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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쉘 위 댄스

‘낮엔 변리사, 밤엔 라틴 댄서’ 열정적으로 사는 멋진 중년 백건수

기획·송화선 기자 / 글·문형준‘자유기고가’ / 사진·홍중식 기자

2007. 02. 20

2002년 ‘신지식 특허인상’을 받았을 만큼 능력 있는 변리사면서, 동시에 2천8백여 명의 회원을 거느린중년 라틴댄스 동호회 ‘이지라틴’ 회장인 백건수씨. 그를 만나 낮엔 변리사, 밤엔 라틴 댄서로 즐겁게 살아가는 삶에 대해 들었다.

‘낮엔 변리사, 밤엔 라틴 댄서’ 열정적으로 사는 멋진 중년 백건수

몇해 전 한국에서도 개봉해 인기를 모았던 일본영화 ‘쉘 위 댄스’는 무기력한 중년 회사원이 우연히 댄스 교습소를 찾았다가 삶의 활력을 되찾는 내용을 그리고 있다. 여기, 영화 ‘쉘 위 댄스’의 감동을 누구나 느끼게 하려고 애쓰는 이가 있다. 낮에는 변리사로 특허업무를 다루다, 밤에는 춤꾼이 돼 살사댄스를 가르치는 백건수씨(46)다.
“제가 원래 끼가 많고 에너지가 넘쳐요. 대학 때는 학교 앞 다방에서 DJ를 했고, 변리사가 된 뒤에도 다양한 레포츠를 즐겼죠. 그런데 살사댄스를 만나고부터는 다른 취미에 대한 흥미가 많이 줄어들었어요. 댄스만이 줄 수 있는 재미에 푹 빠졌거든요.”
변리사로 활동하면서도 틈나는 대로 사진과 스키, 승마, 골프, 스노보드 등 각종 레포츠를 즐기던 백씨가 처음 살사댄스를 만난 건 지난 2002년. 한 인기 드라마에 등장한 라틴댄스 장면을 보고는 ‘저거다’ 싶어 당장 라틴댄스 동호회에 가입했다고 한다. 그러나 의욕만 넘쳤을 뿐, 라틴댄스의 격렬한 리듬과 박자를 따라가기엔 체력이 턱없이 부족했다. 같이 춤추는 자식뻘 되는 젊은이들과 보조를 맞추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중간에 한 번 댄스를 포기하려 했다고.
“그런데 막상 춤을 쉬니 뭔가 허전한 거예요, 결국 다시 라틴댄스를 배우기 시작했고, 이번엔 정말 열정을 다해 빠져들었죠.”
도대체 라틴댄스의 어떤 매력이 그를 이렇게 사로잡았을까? 그는 “사람과 자연스레 소통할 수 있는 면이 좋았다”고 말했다.
“그동안 해온 레포츠는 대부분 혼자 하는 거였거든요. 그런데 라틴댄스는 파트너가 필요하잖아요. 그게 좋았어요. 또 룸살롱에 안 가게 되는 것도 좋고요(웃음). 건전하고 재밌게, 그리고 돈도 별로 안 들이면서 놀 수 있는데 왜 룸살롱에 가겠어요. 춤을 춘 뒤로 살도 10kg이나 빠졌어요.”

라틴댄스의 매력 알리고 싶어 직접 동호인 카페 만들어
어느 정도 실력이 붙기 시작하자 그는 라틴댄스의 매력을 자신과 같은 중년들에게 전파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2005년 5월 ‘이지라틴(http://cafe.daum.net/ezlatin)’이라는 이름의 라틴댄스 동호회를 만들고, 가입 연령을 30~55세로 제한했다. 비슷한 연배의 사람들끼리 마음 편하게 라틴댄스를 추고 싶다는 바람 때문이었다. 그의 소박한 꿈은 1년 6개월 만에 큰 결실을 맺어 지금은 회원수가 2천8백명을 넘어섰다고 한다.
“저는 우리나라 중년의 춤 문화가 마음에 들지 않아요. 춤이라는 게 진짜 멋진 건데 지금까지 우리나라 중년들은 카바레나 제비족 같은 퇴폐적인 문화밖에 몰랐거든요. 춤도 ‘지르박’이 전부인 줄 알고요. 제가 ‘이지라틴’ 동호회를 만든 건 이걸 통해 중년의 춤 문화를 바꾸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그는 이 동호회에서 회원들과 함께 춤을 출 뿐 아니라 춤에 서툰 다른 회원들을 가르치기도 한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혼자 즐기지 않고 동호회로 만들어 체계적인 관리까지 해나가는 모습을 보면 그가 ‘끼’뿐 아니라 ‘집중력’과 ‘성실성’까지 갖춘 사람이라는 걸 느끼게 된다. 이런 스타일은 그의 평소 생활에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낮엔 변리사, 밤엔 라틴 댄서’ 열정적으로 사는 멋진 중년 백건수

특허법률사무소에서 변리사로 일하는 백건수씨는 밤이 되면 화려한 ‘라틴댄서’로 변신한다.


“대학 가서 처음엔 많이 놀았어요. 군대 다녀와 정신 차리고 보니 성적표가 F학점 투성이더라고요. 취직은 해야 할 것 같아 그때부터 정말 죽어라 공부했죠. 다행히 졸업하면서 현대자동차에 입사할 수 있었어요. 변리사 시험 준비할 때도 그랬죠. 회사 그만두고 1년 반 동안 모든 걸 쏟아부었거든요. 시험에서 두 번 떨어진 뒤 세 번째에 합격했지만, 연수원은 수석으로 졸업했습니다.”
그는 라틴댄스를 추면서도 변리사라는 직업 역시 소홀히 하지 않고 있다고 한다. 2002년 변리 특허학문에 공헌한 공로로 특허청으로부터 ‘신지식 특허인상’을 받기도 한 그는 변리사 업무 관련서적을 열 권 이상 써냈다고.
“일은 일이고, 취미는 취미죠. 춤추느라 일 소홀히 한다는 얘기를 들을 수는 없잖아요? 낮에는 정말 열심히 일해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춤 때문에 업무에 지장을 받은 적이 없어요. 요즘 많은 사람이 골프를 치잖아요. 저도 한때 골프를 했는데, 그때는 오히려 업무에 지장을 받은 적이 있었던 것 같아요. 춤은 밤에 추지만, 골프를 하려면 낮에 필드에 나가야 하니까요.”
그래서 그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도 당당하다고 한다. 한때는 ‘고소득 전문가’인 변리사가 밤마다 라틴댄스를 춘다며 수군거리는 이들도 있었지만 ‘이지라틴’이 널리 알려지면서 요새는 오히려 “어떻게 하면 라틴댄스를 배울 수 있느냐”고 묻곤 한다고.
“아내에게만 좀 미안하죠. 제 아내가 체육학과 출신이거든요. 춤이 건전한 운동이라는 걸 아니까 춤추는 것에 대해 한 번도 반대한 적이 없어요. 그런데 제가 동호회를 만들고 사람들과 뒤풀이하느라 집에 늦게 들어가곤 하니 서운해하더라고요. 초기엔 그것 때문에 몇 번 다투기도 했죠. 그래서 요새는 뒤풀이를 적당히 하려고 해요. 아내도 저를 더 많이 이해해주고 있고요(웃음).”
이제 그의 목표는 라틴댄스를 대중화시켜 새로운 ‘중년 문화’를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한다. 또한 젊은이의 힙합음악과 중년의 살사댄스를 합쳐 신구세대가 함께 즐길 수 있는 춤 문화를 만들고 싶은 꿈도 있다고.
인터뷰를 마치고 그와 함께 ‘이지라틴’ 연습실로 향했다. 오후 8시가 되자 백씨가 자비 1억원을 들여 마련했다는 연습실 안으로 중년 아저씨 아주머니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흥겨운 라틴음악이 울려 퍼지자 몇몇은 둘씩 모여 스텝을 밟고, 또 몇몇은 비디오를 돌려 보며 춤동작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이마에는 땀이 송송 배고, 얼굴은 진지한 모습들. 연습실 안에 가득한 건 ‘사교’보다는 ‘학습’과 ‘탐구’의 분위기였다. 정장 차림이던 백씨도 어느새 멋진 모자에 펄럭이는 셔츠를 입은 ‘댄서’가 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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