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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leb 긍정의 힘

모든 것을 내주고도 웃을 수 있는 사람

글·우애령‘작가’

입력 2008.04.08 17:32:00

이제 몬티의 아들 둘도 다 자라 곧 대학생이 되려고 한다. 그러나 50이 넘어가는 몬티가 내게는 아직도 마네의 그림에 나오는 피리 부는 소년처럼 느껴진다. 자신이 지닌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어놓고 흔히 말하는 개인의 야망도 접었지만 나는 몬티야말로 긍정적인 힘으로 역경을 이겨내고 자신의 삶을 가꾸어낸 훌륭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고개를 약간 기울인 채 조용히 웃는 모습이 왕년의 할리우드 스타 몽고메리 클리프트와 비슷해 ‘몬티’라는 애칭으로 부르는 조카가 있다. 오래전 부모님이 세상을 떠난 후 그는 자기만 바라보는 여섯 명의 어린 누이와 마주 서게 됐다.
그는 유학해 공부를 더 하려던 의지를 꺾고 여러 가지 어려운 역경을 견뎌내면서 여섯 명의 누이를 차례로 결혼시켰다. 이제 그 누이들은 말 많고 탈 많은 이즈음 세상에서 별거니 이혼이니 하는 소동 없이 모두 다 아들 딸 낳고 잘 살고 있다.
몬티네 가족이 이사를 갈 때마다 두드러지는 특징은 비탈이 거의 45도 경사를 이루는 곳에 집을 얻는다는 점이다. 시내에 있는 회사에서 가까운 곳에 집을 얻으려니 자연히 앙코르와트에 참배하러 올라가는 사원 앞 계단처럼 가파른 곳밖엔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 같다. 그러나 누가 무어라고 해도 그는 태연하다. 예부터 군왕이나 신의 신탁을 직접 받들어 모시는 사람은 다 높은 곳에 자리 잡고 살았다는 것이다.
아무튼 하늘 가까운 곳에 사는 그의 집에 이십년 전 어느 날 꽃 같은 각시가 나타났다. 부모님 제사를 모시는 날 여섯 누이의 틈에서 긴 머리를 왼쪽으로 틀어묶고 검고 큰 눈에 호기심이 담긴 독특한 인상의 아가씨가 처음으로 등장한 것이다.
몬티는 그 아가씨와 결혼을 했다. 주례사가 끝나고 조카들이 부르는 축가가 울려퍼졌다. 그동안 무거운 장남의 짐을 한 몸에 지고 결혼도 늦게까지 미뤘던 그의 삶을 생각하며 일가친척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러나 한 번도 그가 누이들을 위해 희생했다고 주장하거나 자신의 삶이 고달프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그저 어느 날 술 한 잔을 한 다음 제사상 앞에 모인 누이들을 둘러보며 참 어머니가 많이도 낳으셨구나 하고 말한 정도가 전부다.
한때 유수한 회사에 취직했던 그는 간부들의 신임을 얻어 승승장구하며 고속 승진을 했다. 건축 관계 일을 하던 회사라 회사에서는 커다란 아파트까지 마련해줬고 집들이를 할 때 일가친척들은 이제 어려운 일이 끝나 평지에서 살게 됐다고 덕담을 하면서 모두 안도했다.
그러나 자유로운 삶을 꿈꿨던 그는 빛나는 전망을 제시하는 친척 아저씨의 유혹에 끌려 독자적으로 냉동 새우 수출입에 손을 댔다. 수입은 꽤 됐지만 무지막지하게 들어간 자본을 회수하기도 전에 엄청난 지출을 감당하지 못해 수표는 부도가 나고 몬티는 쫓기는 신세가 됐다. 아파트는 빚에 몰려 새처럼 날아가버리고, 그는 하늘로 제사를 모시러 올라가는 제왕처럼 또다시 가파른 곳에 작은 집을 얻었다.
“아무래도 내가 하늘과 가까운 곳에서 살 팔자인 것 같아요.”
그는 별로 마음 상한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정말로 놀라운 일은 그다음에 일어났다. 그는 채권자들을 피해 도망가지 않고 한자리에 불러모아 진심으로 설득을 했다. 내가 이제 쓰러지면 여러분은 돈을 한 푼도 돌려받지 못하겠지만, 나를 믿고 도와주면 아무리 적은 수익이 생겨도 빚을 갚는 데 다 쓰겠다는 그의 호소에 채권자들은 말하자면 넘어가버렸던 것이다. 설날이나 추석에 선물 대행을 해주는 작은 회사를 차리고 그가 고군분투하며 재기의 의지를 가다듬고 있을 때 아이러니컬하게도 그의 채권자들이 가장 큰 고객이 돼주었다. 그 사람들이 대내외적으로 필요한 선물을 그에게서 구입하면서 사업은 자리를 잡았고 약속한 대로 빚도 갚기 시작해 몇 해가 지난 후에는 그 엄청난 빚을 거의 다 정리할 수 있게 됐다. 미술을 전공한 몬티의 아내는 그동안 아들 둘을 키우면서 집에서 동네 아이들에게 미술을 가르쳤고, 아이들이 학교에 들어간 다음에는 밖으로 나가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그의 집에는 아내가 그린 그림이 여러 점 걸려 있다. 모딜리아니의 여인 그림처럼 조용하고 슬프고 고적해 보이는 여자의 반신상이 청록색 배경 속에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기도 하고 아이들과 나비와 산타클로스가 함께 자리를 잡고 있기도 하다.

몇 해 전에는 몬티의 아내가 땅을 밟는 감각이 공중에 뜬 것처럼 느껴지면서 자꾸 헛딛는 증상이 생겨 병원에 갔더니 뇌에 이상이 생겨 대수술이 필요하다는 통보를 받았다. 어린 아들 둘을 돌보면서 살림에 아르바이트까지 하느라고 과로가 겹친 게 원인이 됐는지도 몰랐다.
병원에 가보니 아내는 수술실에 들어가고 몬티는 수술실 밖 의자에 혼자 앉아 있었다. 당나귀를 쓰러뜨리는 것은 짐 위에 얹어놓는 마지막 지푸라기라는 말처럼 그가 마지막 의욕을 상실할까봐 걱정이 됐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나를 위로하며 이제 수술 받고 뇌가 재정비를 해 자기보다 머리가 훨씬 좋아지면 큰일이라고 농담까지 했다.

경제적 어려움과 사업 실패, 아내의 투병까지 극복한 조카
수술은 무사히 끝났지만 후유증은 심각했다. 얼굴 반쪽에 마비가 온 것이다. 입이 잘 다물어지지 않아 명료하게 이야기를 하기 어려웠고, 크고 아름다운 눈 한쪽이 잘 움직이지 않았다. 몬티의 아내는 힘겹게 오랫동안 물리치료를 다녔다.
그 사이에 아내는 말할 것도 없지만 몬티가 겪은 고초도 형언할 길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격분하거나 누군가를 비난하거나 다른 사람 탓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그가 인생의 비애와 슬픔을 내어놓을 때는 반쯤 눈을 내리감고 노래를 부를 때뿐이다.

이 산 저 산 꽃이 피니 분명한 봄이로구나.
봄은 찾아 왔건만 세상사 쓸쓸허더라.
나도 어제 청춘일러니 오날 백발 한심허구나.
내 청춘도 날 버리고 속절없이 가버렸으니
왔다갈 줄 아는 봄을 반겨한들 쓸 데 있나.

일전에 집안 행사에서 정통 국악인들의 국악 한마당을 베푼 적이 있는데 그분들이 나중에 여흥으로 그가 부르는 ‘사철가’를 듣고 폐부에 스며드는 것 같은 깊은 감동을 준다고 격찬을 해주었다.
그의 아내가 끈질긴 노력 끝에 본 모습이 거의 다 회복됐을 때 새로 이사간 집을 방문했다. 그 집도 여전히 하늘에 가까웠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이 번 집은 완전히 자기 소유가 됐다는 점이었다.
비탈진 길을 따라 올라가 들어선 방 정면에 커다란 그림이 걸려 있었다. 처음에는 샤갈의 그림인 줄 알았다. 그러나 그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여러 화가의 그림을 다 모아서 몬티의 아내가 그린 그림이었다.
몽환적인 빛깔이 아름다운 샤갈의 ‘생일’이라는 원작에 고흐의 정원 그림이 장식돼 있고 세잔이 후세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준 ‘과일 정물’이 놓여 있었다. 피카소가 그린 ‘악사들’의 기타와 벨라스케스의 ‘궁녀들’의 강아지 그림이 한쪽에 있었다. 칸딘스키가 ‘빨간 달걀 모양’의 발판을,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가 파티 준비를 해주고 쉬는 것처럼 한쪽 옆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미로의 그림이 벽걸이로 걸려 있고 이당 김은호 선생의 ‘창포’ 그림이 뜰의 한쪽을 장식하고 있었다. 창밖에서는 마네의 ‘피리 부는 소년’이 잠시 후 있을 파티의 연주를 위해 연습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환상적이고 동화 같은 그림이었다. 몬티의 생일 선물로 아내가 오랜 기간에 걸쳐 정성껏 그려 선물한 것이라고 했다.
이제 몬티의 아들 둘도 다 자라 곧 대학생이 되려고 한다. 그러나 50이 넘어가는 몬티가 내게는 아직도 마네의 그림에 나오는 피리 부는 소년처럼 느껴진다. 자신이 지닌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어놓고 흔히 말하는 개인의 야망도 접었지만 나는 몬티야말로 긍정적인 힘으로 역경을 이겨내고 자신의 삶을 가꾸어낸 훌륭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내에게 그런 아름다운 그림을 선물받은 몬티와 그의 아내는 자기들 말처럼 하늘 가까운 곳에 정원을 마련한 아주 행복한 부부가 아닐까 싶다.



우애령씨는… 1945년 서울에서 태어나 이화여고와 이화여대 독문과를 졸업했다. 1973년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 간호사 자격증을 받은 뒤 미시간주 메디컬센터 암병동에서 근무했으며, 귀국 뒤 연세대에서 사회사업 박사학위(부전공 심리학)를 받았다. 1993년 문화일보 춘계문예에 단편 ‘오스모에 관하여’가 당선돼 등단했으며, 이듬해 여성동아 장편소설 공모에서 장편 ‘갇혀 있는 뜰’로 또 한 번 당선됐다. 영화 ‘여자, 정혜’의 원작인 ‘정혜’ 등 다수의 소설과 ‘행복한 철학자’ 등 에세이를 펴냈으며, ‘결혼의 기술’ ‘행복의 심리’(공역) 등을 번역했다.

여성동아 2008년 4월 53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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