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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운찬 전 총장 인생 풀고백

“가난한 시골 소년이 서울대 총장이 되기까지…”

글·송화선 기자 / 사진·조영철 기자

입력 2007.10.24 10:28:00

지난 봄 대선 불출마를 선언하고 대학 강단으로 돌아간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 그를 만나 정치 중단 후의 생활과 두메산골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서울대 총장이 되기까지 인생 이야기를 들었다.
정운찬 전 총장 인생 풀고백

“요즘은 만나는 사람마다 제 안색을 살피며 조심스레 어떻게 지내냐고 물어요(웃음). 저 잘 지냅니다. 서울대 총장을 할 때나 대통령 후보로 거론될 때만큼 언론에 자주 나오지 않을 뿐이지, 강의하고 책 읽고 저녁 때는 지인들과 어울리며 전과 다름없이 생활하고 있어요.”
지난 9월 중순, 서울대 교정에서 만난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60)은 건강하고 편안해 보였다. 연초부터 4월까지 앓았던 지독한 ‘몸살’을 털어내고 비로소 ‘자신의 자리’인 대학 강단으로 돌아온 데 대한 만족감이 읽혔다.
정 전 총장이 말하는 ‘몸살’은 그 4개월여 동안 그를 둘러싸고 빚어졌던 대선 출마 논란. 그는 자신이 한동안 대통령을 향한 꿈을 품었음을 솔직히 인정했다.
“존경하는 어른들과 사랑하는 후배들이 ‘대통령 선거에 나가라’고 권했어요. 정치권에서도 제의가 많았고,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 ‘선생님이라면 할 수 있습니다’라며 격려해주기도 했죠. 그런 주위의 격려에 저도 대통령에 대해 구체적으로 생각해본 건 사실입니다. 평생 공부한 경제이론을 실물경제에 접목하고 싶은 욕심이 있었고, 제가 늘 생각했던 ‘제대로 된 나라, 품격 높은 나라’를 만들고 싶은 생각도 있었죠.”
특히 “이제는 내가 지금까지 받아온 혜택을 사회에 되돌려줘야 할 때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그를 고민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대선 출마 여부를 놓고 정치권과 여론의 관심을 한몸에 받았던 정 전 총장은 지난 4월 말 “많은 생각 끝에 이번 대선에 참여하지 않기로 했다”고 발표함으로써 정치 도전을 공식 포기했다. 아직까지도 정치권에서는 간간이 그의 이름이 나오지만 정 전 총장은 “대선 불출마 선언을 조금도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대선 불출마 선언 전혀 후회 없어
“정치권에 이름이 오르내리면서 제 과거사가 터무니없이 왜곡되고, 상식과 신의는 물론 작은 약속조차 지키기 어려워지는 현실이 견디기 힘들었어요. 사람과 장소에 따라 다른 말을 하는 게 정치적 융통성이 아니라 연기처럼 여겨졌죠.”
정 전 총장은 “생전 체험하지 못한 불면의 밤을 이어간 끝에 늘 학생들에게 강조한 ‘여러분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일 가운데 가장 하고 싶은 일을 선택하라’는 말을 나 자신에게도 적용하기로 했다”고 한다. 그것은 경제학자로서 학생을 가르치는, 바로 지금의 자리로 돌아오는 것이었다.
“정치가 아니어도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일은 많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상아탑에서 인재를 키우는 것, 우리 사회가 필요로 하는 건설적인 비판을 하는 것도 제가 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일이잖아요.”
정 전 총장이 ‘사회에서 받아온 혜택’을 되갚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린 시절 끼니를 걱정해야 했을 만큼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자신이 서울대를 졸업하고 모교 총장까지 된 것은 개인의 노력보다 그를 도와준 사회의 덕이 크다고 믿기 때문이다.

정운찬 전 총장 인생 풀고백

이제는 지금까지 사회에서 받아온 혜택을 돌려주고 싶다는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


“제가 살아온 60년 인생을 돌아보면 이름 그대로 ‘운이 가득 찬’ 삶이었어요. 인생의 고비마다 고마운 분을 만났고, 그들의 배려와 격려 덕에 새로운 길을 찾을 수 있었죠.”
정 전 총장이 태어난 곳은 충남 공주시 탄천면 덕지리. 한국전쟁이 났을 때 몇 달이 지나고야 그 사실을 알았을 만큼 외떨어진 산골 마을이었다. 할아버지가 광산 채굴에 가산을 쏟아부은 뒤 몰락한 집안에서 5남매의 막내로 태어난 그는 초등학교 1학년을 마치고 서울에서 새로운 삶을 개척하려 한 부모를 따라 서울에 올라왔다고 한다.
“아버지는 종로구 동숭동 언덕배기에 정착하셨어요. 하지만 서울에서의 삶은 고향에 있을 때보다 훨씬 더 어려웠죠. 밤이면 어머니부터 막내인 저까지 가지런하게 모로 누워야 겨우 다 누울 수 있는 방 한 칸에 온 식구가 모여 살았거든요. 아버지는 우리가 다 누울 때까지 밖에 머물다 밤이 깊으면 들어오셔서 윗목 구석에 기대 앉은 채 꺾은 다리를 두 손으로 마주잡고 잠이 드셨어요.”
고향 마을에서 가장 한학에 밝아 선비로 대접받던 아버지는 낯선 서울에서 구멍가게를 열고 다섯 남매를 키우려 동분서주하다 그가 3학년 때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그 후 집안 형편은 더 어려워졌다. 어머니가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삯바느질을 하고, 근처 병원의 빨래거리를 가져와 빨아다 주면서 생계를 이어간 것이다. 명절 아침이나 제삿날 밤이 아닌 때는 옥수수 가루를 넣고 멀겋게 끓인 죽이나 밀가루로 만든 수제비, 국수가 밥상에 오르는 음식의 전부였다고 한다.
“하지만 경제적으로 윤택하지 못했을 뿐, 저는 늘 운이 좋았어요. 제가 태어났을 때 아버지가 제 이름을 지으려고 마을에서 주역에 통달한 어른을 찾아갔는데, 그분이 제 사주를 보곤 첫마디가 ‘운이 꽉 찬 놈이구먼’이라고 하셨대요. 제 이름은 돌림자인 ‘구름 운(雲)’에 ‘빛날 찬(燦)’ 자를 더해 지었지만, 기본적으로는 ‘운을 가득 차고 나왔다’는 뜻도 담고 있어요(웃음).”
그가 떠올리는 최초의 행운은 중학교를 진학할 무렵 찾아왔다. 당시 그는 학교에서 제법 공부를 잘하는 편이었지만, 빨래더미를 이고 병원과 집을 오가는 어머니에게 중학교에 가겠다는 말을 할 수 없어 홀로 고민만 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같은 반 친구 집에 놀러 갔다가 귀가 번쩍 뜨이는 제안을 들었어요. 그 친구의 아버지가 당시 서울대 수의과대 학장이던 이영소 박사셨는데, 제가 경기중학교에 들어가면 학비를 대주시겠다고 한 거예요. 친구에게서 제 가정환경이 어렵다는 말을 들으셨던 거죠.”
정 전 총장은 “학생이라면 누구에게나 공평한 조건인 공부를 잘해야 한다는 것 외엔 아무 조건도 없는 그분의 말씀이 내겐 마치 구세주의 복음 같았다”고 고백했다.
“경기중학교 합격증을 받아들자 이영소 선생님이 제게 외국 신사 한 분을 소개해줬어요. 3·1운동 때 일제의 포악상을 외국에 알린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 박사였죠. ‘석호필’이라는 한국 이름을 갖고 있을 정도로 우리나라를 사랑하셨던 그분은 당시 어려운 환경에 있는 학생들을 여러 명 후원하고 계셨어요. 저도 그분과 인연을 맺게 된 거죠.”

스코필드 박사는 정 전 총장의 입학금을 마련해주고, 1년에 몇 차례씩 생활비에 보태 쓰라며 50달러짜리 캐나다 은행 수표를 보내줬다고 한다. 그때 그 돈은 정 전 총장의 가계에 큰 도움이 됐다고.
“고등학교 진학 때도 스코필드 박사님 덕분에 경제적인 고민을 많이 덜었어요. 박사님이 입학금을 마련해주시고, 장학금도 받을 수 있게 주선해주셨거든요. 박사님은 그때 수입의 대부분을 어려운 이들을 돕는 데 쓰며 사셨는데, 사람들 돕는 데는 분명한 원칙이 있으셨어요. 대상자가 도움을 받을 자격이 있나 꼼꼼히 따지고, 도와주더라도 당사자를 가로막고 있는 첫 번째 어려움만 해결해줄 뿐 그다음부터는 스스로의 힘으로 개척해가도록 하셨죠.”

스코필드 박사, 조순 교수 등 고비마다 만난 소중한 인연들이 삶 이끌어줘
그래서 정 전 총장은 고등학교 시절 시험을 치러 서울시청에서 주는 장학금을 받았고, 입주 과외 아르바이트도 하며 학교를 다녔다고 한다. 그가 서울대 경제학과에 합격했을 때도 스코필드 박사는 정 전 총장의 입학 성적을 알아본 뒤 자신 있게 상과대 학장을 찾아가 장학금을 부탁했고, 정 전 총장은 서울대 동창회가 주는 장학금과 입주 과외 아르바이트를 해 직접 번 돈으로 대학 공부를 이어갔다.
대학 진학 뒤에는 서울대 경제학과 조순 교수가 그의 든든한 후원자가 됐다. 정 전 총장이 졸업할 무렵 한국은행 취직을 주선해주고, 1년 후에는 미국 유학을 권해 그가 지금의 자리에 설 수 있도록 이끌어준 것이다.
“조 선생님께 감사할 일은 또 있어요. 그분 덕분에 제가 결혼할 수 있었거든요(웃음). 아내는 제 대학 3년 후배인데, 대학 시절 만나 사귀다 헤어질 위기가 있었어요. 유학을 떠나며 그쪽 어른들께 인사드리러 갔다가 ‘우리 딸과는 그만 헤어지라’는 냉담한 말씀만 들었거든요. 가정환경이 어렵고 장래성도 없는 제가 마뜩찮으셨던 거죠.”
처음엔 자존심이 상해 그만 아내를 잊으려 했다고 한다. 하지만 미국으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부터 이미 아내가 그리워질 만큼 그를 사랑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고. 그래서 정 전 총장은 유학생활 내내 하루 이틀에 한 번꼴로 아내를 향해 장문의 편지를 썼고, 그 편지가 5백여 통에 이를 무렵, 조순 교수에게 SOS를 쳤다고 한다. 아내의 부모님을 설득해주십사 부탁드린 것이다.
“조 선생님은 아내 부모님을 어느 식당에 초청하신 뒤 사모님과 함께 나가셨대요. 양주 한 병을 들고서요. 그럴듯한 분위기에서 음식과 양주를 대접하며 ‘정운찬이라는 학생이 생각보다 괜찮다. 유학 마치고 오면 대학교수 정도는 무난히 될 인물이니 현재만 보고 판단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거죠. 약주가 얼근해진 아버님은 그 자리에서 결혼을 승낙하셨다고 하더군요(웃음).”
실제로 정 전 총장은 미국 유학 7년 만인 지난 78년, 만 31세의 나이에 서울대 교수가 돼 귀국했다. 이때도 조순 교수의 추천이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제가 사회에 보답하고 싶은 건, 이 많은 도움이 없었다면 제가 절대 지금의 자리에 설 수 없었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제 바람은 저도 이젠 어린 학생들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주고 그들의 삶을 바르게 이끌어주는 스승이 되는 거죠.”
정 전 총장은 이런 마음을 담아 최근 자신의 지난 삶과 소중한 인연들, 청년에게 들려주고픈 조언을 담은 책 ‘가슴으로 생각하라’를 펴냈다.
“저는 앞으로도 여러 학교를 찾아다니며 젊은이들을 만나고,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건설적인 비판을 하면서 제가 사회에서 받은 혜택에 보답할 생각입니다. 정치를 하면 꼭 이루고 싶었던 꿈 가운데 하나가 우리나라의 품격을 높이는 일이었는데, 그것도 제가 선 자리에서 열심히 해나갈 거예요.”

여성동아 2007년 10월 52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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