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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혜 한세대 총장 단독 인터뷰

여의도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 부인

글·송화선 기자 / 사진·조영철 기자

입력 2007.01.24 11:20:00

김성혜 한세대 총장은 여의도 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의 부인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는 동시에 피아니스트이자 복음성가 작곡가이며, 우리나라 최초의 예술인 출신 종합대학 총장이기도 하다. 김 총장을 만나 그동안 알려지지 않은 40년 결혼생활과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기울인 남다른 노력에 대해 들었다.
김성혜 한세대 총장 단독 인터뷰

김성혜 한세대 총장(65)은 학생들 사이에서 ‘굿모닝 총장님’이라고 불린다. 캠퍼스에서 마주칠 때면 늘 ‘굿모닝~!’’ 하며 영어로 말을 건네기 때문에 붙은 별명이다. 인터뷰 도중에도 그는 학생을 만날 때마다 “오늘 어땠니?” “나한테 하고 싶은 얘기는 없니?” 등을 영어로 묻곤 했다.
“영어가 중요하다고 수백 번 얘기하는 것보다 이렇게 한 번씩 말을 거는 것이 더 좋더라고요. 처음 ‘굿모닝’을 시작했을 때는 아이들이 저만 보면 멀리서부터 피해갔는데, 요즘은 대답을 제법 잘 해요. 다음 학기부터는 교양영어 강의도 맡을 생각입니다. 총장이 강의실에 들어가 영어를 가르치면 아이들이 깜짝 놀라 더 열심히 공부하겠죠?(웃음)”
장난스레 말하는 모습에서 푸근한 ‘선생님’의 인상이 풍겼다. 김 총장은 신도 수가 75만 명에 이르는 여의도 순복음교회 설립자 조용기 목사의 부인. 어머니 최자실 목사(89년 작고)와 함께 순복음교회의 오늘을 만든 ‘숨은 공로자’로 꼽힌다. 하지만 그는 ‘누구의 부인’이라고 불리기엔 아까울 만큼 자신의 삶도 최선을 다해 가꿔왔다. 남편 뒷바라지를 하면서도 끊임없이 공부한 끝에 이화여대 음대, 맨해튼 음대, 연세대 교육대(영어교육과) 등에서 모두 4개의 석사학위를 받았고, 현재 피아니스트와 음대 교수, 복음성가 작곡가 등으로도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것. 그는 2001년 한세대 총장을 맡음으로써 우리나라 최초의 예술인 출신 종합대학 총장이 되기도 했다.
경기도 군포시 한세대에서 만난 김 총장은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인 여의도순복음교회 목사의 아내로 살며 겪은 애환과, 끊임없는 자기 개발을 통해 당당한 커리어우먼으로 성공하기까지의 삶에 대해 솔직하게 들려줬다.

신도 5명으로 시작한 ‘초미니’ 천막 교회, 어려운 생활 함께 하며 사랑 싹 터
김 총장이 처음 조 목사를 만난 건 중학교 2학년 때. 당시 조 목사는 김 총장의 어머니와 순복음신학교 동급생이었다고 한다.
“원래 어머니는 경남 진해에서 사업을 하셨어요. 아버지는 해군 장교셨고요. 제가 4남매 중 둘째였는데, 전쟁이 막 끝났을 때인 50년대에 형제가 모두 피아노를 배웠을 만큼 부족함 없이 자랐죠. 그런데 제가 중학교 갈 무렵부터 집안이 기울기 시작했어요. 아버지가 어머니 대신 사업을 맡겠다며 군을 제대하고 나서신 게 화근이었죠. 회사는 부도가 났고, 외할머니와 하나뿐인 언니가 특별한 이유 없이 한 달도 안되는 사이에 잇달아 세상을 떠나는 일까지 생겼어요. 어머니는 이런저런 상황에 큰 충격을 받고 신학교에 입학하셨죠.”

김성혜 한세대 총장 단독 인터뷰

건강이 허락하는 한 교육자로 살고 싶다는 김성혜 총장.


얼마 후 김 총장의 부모는 이혼을 결정했다고 한다. 어린 시절 그를 각별히 아끼던 아버지는 어디론가 떠나 소식도 들을 수 없게 됐고, 김 총장은 어머니를 따라 서울로 올라와야 했다. 그가 조 목사를 처음 만난 건 갑자기 세상에 내동댕이쳐진 듯 힘들던 바로 그 무렵이었다고.
“목사님(김 총장은 남편 조 목사를 ‘목사님’이라고 불렀다)은 키가 훌쩍 크고 빼빼 마른 청년이었어요. 처음 인사를 나누던 날 어머니는 제게 ‘하나님께서 죽은 언니 대신 네게 오빠를 주셨다’라고 말씀하셨죠.”
여섯 살 차이인 두 사람은 그때부터 남매처럼 지냈다. 어머니가 서울에 구한 집은 ‘벽 틈으로 찬바람이 숭숭 들어와 연탄가스가 아무리 많이 새도 절대 질식될 염려가 없고, 두 사람만 누우면 꽉 차서 동생들은 친척집에 맡겨야만 하는’ 판잣집이었는데, 그곳에서 사춘기를 보내는 김 총장을 조 목사는 친오빠처럼 다독여주곤 했다고 한다.
“저는 어릴 때부터 피아노를 쳤기 때문에 서울예고에 진학했어요. 그런데 학교에 가니 친구들은 반짝거리는 미제 구두 신고 자가용 타고 다닐 정도로 부자더라고요. 저는 그때 당장 먹을 밥도 없었거든요. 점심시간이면 친구들이 도시락을 먹는 동안 혼자 엎드려 잠을 청하곤 했죠.”
어머니가 돈을 벌겠다며 공사장에 나갔다가 앓아눕는 모습을 보고 그는 담임교사를 찾아가 “돈을 벌어야 하니 아르바이트를 구해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피아노 지도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그때 제 별명이 ‘애기 선생님’이었어요(웃음). 대학 등록금이 9만원이던 시절인데, 3명만 가르치면 한 달에 3만원을 벌 수 있었을 만큼 레슨비가 높았죠. 그 돈으로 등록금 내고 생활 꾸리고, 그 무렵 어머니와 목사님이 서울 대조동에 천막을 쳐서 세운 교회 운영비도 보탰어요.”
여의도순복음교회의 모태가 된 당시 ‘천막 교회’ 신도는 어머니와 김총장, 두 남동생, 비를 피하기 위해 천막 안으로 들어온 할머니 한 명까지 총 다섯 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하지만 조금만 강한 비가 내려도 곳곳이 샐 만큼 허름한 천막 안에 세운 교회는 빠른 속도로 커져나갔다고. 미군 선교부의 도움으로 교회가 서대문으로 이전해 한창 커나가던 65년, 김 총장은 조 목사와 결혼식을 올렸다.
“이화여대 음대를 졸업하고 딱 일주일 만이었죠. 특별한 프러포즈도 없었고, 연애다운 연애를 한 적도 없어요(웃음). 그냥 저는 목사님이 결혼 전부터 늘 식구처럼 느껴진 것 같아요. 목사님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고요. 언젠가 ‘왜 나랑 결혼했느냐’고 여쭤봤더니 ‘생활 능력이 강해서 내가 먼저 세상을 떠나도 아이들과 같이 먹고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하더라고요. 그러고는 미안했는지 예전에 제가 머리를 막 감고 난 모습을 본 적이 있는데 그때 한 번 예뻐 보였다고도 하시데요(웃음).”
김 총장은 이제와 돌아보면 살뜰한 연애담이 없는 것이 아쉽기도 하다고 털어놓았다. 결혼 뒤에도 조 목사는 바쁜 목회활동 탓에 가정에는 소홀했다. 심지어 이사갈 때도 ‘오늘 이사 가요’ 하고 말하면 ‘그럼 저녁 때 이사 간 집에서 만나’라고 대답할 정도였다고.
“한번은 임신한 여자 신도가 심한 입덧으로 고생하다 찾아와 기도를 부탁한 적이 있어요. 열심히 기도해주고는, 그 신도가 돌아가니 제게 ‘여보, 입덧이 입 안이 허는 거를 말하는 거 맞지?’ 하고 묻더라고요. 제가 아이를 셋이나 낳았는데 남편은 입덧이 뭔지도 모른다는 게 신기하면서도 씁쓸했어요. 목사님은 저와 결혼한 뒤에도 늘 전국을 다니며 부흥회를 하느라 제가 입덧하는 걸 볼 시간조차 없었던 거죠.”
김 총장은 조 목사와의 사이에 아들 셋을 뒀는데 조 목사는 아이들이 한창 자랄 때도 거의 매일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목회활동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뒹굴고 놀며 정을 쌓을 시간은 거의 없었다고.

김성혜 한세대 총장 단독 인터뷰

김성혜 총장은 총장실에 피아노를 두고 연습할 뿐 아니라, 학생들과 영어로 대화를 나누는 등 늘 자기 개발을 위해 노력한다.


“제가 부자 사이를 가로막은 점도 있었던 것 같아요. 목사님이 들어오시면 무조건 쉬게 해드려야 한다는 생각에 아이들에게 숨조차 크게 쉬지 못하게 했거든요. 그러다 보니 아이들에게 아버지는 편안하고 다정한 존재가 아니라 두려운 대상이 돼버렸죠. 목사님 역시 아이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어려워하셨고요.”
김 총장은 아이들이 어리던 시절 함께 여름휴가를 떠났다가 생긴 일을 털어놓기도 했다. 간신히 시간을 내 세 아들을 데리고 부산으로 여행을 떠났는데, 조 목사가 차 안에서 일본어 설교 준비를 하며 일본어로 된 성경 구절을 외우기 시작했다고 한다. 김 총장이 “아이들하고 오랜만에 놀러 가는데 여행 가는 차 안에서까지 설교 준비를 하셔야 하나요?”라고 따져봤지만 소용없었다고. 오랜만에 아버지와 논다고 들떠서 따라나섰던 아이들은 금세 기가 죽었고, 부모와 함께 지내는 걸 불편해하는 눈치였다. 결국 이들은 일정을 단축해 사흘 만에 서울로 올라왔다고 한다.
“길에서 젊은 아빠들이 자녀를 데리고 다정하게 걷는 모습을 보면 부러운 마음이 들죠. 얻은 게 있으면 잃는 것도 있다는 게 맞는 말인 것 같아요.”
조 목사도 최근엔 “젊은 시절 바깥일을 하느라 가정에 더 많이 신경 쓰지 못한 게 아쉽다”고 말할 때가 있다고 한다. 결혼 30주년 기념일에는 ‘30여 년의 세월 동안 이 까다로운 사람을 잘 참아준 당신에게 고마운 마음을 조그맣게 표현합니다’라는 메모를 적은 봉투 속에 오랫동안 모은 용돈을 담아 김총장에게 선물로 건네기도 했다고.

“당신 능력을 펼치라”고 늘 격려해준 남편 덕에 ‘좋은 선생님’ 되고픈 꿈 이뤄
김 총장은 조 목사에게 서운함보다 고마운 마음이 더 크다고 한다. 자신이 ‘목사 아내’라는 굴레에 갇혀 살지 않도록 끊임없이 자극하고 북돋워줬기 때문이다. 김 총장은 대학 졸업 후 24세의 나이에 결혼해 3년 동안 전업주부로 산 적이 있다. 그때 그는 조 목사의 목회활동을 뒷바라지하고 살림을 꾸리는 것만으로도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지만, 마음 한편에는 늘 아쉬움이 있었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선생님이 되고 싶었거든요. 대학 다닐 때 교회 일과 각종 아르바이트 때문에 바빴는데도 피아노 실기만큼은 4년 내내 A학점을 받았을 만큼 재능도 있었고요. 제 능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었죠. 하지만 아이를 낳고 기르며 집안일을 꾸리는 것만으로도 힘에 벅찼어요. 그런데 남편이 ‘나만 따라다니기엔 당신 재능이 아까우니 하고 싶은 일을 해보라’며 저를 격려해줬죠.”
김 총장은 ‘목사 아내’의 경우 그것만으로도 하나의 직업이라 할 만큼 맡아야 하는 일이 많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조 목사는 그에게 그런 것을 요구하지 않았다고. 김 총장은 68년 이화여대 대학원에 진학해 석사학위를 받았고, 이후 서울예고 시립대 동덕여대 등에서 10년간 시간강사로 일하며 학생들을 가르쳤다. 아들 셋을 낳은 뒤 공부가 더 필요하다는 생각에 미국 맨해튼 음대 피아노과에 진학해 석사학위를 받기도 했다.
“그러다 81년 호서대 피아노과 전임교수가 됐어요. 이후 한세대로 자리를 옮겨 총장까지 맡게 됐고요. 제가 공부를 계속하지 않았다면, 교수가 될 수 있는 기회가 왔을 때 그것을 잡지 못했을 거예요. 이 나이까지 계속 강단에 설 수도 없었을 거고요. 저는 제자를 가르칠 때 세상에서 가장 행복합니다. 그 행복을 위해 아무리 힘들어도 끊임없이 공부하고 있죠.”
한세대 총장실에는 대형 그랜드 피아노가 놓여있다. 김 총장은 아침 일찍 출근해 업무를 시작하기 전 피아노를 연주하며 실력을 가다듬는다고 한다. 이따금 그가 나태한 모습을 보이면 조 목사가 “어디서 녹스는 소리가 벅벅 나는데. 당신이 공부를 안 하니 녹이 슬어서 그런가봐” 하며 그를 ‘채찍질’한다고.



“외국어 공부를 한 것도 목사님 때문이었어요. 뭘 하든 영어는 꼭 필요하다며, 일상생활을 할 때 영어로 대화를 나누자고 했거든요. 처음에는 단어를 하나도 몰라서 ‘유어 넥타이 이즈 삐뚤’ 같은 식으로 엉뚱하게 말을 만들곤 했어요(웃음). 하지만 그때 생활 속에서 배운 영어가 나중에 미국 유학시절 큰 도움이 됐죠. 영어도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의사소통 수단일 뿐이며, 용기와 배짱만 있으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이라는 깨달음을 얻게 됐으니까요. 제가 학생들에게 자꾸 영어로 말을 거는 것도 그 때문이에요.”
김 총장은 그래서 캠퍼스에서 만난 학생에게 영어로 말을 건 뒤 그가 한 문장이라도 영어로 대답하려고 노력하면 총장과 함께 점심을 먹을 수 있는 ‘런치 티켓’을 준다고 한다. 그 티켓을 받은 학생이 10명이 되면 함께 모여 점심을 먹는다고.
“그 시간엔 무조건 영어로만 대화를 하는 거예요. 대부분 쉽고 가벼운 대화를 주고받지만, 그 과정에서 영어에 대한 자신감이 생기게 마련이죠. 자신의 부족한 점도 쉽게 알게 되고요. 처음에는 아이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시작한 이벤트였는데, 정작 영어가 제일 많이 늘은 건 저 자신이에요. 학생들에게 좋은 모델이 되려면, 영어를 더 잘해야겠다는 마음을 갖게 됐으니까요.”
그래서 김 총장은 지금도 매일 신문에 나오는 ‘오늘의 영어’ ‘오늘의 일본어’를 오려서 외우고, CNN 방송을 들으며 영어를 익힌다고 한다.
“2001년에 한세대 총장을 맡았어요. 그리고 4년 만인 2005년 한 신문이 주최한 대학평가에서 우리 학교는 ‘교수당 학생수 개선도’와 ‘교수 확보율 개선도’에서 전국 1위를 기록하며 ‘개선도 부문 전국 2위’를 차지했죠. 지난해엔 ‘국제화부문 6위, 외국인 교수 비율 1위’에 올랐고요. 대학교육협의회 주관 대학평가에서는 2005년 두 개 영역에서 최우수 대학으로 선정됐습니다. 학교가 자라나는 모습을 보면서 전 어린 시절 제가 꿈꾸던 ‘좋은 선생님’의 소망을 이룬 것 같아 행복해요.”
그래서 그는 앞으로도 건강이 허락하는 한 계속 교육자의 길을 걸을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 가르치고 있는 대학원 학생들과 함께 강의내용을 담은 ‘마스터 클래스’ DVD를 내고, 직접 작곡한 복음성가를 모아 콘서트를 열 계획도 세우고 있다. 조 목사도 “당신은 지금부터 최소한 5년은 더 ‘바짝’ 일해야 한다”며 격려해준다고. 평생 “어제보다는 오늘, 오늘보다는 내일 더 나은 삶을 살자”는 마음가짐으로 살아왔다는 김 총장의 꿈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여성동아 2007년 1월 51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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