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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leb 프라이버시 인터뷰

뮤지컬 무대 서는 가수 임희숙의 굴곡진 인생 고백

글·이남희 기자 / 사진·조영철 기자

입력 2006.12.22 17:33:00

가수 임희숙이 데뷔 40주년을 맞았다. 최근 뮤지컬 ‘슈퍼 루나틱’에 출연하는 등 열정적인 활동을 펼치고 있는 그는 과거 억울하게 대마초 파동에 휘말리고, 음독자살을 기도하는 등 평탄치 않은 삶을 살았다. 역경을 지나 봉사의 삶을 실천하고 있는 그로부터 지나온 인생 이야기를 들었다.
뮤지컬 무대 서는 가수 임희숙의 굴곡진 인생 고백

그의 목소리엔 인생이 담겨있다. 굴곡진 삶을 노래한 그의 허스키 보이스는 역경을 이기며 깊이가 더해졌다. ‘진정 난 몰랐네’ ‘내 하나의 사람은 가고’를 부른 가수 임희숙(56)의 이야기다. 가수 데뷔 40주년을 맞은 임희숙은 지난 10월 말 40주년 자선 디너쇼를 열어 소아암 어린이들과 소년소녀 가장을 도운 데 이어 올 12월 초부터는 뮤지컬 ‘슈퍼 루나틱’에 출연하는 등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지난 11월 중순 서울 혜화동의 한 카페에서 뮤지컬 연습에 한창인 임희숙을 만났다. 펑키한 헤어스타일에 화통한 웃음을 지으며 첫인사를 건네는 그의 모습은 20대 못지않은 에너지가 넘친다. “노래를 꼭 한 번 듣고 싶다”는 기자의 부탁에 그는 곧 손가락으로 박자를 맞추며 뮤지컬의 한 대목을 들려주기도 했는데 그 모습에서 큰언니의 자상함이 느껴졌다.
“처음엔 뮤지컬 출연 제의를 받고 긴장했는데, 주변 사람들이 ‘잘할 수 있다’며 제게 용기를 줬어요. 뮤지컬 대본을 보면서 캐릭터에 사람냄새가 나는 것이 무엇보다 마음에 들었죠. 엄마 같고, 누나같이 따뜻한 정신과 의사의 모습을 그릴 거예요.”
그는 넘치는 신명으로 인터뷰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지난 세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여러 차례 가수활동을 중단해야 했던 아픔을 더 이상 그에게서 찾아볼 수 없었다. 녹록지 않은 삶의 여정을 담담하게 들려주는 그의 모습은 마치 인생을 달관한 철학자와 같았다.

피란길에 태어나 기적처럼 생존, 전쟁 중 아버지와 언니 잃어
임희숙은 전쟁둥이다. 50년 6·25 전쟁이 일어난 지 나흘 뒤에 태어났다. 당시 그의 어머니는 몸이 놀라서 젖이 안 나왔고, 그는 젖을 먹지 못해 목이 터져라 울었다고 한다. “그때 울면서 목소리가 트인 것 같다”는 그는 “어머니가 반공호에 함께 있던 분이 주신 아스피린 두 알을 먹고 젖이 나와 내가 기적처럼 살 수 있었다”고 말했다.
전쟁은 그의 가족에게 큰 상처를 남겼다. 당시 우익청년단체 대한청년단 소속이던 그의 아버지는 6·25 전쟁 때 납북됐고, 세살 터울의 언니는 제대로 먹지 못해 숨졌다. 5년간 남편을 기다린 임희숙의 어머니는 그가 다섯 살 때 재가했다.
“당시만 해도 여자가 아이를 데리고 재혼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어요. 어머니도 재혼했다는 생각 때문에 힘들어하셨고, 그 때문에 제게 더 집중하셨죠. 절 보면 아버지 얼굴이 떠올라서인지 어머니는 저를 아버지 대하듯 키우셨어요. 맛있는 음식이 생기면 제게 가장 먼저 갖다주실 정도로 저를 떠받들어 키우셨어요.”
임희숙의 음악적 재능은 부모가 물려준 것이다. 그의 부친은 아코디언, 색소폰, 기타, 드럼, 하모니카 등 5개의 악기를 연주할 정도였다고. 호소력 짙은 목소리는 어머니를 똑닮았다고 한다. 딸에게 인생을 건 어머니는 그의 가수 데뷔를 반대하다가 나중에는 가장 큰 지원자가 돼주었다.
“어렸을 때부터 악극단 공연을 보고, 음악감상실에 다니다보니 공부보다는 노래를 하고 싶었어요. 가수가 되고 싶었지만, 어머니는 반대하셨죠. 그래도 제가 고집을 꺾지 않자, 어머니는 저를 ‘목포의 눈물’을 작곡한 손목인 선생님에게 데리고 가셨어요. 그분이 제 목소리에서 흑인들의 애절하면서도 힘있는 느낌을 발견하고, 그런 분위기의 노래 몇 곡을 주며 저를 연습시키셨어요. 최근 알게 된 이야기인데 제가 가수로 데뷔할 때 어머니는 ‘딸을 잘 부탁한다’며 MBC 라디오 DJ 이종환 선생님께도 찾아가셨다고 합니다. 제가 시민회관에서 공연을 하면, 밴드 뮤지션들을 먹이려고 수십인 분의 갈비를 만들어올 만큼 어머니는 제 뒷바라지에 헌신적이셨죠.”
66년 덕성여고 2학년 때 그는 가수로 데뷔했다. 당시 최고로 치던 워커힐 무대에 선 그는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고, 이후 첫 히트곡인 ‘그 사람 떠나가고’의 작사·작곡가이며 방송국 PD였던 전우중씨에게 발탁돼 매주 TV에 출연했다. 어린 나이에 방송생활을 시작했던 그는 정작 행복한 학창시절을 보내진 못했다.

뮤지컬 무대 서는 가수 임희숙의 굴곡진 인생 고백

임희숙은 “사람들에게 용기와 소망을 주기 위해 계속 노래를 부르고싶다”고 말한다.


“초등학교 때 공부를 곧잘 해 진명여중 입학시험을 봤는데, 시간이 남아서 답안지에 만화를 그렸다가 성적이 무효처리된 거예요. 그래서 덕성여중 야간에 갔는데, 정상이 참작돼 다시 덕성여중 주간으로 옮기게 됐어요. 다른 친구들과 입학 경로가 다른 탓에 아이들 사이에서 겉돌아야 했죠. 무용반에 들어갔을 때는 단정하지 않게 어깨를 들썩이며 기생춤을 춘다고 선생님께 장구채로 맞기도 했고요. 제가 어렸을 때 악극단 구경을 다니며 본 것을 그대로 흉내 내서 그랬던 거죠. 무용선생님이 절 사랑하는 것 같지 않아 참 외로웠어요.”
그는 68년 한양대 영화학과에 입학했지만, 바쁜 가수생활 때문에 1년이 못 돼 중퇴했다. 당시 임희숙의 넘치는 끼를 높이 산 작곡가 신중현은 ‘님은 먼 곳에’ 등 훗날 빅히트를 친 자신의 곡을 주려고 했지만, 그는 이미 작곡가 김희갑과 음반을 내기로 약속했기에 제의를 거절했다고 한다.
“이종환 선생님은 저를 바보라고 했지만, 그때 선택을 후회하지 않아요. 69년 김희갑 선생님께 받은 노래 ‘진정 난 몰랐네’가 인기를 끌었고, 신중현 선생님도 이후 김추자라는 걸출한 가수를 만났잖아요.”

대마초를 피웠다는 누명 쓰고 방송출연 금지당한 뒤 음독자살 기도
탄탄대로를 달리던 그는 75년 가요정화운동이라는 명분하에 벌어진 대마초 파동에 휘말려 5년간 노래를 부를 수 없었다. 대마초를 한번도 피우지 않았던 그는 해명할 기회도 없이 다른 가수들과 함께 일괄적으로 방송출연을 금지당했다고 한다. 자신의 생명과도 같은 노래를 할 수 없어 방황하던 그는 그해 서울 종로의 한 여관에서 음독자살을 기도해 세상을 놀라게 했다.
“대마초를 한 게 아닌데 억울했어요. 저는 ‘언제, 어디서, 누구와 피웠다’는 진술을 안 했는데, 사람들은 제가 눈을 감고 소울을 부르니까 으레 대마초를 피울 거라고 생각했나봐요. 저는 술도 잘 못 마셔요. 대마초를 피운 뒤 노래를 불렀다면, 그건 임희숙이 아니라 대마초가 노래를 한 거지. 나는 인위적인 것보다 내추럴한 것을 좋아해요. 한때 음독자살 소동도 있었죠. 건강한 몸만 약하게 만드는 어리석은 짓을 했어요. 위에 데미지(손상)도 있었고…. 일종의 현실도피였어요.”
신군부가 들어서고 해금이 되면서 그는 다시 방송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81년 한 TV의 공개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했다가 허리를 다치고, 과거 교통사고 후유증이 겹치면서 건강에 이상이 생겼다. 그는 다시 3년 넘게 가수활동을 중단했지만 더 이상 주저앉지 않았다. 신앙을 가진 뒤 영혼을 노래하는 소울과 가스펠을 부르며 자신을 다잡았고, 재즈 피아노도 익혔다.
“우연히 TV 연속극을 보다가 귀가 번쩍 뜨이는 이야길 들었어요. 극중 내레이터가 ‘주인공은 생각했다. 이렇게 애를 써도 안되는 것은 하늘의 뜻이다’라고 말하는데, 그게 꼭 하나님이 저를 부르는 소리 같았어요. 그때 나보다는 남을 먼저 생각하는 크리스천이 되기로 결심했죠. 제가 변화하는 모습을 보이자 어머니도 1년 만에 기독교에 귀의하셨고요.”
병마에서 이긴 그는 84년 ‘내 하나의 사람은 가고’를 발표해 재기에 성공했다. 작사가를 통해 이 노래의 가사를 받아본 그는 ‘등이 휠 것 같은 삶의 무게여’라는 대목에 반했다고 한다. 이 노래는 어두운 시련기를 훌훌 털어버리고 그가 대중에게 새롭게 각인되는 계기가 됐다.

“‘사람들을 위로하는 노래를 부르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더니, 하나님이 제게 ‘내 하나의 사람은 가고’를 선물로 주신 거예요. 이 노래보다 더 감동을 줄 수 있는 히트곡이 제겐 더 이상 없을 거라고 생각해요. 이 노래가 2000년 MBC 드라마 ‘엄마야 누나야’ 삽입곡으로 등장하고, 조관우씨가 리메이크한 ‘진정 난 몰랐네’가 2001년 MBC 드라마 ‘그 여자네 집’ 주제곡으로 나오는 것을 보며, ‘세월이 흘러도 내 노래가 잊히지 않는다’는 생각에 감사했어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한을 담아 제 노래들을 부르더라고요. 이만하면 대중가수로서 꿈을 이룬 게 아닌가 싶어요.”
임희숙은 ‘가수는 음악에 모든 것을 쏟을 때 가장 아름다운 노래를 부를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그래서일까. 그에게는 지금 남편도, 자녀도 없다. 음악과 결혼한 그에게 지난날의 연애담을 묻자, 그는 웃으며 “대한민국 남자 중에는 멋쟁이가 없는 것 같다”고 말한다.
“남자에게 사랑받고 안주하는 것보다 저는 푸닥거리 같은 작업을 더 좋아했어요. 솔직히 말하면 제 나이보다 10년 위까지 멋진 남자가 별로 안 보이기도 했고요.(웃음) 대중에게 사랑을 많이 받으니까, 남자의 사랑이 그다지 필요하다고 느껴지지 않았죠. 저를 KBS 드라마 ‘노다지’에 여자 스파이 역으로 출연시킨 박병우 PD는 ‘너는 사랑을 안 하고 있을 때 노래를 더 잘 부른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가수는 노래할 때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어야 최고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뜻이었죠. 그분의 말씀에 저는 적극 공감해요. 보통의 여성들과 다른 라이프 사이클로 살아왔지만, 사람들을 위해 노래하는 제가 누구보다 행복한 것 아닌가요?”



그의 목소리에 반해 청혼한 덴마크 황태자
그는 대마초 파동으로 가수활동을 쉬어야 했을 때, 덴마크 황태자와 혼담이 오간 적도 있다고 한다. ‘이 마음 아시나요’가 실린 음반을 듣고, 덴마크 황태자가 임희숙의 목소리에 반해 프러포즈한 것이다. 하지만, 그곳으로 시집가면 더 이상 가수활동을 할 수 없다는 이야기에 그는 결혼생각을 접었다고 한다.
“워낙 고생하고 있을 때여서, 어머니가 저를 시집보내고 싶어하셨죠. 하지만 결혼하면 노래를 부를 수 없다는 게 죽어도 싫었어요.(웃음)”
그는 영화와 드라마에서 개성 넘치는 연기를 선보이기도 했다. 94년 드라마 ‘남자는 외로워’에서 기지촌 가수 역할을 맡았고, 95년 아버지가 다른 동생인 영화감독 이민용의 감독 데뷔작 ‘개 같은 날의 오후’에서는 출연료를 받지 않고 콩국수집 식당 주인 포항댁으로 출연했다. 또 ‘블루 사이공’ ‘겨울나그네’ 등 유명 뮤지컬에 출연하면서 자신의 끼를 마음껏 펼쳤다. 그는 “연기에 대해 제대로 배우지 않았지만 삶이 곧 ‘연기의 연습장’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동생 이민용 감독과 각별한 우애를 과시해왔다. 동생이 최민수·이영애 주연의 영화 ‘인샬라’를 만들 때, 그는 사하라사막 현지 로케에 동행해 밥짓기는 물론 짐 운반까지 온갖 험한 일을 도맡았다고.
“최근 동생은 50년대 독도의용수비대의 활약상을 그린 영화 ‘독도수비대’를 준비하고 있어요. 어머니는 요즘 동생의 영화가 잘되게 해달라고 매일 기도하러 다니세요. 역사적으로 큰 의미를 지닌 영화인만큼, 동생의 작업이 꼭 성공하기를 바랍니다.”
역경의 터널을 지나 어느덧 50대 중반에 이른 그는 마음의 여유와 행복을 찾았다. 그는 “행복은 있는 그 자체로 만족하는 것”이라며 “사람들이 자신이 가진 것들을 맘껏 누렸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경험이 풍부해지고, 더욱 지혜로워진다는 이야기입니다. 요즘 저의 걱정은 봄·가을이 짧아져 먹을 것이 없어진다는 거예요. 이렇듯 어른 된 걱정을 하는 제 모습이 대견스럽기도 합니다. 행복은 ‘to be(존재한다)’예요. 저는 두 다리 뻗고 잘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행복합니다.”

“왕년의 인기가수가 아니라 사람들 곁에 늘 함께 한 가수로 기억되고 싶어요”
그는 사람들에게 용기와 소망을 주기 위해 노래를 부른다. “왕년의 인기가수가 아니라 그저 사람들의 곁에 늘 함께 한 가수로 기억되고 싶다”는 것이 그의 바람이다. 그의 노래는 잠시 떴다 사라지는 일회성 인기를 구가하기보다, 시간과 세대를 초월해 사람들의 가슴에 남아있다.
“사람들이 기억하고, 그리워하고, 필요로 하는 존재가 됐으면 합니다. 전쟁 중에 태어나 기적처럼 살아남았으니, 어쩌면 저는 덤으로 살고 있는지 몰라요. 명예나 물질에 대한 욕심에서 벗어나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면서 사람답게 사는 것이 제 소명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돌아선 하늘엔 살빛 낮달이 슬퍼라
오래도록 잊었던 눈물이 솟고
등이 휠 것 같은 삶의 무게여
가거라 사람아 세월을 따라
모두가 걸어가는 쓸쓸한 그 길로.
(‘내 하나의 사람은 가고’ 중에서)

여성동아 2006년 12월 51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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