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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코넬대 출신 재즈 피아니스트 남경윤 뜻밖의 고백

글 이혜민 기자 사진 지호영 기자

입력 2010.10.19 14:44:00

조기유학. 떠날 수만 있다면 엄마도, 아이도 마다할 이유가 없는 유혹이다.
하지만 중학교 때 조기유학을 떠나 코넬대를 졸업한 재즈 피아니스트 남경윤은 “절대 반대”라고 말한다.
“재즈라는 내가 찾은 자유로운 세상 안에서 최고가 되고 싶다”는 그에게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미국 코넬대 출신 재즈 피아니스트 남경윤 뜻밖의 고백


지난 1월 스위스에서 열린 다보스 세계경제포럼에서 공연하고 최근 4집 ‘트리오’를 발표한 데 이어 계명대 뮤직프로덕션과 조교수로 부임한 피아노계의 차세대 주자, 재즈 피아니스트 남경윤(31). 이사오 사사키, 유이치 와타나베, 이루마 등 걸출한 피아니스트들과 함께 같은 소속사에서 활동하고 있는 그는 일찌감치 한국을 떠난 조기유학파다. 1993년 중학교 2학년생이던 그는 어머니, 형과 함께 낯선 미국 땅을 밟자 마냥 행복했다.
“당시 성적이 안 좋으면 학교에서 하키채로 맞았거든요. 어머니께서도 제가 공부를 안 하거나 방만하면 자로 때리셨던 것 같고요. 그런데 아메리칸 드림이라고 해야 하나, 새로운 기회를 찾아 떠나게 된다니까 그냥 좋았어요. 아버지와 떨어져 산다는 게 슬프긴 했지만 대학 가기 위해 죽기 살기로 경쟁하지 않아도 된 것 같아 홀가분했죠. 반에서 10등 안에 못 들면 서울에 있는 대학에 갈 수 없다는 말에 엄청 불안해했던 것 같아요. 그 당시 유학생이라면 누구나 그렇듯 ‘7막 7장’을 읽고 제 나름의 꿈을 품고 갔어요(웃음).”
미국학교는 역시 한국학교와 달랐다. 분위기부터 자유스러웠다.
“일단 때리지 않아서 좋았죠. 미국에서 교사가 학생 때렸다가는 고소당하니까요. 그런데 제 눈에는 좀 심해 보이는 것도 있더라고요. 뉴욕 롱아일랜드에서 꽤 괜찮다는 공립학교를 갔는데도 책상에 발을 올리고 수업 듣는 아이들이 있더라고요.”
하지만 영어가 문제였다. 학교에서 진행하는 ESL을 들으며 현지인과의 영어실력 차이를 좁혀보려고 했지만 수업 내용을 도저히 따라갈 수 없었다. 강의를 녹음하고 ESL 교사나 친형에게 도움을 청했는데도 정작 수업시간에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못 알아들었다고 하자니 창피했고 그렇다고 알아들었다는 거짓말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때부터 아예 입을 닫아버렸다. 그는 미국에서의 첫 수업시간을 잊지 못한다고 했다.
“우리나라 여학생들과 남학생들은 서로 냉정하게 구는 편인데 미국은 친하게 지내더라고요.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파란 눈에 금발 여학생이 ‘하이’라고 인사하는데 좋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고 그랬어요. 그런데 정작 뒷말을 이을 수 없다는 판단이 서니까 대꾸를 못하겠더라고요. 완벽하게 대화하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벙어리가 낫겠다 싶었죠. 아이들이 말 못하는 저를 보고 수군대니까 그때부터는 정말 말하는 법을 모르는 사람처럼 살았어요.”

언어 장벽 넘지 못해 고립

말하기 실력이 향상되지 않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길을 묻는 사람에게 아무 말도 못하는 자신을 보곤 자존감이 더 낮아졌다. 그래서 학교 운동 클럽에라도 가입하면 친구를 사귀며 말하는 법을 배울 수 있을까 싶어 배구 클럽에 들어갔다. 운동에 자신 있다고 생각했지만 배구팀 친구들 역시 말귀를 못 알아듣는 그를 답답해했다. 영어 과외를 받고 영어 사전을 외워가며 노력했지만 영어실력은 언제나 늘 그 자리였다.
“친구들이 저한테 말하는지, 다른 사람한테 말하는지 모르겠더라고요. 게다가 당시에는 슬랭이 유행이었는데 아이들이 몇 번이나 가르쳐줘도 제가 제대로 발음하지 못하니까 놀려댔죠. 가령 “왓츠 해프닝”이 아니라 “왓츠 해프‘닌’”이라고 발음해야 하는데 미묘한 차이를 간파하는 게 쉽지 않았거든요.”

미국 코넬대 출신 재즈 피아니스트 남경윤 뜻밖의 고백


한번은 남경윤에게 크나큰 사건이 발생했다. 장난기 많은 한 학생이 농구하던 그에게 돌을 던지곤 뚫어져라 그의 반응을 지켜본 것이다. 너무나 놀란 나머지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랐던 그는 그저 자리를 떠나는 걸로 무언의 항의를 했다. 이후 점점 사람을 피하게 된 그는 점심을 ESL에서 만난 중국인 친구와 먹다 급기야 굶기로 결심했다.
“카페테리아에서 아이들과 마주치는 게 겁나서 점심시간 동안 화장실에 숨어 있다가 벨이 울리면 나온 적도 있어요. 학교 끝나고 집에 가서 밥 먹고 그랬죠. 비웃는 게 아닐 수도 있는데 아이들이 제게 보내는 시선이 부담스러웠어요.”
그가 좌절감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통로는 편지였다. 유서를 남기듯 한국에 사는 친구들에게 힘든 일을 토로하며 10장에 달하는 편지를 써내려 가면 친구들 또한 장문의 편지로 그를 위로했다. 하지만 마음이 안정되는 건 잠시뿐 또다시 괴로운 일상이 반복됐다. 남경윤의 결론은 단 한 가지, 한국으로 돌아가 다시 웃고 싶다는 것이었다. 홀로 한국에 사는 아버지는 “참아라, 그러면 더 좋은 세상이 열릴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지만 어린 그의 귀에는 아버지의 충고가 들어오지 않았다.



고1 때 접한 키보드는 내 운명

미국 코넬대 출신 재즈 피아니스트 남경윤 뜻밖의 고백


어두우면 별이 보인다고 했던가. 그런 그의 일상이 빛나기 시작했다.
“어느 날 이모 댁에 갔다가 키보드를 발견했는데 한번 쳐보면 어떨까 싶었어요. 초등학교 1학년 때 배우긴 했지만 공 차는 게 좋아서 그 이후로는 만져보지도 않았거든요. 대학 간 친척 누나가 더 이상 쓰지 않는다기에 집으로 가져왔고 그 뒤로는 매일같이 밤새도록 쳤어요. 그 소리가 좋고 연주하는 기분이 좋더라고요. 제대로 악보를 볼 줄 모르니까 어디선가 들었던 음을 떠올리면서 그냥 쳤죠. 그러곤 어머니께 더 큰 피아노를 사달라고 했는데, 캐논을 연주하면 사준다기에 연습에 연습을 거듭해 그 곡을 연주하곤 66키 피아노를 선물받았어요. 이모 두 분이 성악을 전공해 그런지 어머니는 음악에 관대한 편이었는데 제 표정이 밝아지니까 그것만으로도 좋아하셨던 것 같아요. 그래서 그때부터는 CD 들으면서 피아노를 독학하기 시작했어요.”
그는 잠을 포기하곤 밤새 이어폰을 낀 채 연습에 매진했다. 급기야 레슨을 받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베토벤의 ‘월광’을 연주해보라는 또 한 차례 오디션을 통과해 어머니의 지원을 얻어냈다. 그러곤 점차 합창단, 밴드, 뮤지컬 클럽 등 다양한 음악 특별활동에 참여하면서 전처럼 웃음이 많아졌다.
“어느 날 합창단에서 반주하고 있는데 친구들이 와서는 제 안부를 묻더라고요. 대화하기에는 내 영어가 부족하다고 하니 걱정 말라고, 우리가 가르쳐주면 된다고 그러는 거예요. 기분이 묘하더라고요. 돌이켜보면 그때 그 친구들 덕분에 영어 발음이 많이 좋아진 것 같아요. 이후 한 번도 초대받지 못하던 핼러윈 파티에 가서 실력을 뽐낼 기회가 있었는데 친구들 반응이 좋아 정말 행복했죠. 음악 하는 것만으로도 좋은데, 그런 저를 친구들이 인정해주니까 피아노가 더 좋아지더라고요.”
노래 실력 또한 뛰어나 학교 대표로 선발돼 뉴욕주 합창단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남경윤은 “살다 보니 형보다 좋은 결과를 얻은 순간도 오더라”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미국 코넬대 출신 재즈 피아니스트 남경윤 뜻밖의 고백


“형은 어려서부터 부모님 말씀도 잘 듣고 공부도 잘하는 모범생이었어요. 유학 간 지 얼마 안 돼 ‘뉴욕타임스’에서 실시하는 글쓰기 콘테스트에서 상을 받을 정도로 글도 잘 썼죠. 노래를 잘해서 성악가가 꿈이었는데 열정이 정말 대단한 사람이라 밤새워가며 연습하더라고요. 그런 형을 보며 저는 늘 형만큼만 하면 좋겠다 싶었죠. 그런데 형이 아닌 제가 학교 대표로 선발되니 다들 놀랄 수밖에요. 그 전까지 제가 형보다 잘하는 건, 글쎄요… 안타깝게도 하나도 없었던 것 같은데요(웃음).”
형에 대한 경쟁심은 그를 성장시킨 동력으로 작용했다. 형에게 자극받아 특별활동은 물론 성적관리를 꾸준히 한 결과 그는 코넬대 전자공학과에 입학하게 된다. 당시 음악을 좋아하기는 했지만 부모의 기대를 저버릴 만큼 음악에 대해 확신이 서지 않았던 그는 한국에서 굴지의 전자업체를 이끄는 아버지의 뒤를 잇기 위해 전자공학을 공부하기로 했다. 수학을 응용하는 학문을 공부하면 좋겠다 싶어서였다.
하지만 대학 입학 후 그는 음악인으로서의 삶을 준비하게 된다. 음악을 좋아하는 학생들만을 위한 기숙사에 살면서 매주 기숙사에서 열리는 콘서트를 보고 자극받아 다시금 음악을 시작한 것이다. 게다가 학교에는 24시간 이용 가능한 방음 피아노실이 있었기 때문에 피아니스트를 꿈꾸는 그에게는 최적의 환경이었다. 그렇게 밤낮없이 피아노를 치던 그가 재즈를 접한 건 대학 2학년 때다.
“한번은 기계공학을 전공하는 중국계 유학생의 공연을 보러 간 적이 있는데 피아노로 재즈를 연주하는 모습이 정말 멋지더라고요. 연주할 때마다 멜로디와 박자를 바꿔가며 다양한 장르를 혼합할 수 있는 자유로운 음악이었어요. 그런 음악이 있다는 걸 알고 그때부터는 재즈만 배우고 싶더라고요. 마침 우리 학교에 재즈 관련 학과가 있어서 바로 전과해버렸죠. 재즈 배울 생각에 잠을 설치던 시절이었어요(웃음).”
부모를 설득하기란 쉽지 않았다. 몇 달 동안 연락을 끊은 채 “나는 음악 없이는 숨 쉴 수 없다”는 걸 수차례나 말했지만 부모의 반응은 늘 싸늘했다. 그럼에도 그는 연습에 연습을 거듭해 두 팔이 관절염으로 마비되기에 이르렀고, 대학 3학년 때는 재즈를 연주한 뒤 기립박수까지 받는 실력을 갖추게 됐다. 대학 졸업만 하라던 부모도 졸업식 날 그의 연주를 듣곤 “음악이 네 인생인 것 같다”며 뒤늦게나마 응원해줬다. 물론 단서가 있었다. 이왕 할 거라면 최고가 되라는 것이었다.
이후 그는 미시간대에서 재즈 피아노로 석사를 받으며 디트로이트의 재즈 문화에 흠뻑 빠져들었다. 2004년 한 해 동안 진행한 공연이 3백회에 달했을 정도다. 이듬해에는 역사적인 국제 재즈 페스티벌 무대에 선 뒤 세계에서 가장 큰 재즈 무대인 뉴욕에 정착하고, 맨해튼 음대에서 석사과정을 밟으며 현지에서 데뷔 음반을 발표하기도 했다.

사랑을 이루기 위해 한국에 정착하다
그랬던 그가 한국 정착을 시도한다. 바로 사랑 때문이다. 한국에서 재즈 페스티벌을 준비하던 중 만난 2년 연상 재즈 드러머를 놓치고 싶지 않던 그는 마침 대학의 초빙 공고를 본 뒤 편도 티켓을 끊었고 목원대학교에서 전임강사 생활을 시작했다. 돈 없이 홀로 독일로 건너가 음악을 공부할 정도로 생활력이 강한 그녀는 그의 배필, 현재는 예쁜 딸의 엄마다. 예쁜 가정을 이룬 데서 더 나아가 젊은 나이에 후학을 양성할 뿐 아니라 음반·연주 활동을 거듭하며 활동범위를 넓혀가는 그는 본인의 유학시절을 어떻게 평가할까.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갔으니 문화적인 어려움을 극복하기까지 너무 괴로웠어요. 저는 다행히 재능 있는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 제 길을 찾았지만 만약 그 길을 찾지 못했더라면 아마도 지금까지 괴롭게 살고 있을 거예요. 저는 겨우 제 갈 길을 걸어 이 자리에 있는데도 가끔씩 마음이 아플 때가 있어요. 그간의 눈물이 저를 성숙하게 만들긴 했죠. 유학 가면 기회가 많은 건 사실이겠지만 일찌감치 유학 보내는 거, 전 반대해요.”

여성동아 2010년 10월 56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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