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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기사

유인경의 Happy Talk

장하다, 내 딸!

2007. 03. 15

그어느 해보다 봄을 즐겁고 가벼운 마음으로 맞이하고 있다. 전 세계인이 걱정하는 지구 온난화, 이라크의 끝없는 총성, 6자회담이나 여당의 분열된 모습 등에 대해서는 미안하지만 별 관심이 없다. 내 딸이 대학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바쁘다는 핑계로, 피곤하다는 이유로, 그리고 딸에게 “무조건 너만 믿는다”고 협박을 하면서 나는 다른 엄마들과 달리 그야말로 날라리 수험생 엄마 노릇을 했다. 신문사와 방송국을 왔다갔다하며 내 일을 하기에도 벅차 과외나 학원 등의 정보를 얻을 틈도 없었고, 운전을 못하니 학원까지 데려가고 데려오는 보디가드나 기사 역할도 못했다. 또 음식솜씨조차 변변치 않아 딸아이가 공부하다 밤늦은 시간에 “엄마 배고파”라고 하면 “뭘 만들어 줄까?”가 아니라 “뭘 시켜줄까?”라며 냉장고 문짝에 붙여놓은 치킨, 족발, 피자집 전화번호를 찾았으니 말이다.
제대로 협조를 안 해주는 것으로도 모자라 방해까지 했다. ‘연애시대’ 등 드라마나 ‘무한도전’ 등의 오락 프로를 보며 딸아이에게 “재미있으니 함께 보자”며 악마 같은 유혹을 하기도 하고, 아이의 마음을 편하게 해준다고 대화를 하자면서 새벽까지 수다를 떨기도 했다.
그렇다고 의식 있는 학부모처럼 성적이나 학벌에 연연하지 않거나 주변의 평가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학교에서 꼴찌를 하면 어때요? 난 우리 아이가 자유로운 영혼을 갖고 행복하기만 하면 좋겠어요”라고 말하기엔 난 대한민국에서 학벌이 얼마나 징그럽게 중요한 가치를 지니는지 알고 있고, 딸아이의 인생을 책임질 능력도 없기 때문이다.
특히 나처럼 바쁘고 설친다고 소문난 엄마의 경우 자식의 학교 성적이나 성격 등이 도마에 오르기 십상이어서 은근히 스트레스도 받았다.

엄마의 무능을 일찌감치 간파하고 혼자 잘 해낸 딸 기특해
“김 선배 아들 말이야, 이번에도 대학 떨어졌잖아. 4수를 시킬지, 군대를 보낼지, 외국에 보낼지 걱정이라더라. 중학교 때까지는 제법 공부를 한 모양인데 고등학교 때부터 좀 놀아서 성적이 영 말이 아니었나봐. 하긴 그 선배, 매일 늦게 들어가고 출장만 다니니 어디 아들 얼굴이라도 제대로 볼 시간이 있었겠어?” “그러게. 자기만 잘 나가고 성공하면 뭐하니? 자식이 그렇게 비실대면 얼마나 억장이 무너지겠니? 대한민국에서 아이 학벌은 엄마의 정보력과 아빠의 재력이 결정한다는 말이 맞는가봐.”
“박 교수 딸도 그렇잖아. 얼마 전에는 가출까지 해서 난리를 피웠나봐. 엄마가 박사면 딸도 유전자를 물려받아 공부를 잘할 것 같은데 완전 깡통이래. 공부 좀 하라고 하면 엄마는 공부 잘 해도 인간성이 안 좋으니 공부 안 하고 싶다고 대든대요.”
주변에서 이런 이야기를 너무 많이 들었다. 아이를 특목고나 명문대학에 합격시키고 마냥 자랑스러워하는 엄마들의 훈장을 탄 듯한 표정도 자주 목격했다. 대한민국에선 아이의 성적이나 대학 합격 여부가 엄마의 성적표이자 채점표인 것이 현실이지만 혼자서 목소리 높여 한국 교육의 문제점을 지적하기에는 힘이 모자랐다.
다행히 딸아이는 엄마의 무능함과 대책 없음을 일찌감치 간파하고 독자 노선을 걸었다. 학원이나 과외도 자기가 알아서 선택했다. 그 모든 결정이 내가 내린 것보다 훌륭해서 나는 기꺼이 돈을 지불하거나 박수만 보낼 뿐이었다.
나도 양심은 있는지라 이번에 딸의 대학시험 결과를 앞두고는 은근히 불안하고 초조했다. 하나님, 부처님, 알라신 등 그들이 보시기에 내가 형편없는 엄마여서 나를 정신 차리게 하기 위해서 딸아이에게 시련을 주실지도 모른다는 유치찬란한 걱정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무조건 합격하게 해달라고 떼를 쓸 만큼 뻔뻔하지도 못해 엄마를 모신 절에 가서 이렇게 기도드렸다.
“제가 엉터리이고 죄 많은 어미인 줄 잘 압니다. 제 죄 값은 달게 치르겠으니 제발 딸아이를 대학에 합격시켜주셔서 아름답고 근사한 대학 생활을 누리게 해주세요. 제가 평생 변비에 시달리거나, 남은 수명 중 10년을 가져가셔도 좋습니다. 그리고 엄마, 엄마가 제일 사랑하던 외손녀잖아요. 제발 그 외손녀가 행복해지게 도와주세요.”
다른 엄마들은 백일기도, 금식기도, 철야기도 등 정성을 다한다지만 난 얄팍하게 몇 번의 기도로 돌아가신 엄마에게 구걸을 하고 하나님, 부처님과 협상을 하기도 했다.
이런 엉터리 엄마인 나보다 훨씬 사려 깊고 속 깊은 딸은 오히려 날 위로해주었다.

대학 들어간 딸과 함께 행복한 추억 만들 생각에 마음 부풀어
“엄마, 논술 전문학원에서 배우는 것보다 엄마랑 밥 먹거나 수다 떨면서 듣는 이야기가 훨씬 도움이 돼. 황우석 박사 사건 때도 엄마가 리더십보다 영웅을 영웅답게 키워가는 팔로십(followship)이 중요하다고 얘기해줬고, 정치나 경제 이야기도 쉽게 풀이해주잖아. 그리고 무엇보다 다른 아이들과 비교하거나 시험 점수 갖고 공부 더 해라, 이건 왜 안하니 하는 잔소리를 하지 않아서 고마워.”
아, 관대하거나 교육철학이 있어서가 아니라 좀 무심하고 좀 피곤해서 잔소리를 할 에너지가 없어서 그런 것을 딸아이가 이렇게 긍정적으로 해석해주니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아무튼 기특하고 대견한 딸아이는 자력갱생해 무사히 대학에 합격했다. 수험기간 때는 별로 해줄 것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이제 내가 할 일이 잔뜩 생겼다. 딸과 함께 새 옷이나 구두 사러 가기, 딸 데리고 맛있는 레스토랑 순례하기, 딸과 여행가기, 딸과 공연장 다니기 등등…. 대학생 엄마로서의 꿈에 부풀어 있는 내게 그토록 착하고 그렇게 천사 같던 딸은 찬물을 끼얹었다.
“엄마는 바쁘니까 나한테 돈이나 신용카드만 줘. 친구들이랑 쇼핑도 하고 뮤지컬도 보고 해외 배낭여행도 가야지. 그동안 얼마나 참았는데….”
하지만 어떻게 해서든지 딸아이와 많은 시간을 보낼 생각이다. 좋은 파트너가 아니라 ‘지갑’ 역할을 해서라도 딸과 함께 영화도 보고, 시장도 가고, 여행도 가서 이 다음에 두고두고 꺼내 볼 수 있는 추억을 많이 만들어야지.
생각해보니 나도 대학에 들어갔을 때 친구들과 노느라 바빠서 엄마와 명동 거리도 걸어보지 못했던 것 같다. 그저 돈 달라, 옷 사달라 요구만 많았지….
하지만 좋은 엄마의 딸로 태어난 것, 나보다 훨씬 똑똑하고 지혜롭고 예쁜 딸을 둔 것 등은 모두 내 복이니까 과거의 나를 반성하기보다 내 스타일대로 딸에게 엉겨붙을 생각이다.
화창한 봄날, 딸아이와 함께 손잡고 걸어다닐 숱한 길들, 그리고 딸로부터 들을 데이트며 대학가 이야기 생각에 벌써부터 가슴이 부푼다.
유인경씨는…
장하다, 내 딸!
경향신문에서 발행하는 시사주간지 ‘뉴스메이커’ 편집위원. MBC 모닝쇼 ‘생방송 오늘 아침’에 출연하고 있다. 그의 홈페이지(www.soodasooda.com)에 가면 그의 다른 칼럼들을 읽어볼 수 있으며 진솔한 대화도 나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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