 하다가도 얼굴에 바로 화색이 돌아요. 유럽 여행의 목적이 젤라토가 아닌가 싶을 정도였죠. 어릴 적 갔던 유럽에서도 그랬어요. 아이스크림 사준다면 울던 것도 그치고 다리가 아파도 걷던 아이였죠. 젤라토 먹을 때만 여행의 피로를 완전히 잊는 것 같다니까요.”

아빠가 얻은 것 vs 아들이 깨달은 것

독어독문학과 출신인 아빠는 ‘방랑벽’ 수준으로 여행을 좋아한다. 유럽에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백 번 넘게 발도장을 찍었다고. “역마살이 있는 것 같다”는 말에 그는 “역마살 그 자체죠”라며 웃었다. 어릴 때는 “청소도 해주고 안락하기까지 한 호텔에서 사는 것”이 꿈이었다는 그는 아들과의 여행을 통해 “내가 전혀 인자한 아빠가 아니라는 것”과 “참을성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들에게 아빠의 점수를 매겨달라고 하자 “개빵점”이라고 무심하게 말한다. 옆에서 “야~ 너 7~8점도 안 주고. 이 배신감!”이라며 울상 짓는 아빠.
아들 “아빠가 일 때문에 너무 바빠서 자주 못 봤으니까요. 항상 일만 하셨어요. 대화가 없었던 탓도 있고 어긋나는 일도 많았고요. 여행을 통해 ‘아빠도 사람이구나’라는 걸 깨달았어요. 아빠가 아들과 친해지기 싫은 게 아니라는 것, 다만 방법을 잘 모른다는 것. 그런 걸 알게 돼서 좋았어요. 초등학교 때보다 훨씬 친해졌어요. 꼭 삼촌 같아요.”
아빠 “앞으로 삼촌이라고 해라.”
아들 “우리 책 받은 선생님도 안 닮았다고 아빠 아닌 것 같대.”
아빠 “아빠가 의무감이 없게 생겨서 그런가(웃음).”
여행에서 아빠가 얻은 것은 ‘아들’이었다.
아빠 “그동안 남과 같은 관계였어요. 서먹서먹했죠. 몇 년의 시간을 타임머신을 타고 날아간 기분이에요. 잘못했으면 사춘기이던 중학교 3학년 때 영원히 남이 될 수도 있었는데 다시 우리 아들이 됐어요(웃음).”
모든 여행은 끝난다더니 그들의 유럽 여행에도 끝이 왔다. 여행은 끝났지만, 고씨 부자는 또 다른 여행을 구상 중이다. 바로 스쿠터 일주. 아들은 여행 핑계로 스쿠터를 장만하고픈 속내를 내비쳤다. 아빠는 이탈리아 해안가를 따라 달려보고 싶다고 했다.
아빠 “이번 여행에서 아들이 니스 해안을 따라 이동하는 동안 완벽하게 주무셔주는데(웃음). 남들이 갔던 곳은 문화적으로 다 봤으니까 이번에는 둘이 스쿠터 타고 해안길 따라 돌고 싶어요. 7번 국도로 해서 2번 국도로 돌듯이 이탈리아도 그렇게 여행할 수 있거든요. 한 달 치 배낭 하나 짊어지고 떠나는 거죠.”
아들 “여행을 하면서 책에서만 보던 것을 직접 경험한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 알았어요.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행복 중 하나 같아요.”
아빠 “가르치는 것보다 직접 느끼는 게 중요하죠. 모든 걸 몸으로 때우는 게 여행이에요. 돈은 대안이 될 수 있지만, 얼마만큼 시간을 내느냐도 중요하죠. 여행을 하며 처음 며칠간은 ‘아빠가 언제까지 버티나 보자’라는 느낌이 드는 상황도 있었어요. 그런 시간이 지나야 ‘어쩔 수 없는 여행이구나’ 하고 여행을 즐기는 시간이 시작되죠. 아들이 대학에 가면 아빠랑 여행을 가주겠어요? 친구들과 놀러 가면 훨씬 재밌을 텐데 아빠한테 시간을 투자해주겠냐고요. 아들이 대학 가기 전에, 여름 한 시즌 정도 투자할 수만 있다면 떠날 거예요. 그게 결국 인생에 남는 거 아닐까요.”
그의 말처럼 성적과 학원은 더 강력한 핑계가 될 것이고, 다 자란 아들은 아빠와 아무런 경험도 추억도 공유하지 못한 채 영영 제 갈 길로 가버릴 것이다. 서먹서먹하고 불편한 채로 아들은 청년이 되고, 아빠는 늙어갈 것이다. 아직 늦지 않았다. 1박2일 아니면 당일치기라도 좋다. 아들의 손을 붙잡고 둘만의 여행을 떠나보는 것은 어떨까. 오지 않을 내일이 아닌 ‘지금 이 순간’ 말이다.


참고도서·아빠의 자격-고씨 부자의 유럽 42일 생존기(사월의책)

여성동아 2011년 10월 57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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