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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 무명 설움 딛고 코믹 연기로 사랑받는 김광규

글·정혜연 기자 / 사진·조영철 기자

입력 2008.11.18 11:47:00

얼마 전 종영한 MBC 시트콤 ‘크크섬의 비밀’에서 무능하고 허풍 심한 만년과장 역을 맡아 웃음을 선사했던 김광규. 그의 웃음 뒤에는 하루 벌이를 걱정하던 택시기사, 주목받지 못하던 무명배우의 눈물이 서려 있다. 그의 남다른 인생 스토리와 꿈.
가난, 무명 설움 딛고 코믹 연기로 사랑받는 김광규

드라마 ‘환상의 커플’의 공실장, 얼마 전 종영한 시트콤 ‘크크섬의 비밀’의 김과장. 본명보다 드라마 속 캐릭터로 더 유명한 그는 올해로 데뷔 11년째를 맞는 김광규(41)다. 지난 10월 초 시트콤 종영 이후 만난 그는 “그동안 인적 드문 섬에 갇혀 지냈다”며 고생담을 털어놓았다.
“여름 내내 이름 모를 벌레, 무더위와 싸우며 촬영하느라 힘들었어요. 그래도 TV에서 매회 제 모습을 볼 수 있어 즐거웠죠.”
사실 ‘크크섬의 비밀’은 그에게 무척 의미 있는 작품이다. 데뷔 11년 만에 처음 주연을 맡은 작품인데다가 극중 본명으로 출연, 자신의 이름 석 자를 알릴 수 있는 기회가 됐기 때문. 기대보다 시청률이 낮게 나오고 본명보다 김과장이라는 애칭으로 더 유명해졌지만 그는 이번 시트콤을 통해 자신의 끼를 입증해 보였다. 그는 파란색 운동복을 입고 몸 개그를 불사하는가 하면 무반주로 멋지게 탱고를 추고, 염소와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는 등 매회 색다른 연기를 선보인 것.
“그런 모습을 보이기 위해 십여 년간 준비를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단역만 도맡던 시절 살사동호회에 나가 춤을 배웠고 매일같이 빈 방에 홀로 앉아 연기 연습을 했기 때문에 색다른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던 거죠.”

한 번 사는 인생 하고 싶은 일 하며 살자는 생각에 늦깎이로 연기 도전
배우로 인정받기까지 그는 파란만장한 젊은 날을 거쳤다. 학창시절 육성회비를 내지 못할 정도로 집안 사정이 어려워 장학금을 받으며 공부했고, 고등학교 졸업 후 직업군인으로 복무하다가 제대한 후 고향 부산에서 7년 동안 택시 운전을 했다. 가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선택한 직업이었는데 적성에는 맞지 않았다고.
가난, 무명 설움 딛고 코믹 연기로 사랑받는 김광규

“제가 엄청난 ‘길치’예요. 부산에서도 바닷가 쪽에 살았는데 그 일대를 벗어나 시내로 가는 손님을 태운 날에는 영업을 망친 거나 다름없었죠. 택시를 회사에 반납하고 집에 들어가야 하는데 계속 헤매다 하루를 꼬박 넘긴 적도 있어요(웃음). 남들이 하루 5만원씩 벌 때 전 절반도 못 버는 날이 많았죠.”
당시 그의 꿈은 ‘개인택시를 운전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적성에 맞지 않는 택시 운전기사로 평생 살아야 하나’라는 회의가 들었고 결국 “한 번 사는 인생 하고 싶은 것 실컷 해보자”는 마음으로 연극배우에 도전했다.
“군대에서 연극을 보며 무대 위에서 연기하는 배우의 모습이 참 멋지다는 생각을 했어요. 저런 용기가 있으면 세상 어떤 일을 해도 성공하겠다 싶었죠.”
어려운 형편에도 아들이 대학에 진학하길 바라던 그의 부모는 서른이 넘어 연기공부를 하기 위해 대학에 진학하겠다는 아들을 진심으로 응원해줬다고 한다. 하지만 주변 친구들은 그의 선택을 비난했다고.
“다들 ‘미친놈’이라고 했어요. 남들은 가정을 꾸릴 나이에 연기를 배우러 대학에 간다고 했으니까요. 많이 속상하긴 했지만 오랜 생각 끝에 내린 결정인데다 모든 걸 버리고 시작한 일이었기 때문에 보란 듯이 성공하리라는 다짐을 했죠.”

가난, 무명 설움 딛고 코믹 연기로 사랑받는 김광규

결국 그는 97년 부산예술대학에 입학했다. 개강 첫날 양복을 입고 교실에 들어선 그는 교수로 오해받기도 했지만 누구보다 열심히 대학생활에 임했다고 한다.
“영화·연극 이론, 작품 제작, 대본 리딩 등 모든 게 새롭고 재미있었어요. 같은 학번 중 유일한 아저씨였기 때문에 다른 클래스에서 수업 듣던 친구들까지 죄다 자기 작품에 출연해달라고 해 1년 새 꽤 유명인사가 됐죠. 그때 많은 작품에 출연하면서 연기가 늘었어요.”
그는 당시 대학에서 강의를 하던 곽경택 감독을 만나면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았다. 졸업 후 진로를 고민하던 그에게 곽 감독은 “큰물에서 놀라”고 조언했다.
“곽 감독님이 서울 대학로에 가서 소극장 무대에서부터 시작하라며 송강호씨가 속한 극단을 소개해줬어요. 그 길로 곧장 찾아갔는데 나이가 많아 함께하기 어렵겠다는 얘기를 듣고 돌아섰죠. 거기다 방송사 공채 탤런트 시험도 나이제한에 걸려 응시할 수 없었어요. 세상이 다 끝난 것만 같았죠.”
고시원에 거처를 마련한 그는 그때부터 단역, 조연 가리지 않고 출연했다고 한다. 그의 프로필을 보면 출연한 영화만 19편, 드라마는 10편에 이른다. 하지만 그가 출연한 사실을 기억해내는 것도 어려울 만큼 잠깐 스친 단역이 대부분이었다.
“어느 날 지하철을 타고 가는데 어떤 분이 졸고있는 절 깨워 ‘배우가 아니냐’고 묻더라고요. 맞다고 했더니 팬이라면서 사인을 해달라고 하더라고요. 기분이 묘했어요. 너무 힘들어서 그만둘까 하는 생각을 하루에도 수십 번씩 하던 참이었는데 알아봐주는 사람을 만나니 용기가 생기더군요.”
그러던 와중에 기회가 찾아왔다. 드라마 ‘환상의 커플’에서 빌리(김성민)를 돕는 공실장 역을 맡은 것. 그는 이 작품에서 독특한 어투로 수많은 유행어를 낳으며 비로소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대본에 충실했을 뿐인데 대박이 났어요. 평소 전 제 이름을 발음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싫어했는데 그 드라마 이후 생각이 달라졌죠. 드라마 종영 후 ‘김광규’라고 똑똑히 불러주는 사람들이 있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기분 좋았어요.”
오랜 기간 무명 설움을 겪었던 그는 아이러니하게도 코믹 연기를 잘한다는 평을 받고 있다. 어려움을 딛고 웃는 연기를 하는 것이 어렵지 않냐고 묻자 그는 “힘들기 때문에 웃으려고 연기한다”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떤 사람이든 힘들고 어려운 때가 있는데 전 그럴 때마다 우울한 감정을 털어내기 위해 연기에 몰입해요. 현실의 저를 잊고 철저히 극 속에 빠지는 거죠. 밝은 역할을 하면서 웃다 보면 언제 우울했는지 까맣게 잊을 정도로 기분 좋아지거든요.”

아들이 출연한 작품 빠짐없이 챙겨보는 어머니 위해 더 열심히 연기할 생각
어려운 형편에도 그를 반듯하게 키우기 위해 노력한 그의 어머니는 요즘 아들의 모습을 보며 무척 흐뭇해한다고.
“철없을 때는 부모님과 많이 다퉜죠. 책도 안 사주면서 공부하라는 얘기는 왜 하냐며 대들기도 했거든요. 어머니는 항상 대학은 나와야 한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런데 신기하게도 정말 어머니 말씀대로 대학을 가게 됐죠. 어머니는 제가 대학에 들어가서 공부한다는 것 자체를 굉장히 좋아하셨어요.”
각종 영화와 드라마에서 단역으로 출연할 때도 어머니는 그가 출연한 작품을 꼬박꼬박 챙겨 봤다고 한다.
“‘패션 70s’에 형사로 출연했는데 주인공이 감옥에서 출소하면서 배역이 없어지고, 또 어떤 드라마에서는 선생님으로 출연하다가 주인공이 졸업하면서 사라졌어요. 어느 날 어머니께서 전화하셔서는 식사는 잘하고 다니는지, 아픈 데는 없는지 묻고 난 뒤 ‘그런데, 너 왜 이제 안 나오니’ 하며 안타까워하더라고요. 안보는 척하면서 다 챙겨보고 계신다는 걸 그때서야 알게 된 거죠.”
이번 시트콤에서 첫 회부터 마지막 회까지 극을 이끌며 웃음을 주는 역할을 맡았던 그는 “이번에 그동안의 불효를 만회한 것 같다”며 기뻐했다. 아직 싱글인 그는 결혼을 해서 어머니의 걱정을 덜어드리고 싶은데 뜻대로 되지 않아 안타깝다고.
“시기를 놓치고 보니 ‘내게도 기회가 올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그냥 마음을 비우고 있으면 좋은 사람이 나타날 거라 믿어요.”
그의 인터넷 미니홈피에는 ‘나는 달린다. 국민배우’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그는 2004년 홈페이지를 만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 문구를 적었는데 이제 점차 그 꿈에 다가가는 듯한 느낌이 든다고 말했다.
“택시 운전기사를 그만두고 무대에 서는 걸 꿈꿨는데 그걸 이루고 나니 새로운 꿈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 떠오른 게 ‘국민배우’였죠. 안성기 선배처럼 유명하고 인기 있는 배우도 국민배우지만 제가 생각하는 국민배우는 ‘한 사람의 팬이라도 진정으로 좋아해주고, 인정해주는 배우’예요. 언젠가는 그렇게 될 거라 믿어요.”

여성동아 2008년 11월 53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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