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의 재능을 일찍 파악하고, 그것이 제대로 발현될 수 있도록 돕는 것은 부모의 당연한 역할이다. 많은 부모들이 아이들을 피아노, 미술, 컴퓨터, 태권도 등 여러 학원에 보내는 것도 아이들이 가진 잠재적인 재능을 파악하기 위한 것.
그러나 경인교육대(옛 인천교대) 미술교육과 김정희 교수(47)는 “부모가 아이를 미술가로 키워야겠다고 마음을 정하고, 미술에 국한된 프로그램을 짜는 순간 미술 영재성이 발현될 가능성은 낮아진다”고 말한다. 아이가 지금 당장은 그림을 자기표현 수단으로 사용하지만 훗날 영화, 연극, 음악, 문학 등 다른 분야에서 더 큰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을 수도 있는데 그 가능성을 막는다는 것.
“아이가 미술을 좋아하면 엄마들 머릿속에는 이미 ‘얘는 훌륭한 미술가야’ 하는 생각이 자리 잡아요. 그래서 미술학원에 보내고 이름난 미술가에게 개인 레슨을 받게 하죠. 그런데 좋은 미술가가 되려면 미술의 기술과 형식만 배워서는 안 되거든요. 기본적인 토양이 만들어져야 하는데 그게 바로 예술적 감수성이고, 그것을 키우기 위해선 미술과 더불어 음악도 듣고, 여행도 자주 하고, 문학작품을 읽는 등 다양한 예술적 경험을 해야 하죠.”
김 교수에 따르면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미술가들 대부분은 어려서 미술에 국한된 교육을 받지 않았다고 한다. 빈센트 반 고흐는 어릴 때부터 사색을 즐기고 시골마을의 들판에 핀 들꽃과 곤충, 동물들을 세심하게 관찰했다고. 또 독서를 즐겨 종교서적과 문학작품을 탐독했으며 중학교에 입학한 뒤에야 제대로 미술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프랑스 화가 툴루즈 로트레크는 그의 그림 선생인 프랭스토와 함께 자주 서커스 공연장을 찾았는데 어릴 적부터 보아온 곡예사들의 화려한 몸놀림, 조명이 빚어내는 빛과 그림자 효과는 훗날 그의 작품에 고스란히 반영돼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을 만들어냈다고.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미술가들을 보면 그들 곁에는 훌륭한 선생님이나 부모가 있었어요. 그들은 미술에 재능을 보이는 아이에게 미술보다는 시를 읽어주고, 서커스와 연극을 보여주고, 음악을 들려주고, 자연을 느끼도록 하는 교육에 비중을 두었죠.”
비디오 아트 창시자로 세계 미술계의 주목을 받았던 고 백남준 역시 학창시절 미술보다는 음악과 물리학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중학생 때부터 현대음악의 선구자인 쇤베르크의 음악세계를 동경하고, 도쿄대학 시절엔 음악서적과 철학서적을 탐독했다고. 백남준은 독일 뮌헨대학에서 음악석사 과정을 밟고 뒤늦게 미술활동을 시작했다.
“백남준씨는 음악과 과학적 사고가 풍부했어요. 과학과 예술은 공통적으로 뭔가를 만들어내야 하기 때문에 창의성을 필요로 하죠. 과학적 재능과 예술적 재능을 동시에 갖기는 쉽지 않지만 과학 분야에서 최고봉에 올라 있는 사람들을 살펴보면 예술적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 꽤 있어요. 그런 점에서 아이가 과학을 좋아한다고 해서 과학만 시키면 이 다음에 평범한 과학자는 되겠지만 과학 이외에 다른 여러 체험을 하게 하면 아이는 보통 과학자들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어요. 미술도 마찬가지예요. 어릴수록 다양한 체험이 중요하죠.”
선진국에선 초등학교 저학년 때까지 예술 통합교육 비중 커
과학이건 미술이건 다양한 경험을 토대로 새로운 것을 찾아낼 수 있는 눈이 필요한데, 김 교수는 그것을 ‘감(感)’이라고 표현했다. 머릿속에 아무리 많은 정보를 갖고 있어도 그것을 제대로 엮지 못하면 새로운 게 나올 수 없는데 논리적으로 하나씩 풀어가는 사람보다 감을 가진 사람이 순간적으로 뭔가를 포착해내는 능력이 있고, 그것이 곧 새로운 것의 창조로 이어진다고.
“감이 뛰어난 사람들은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남들이 듣지 못하는 것을 듣고, 뭔가를 만지면서도 이미지가 떠오르죠. 감이 발달하면 어느 분야에서나 도움이 되지만 특히 미술에서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죠.”
김 교수는 감을 발달시키기 위해서는 다양한 체험이 아주 중요한데 그 체험이 가장 효과적인 시기가 바로 모든 감각이 열려 있는 유치원 때와 초등학교 저학년 때라고 말한다. 미국과 독일, 프랑스 등 선진국에선 오래전부터 초등학교 저학년 때까지는 ‘감을 키우기 위한’ 예술교육에 집중하고 있다. 김 교수가 1984년부터 10년간 유학하며 경험한 독일의 교육법은 천재 미술가들의 어린 시절과 통하는 부분이 있다고.
“독일 사람들은 아이들을 보는 관점이 우리와 달라요. 우리는 아이들을 가르쳐야 할 대상으로 보는 반면 독일인들은 아이들 자체가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지닌 보석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훗날 반짝반짝 빛이 나도록 어른들이 닦아주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아이들에게 다양한 상황을 마련해주고, 아이들 스스로 그 상황 속에서 자기에게 의미 있는 지식을 얻도록 하는 체험학습이 많죠.”
독일의 아이들은 초등학교 4학년 때까지는 우리 시각으로 볼 때 ‘마냥 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한다. 학교 수업도 공부보다는 체험과 놀이, 예술교육의 비중이 높다고.
“무용, 음악, 미술, 체육 등 예술 통합교육을 통해서 아이들의 오감을 발달시키는 과정이 많아요. 우선 다양한 정보를 접수하는 창구와 같은 오감을 충분히 발달시킨 다음 아이들이 원하는 것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거죠.”
그는 2003년 1년간 미국 플로리다 주립대학에 방문교수로 가 있으면서 미국 초·중·고등학교의 미술교육 현장을 체험할 수 있었다. 김 교수는 우리와 비교할 때 각각 장단점이 있으나 미국 초등학교의 예술 통합교육만큼은 본받을 만하다고 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이들이 한 학기에 미술과 음악, 체육을 동시에 배우지만 미국에선 한 학기를 4등분해서 각각 미술, 음악, 무용, 드라마를 집중적으로 배우게 해요. 네 가지 수업 모두 한 가지 주제로 진행되죠. 예를 들어 봄이라는 주제로 미술, 음악, 무용, 드라마 수업을 차례로 진행해요. 미술시간에 했던 작업이 음악시간에 영향을 주고, 음악시간에 배운 게 무용시간에 도움이 되는 식이에요. 전담 교사가 따로 있고, 학기말엔 프로젝트 발표회를 하는데 같은 주제를 다양한 표현방식으로 다뤄보고, 각 분야의 상호작용을 경험할 수 있다는 점에서 참 좋은 것 같아요. 주요 교과는 오전에 3~4시간 배우고 오후에는 대부분 예술 통합교육을 해요. 중학교 때부터는 미술, 음악, 드라마 등에서 자신이 원하는 한 가지 분야를 선택해 심화학습을 받고요.”
국내에 있는 한 프랑스 학교는 동요나 동시를 읽고 그것과 관련된 내용을 그림으로 그리도록 하거나 이야기가 담긴 그림을 그리는 활동이 많다고 한다. 그림과 언어 혹은 음악 등을 연결시킨 통합교육이 발달한 것. 또한 동물원, 식물원, 박물관 등을 방문하는 현장학습의 기회를 자주 제공해 아이들이 체험을 통해 자신의 인식세계를 스스로 넓히도록 하고, 아이들이 직접 주제와 장소를 선택해 그림을 그리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반면 우리의 교육 현실은 45분 단위로 아이들이 사고를 전환해야 하고, 한 교사가 10여 개의 과목을 전담하고 있어 전문성을 기대하기 힘든 상황. 하지만 김 교수는 “가정에서도 충분히 오감을 발달시킬 수 있다”고 말한다.
“아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건 자연적 체험이에요. 자연적 체험이라고 하면 아이들을 자연으로 데리고 나가는 것만 생각하는데 사실은 부엌이 정말 좋은 체험 공간이에요. 아이들에게 직접 배추를 자르고, 생선을 만지게 하는 거죠. 물과 소금, 설탕만으로도 아주 좋은 체험교육을 할 수 있어요. 유리창과 신문지에 분무기로 물을 뿌려보고, 소금과 설탕의 질감이 어떻게 다른지 만져보게 하는 거죠. 함께 요리를 해보는 것도 좋아요. 만두를 만들 때 엄마가 반죽을 하면 아이는 그 옆에서 밀가루의 질감을 느껴보고, 반죽으로 여러 모양을 만들 수 있죠. 거기에 물감을 떨어뜨려서 색깔이 섞이는 것도 경험하게 하고요.”
그는 “이러한 활동을 통해 아이가 미술에서 가장 중요한 색과 형에 대한 감각을 발달시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예술적 상황에 섬세하게 반응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준다”고 말했다.
미술작품 완성하는 것보다 다양한 재료 체험하는 것이 교육효과 더 높아
“엄마들이 집에서 미술 지도를 못한다고 하는 건 미술교육 하면 작품이 나와야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작품이 나오기 위해서는 먼저 재료를 느껴야 해요. 밀가루, 물, 생선, 야채 등으로 좋은 재료 체험을 할 수 있어요. 비린내가 난다고 아이에게 생선을 못 만지게 할 게 아니라 아이가 원하면 생선을 들고 동네방네 다니게 하는 게 좋아요. 눈으로 보고 손으로 느끼고, 후각으로 냄새를 맡고 하면서 아이는 물고기의 종류에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되죠. 그것이 계기가 돼 아이가 훗날 예술가가 될 수도 있고, 과학자가 될 수도 있거든요.”
그러나 아이의 오감을 발달시키겠다고 매일 부엌에서 시간을 보내기는 힘들다. 김 교수처럼 맞벌이를 하는 주부 입장에선 더욱 그러하다. 이 경우 사교육에 의존하게 되는데 김 교수는 유치원이나 학원에 기대하는 바를 잘 정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유치원 교사들과 얘기를 해보면 체험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으면서도 엄마들이 원하지 않아 실천하지 못한다고 하소연해요. 많은 엄마들이 아이를 유치원이나 미술학원에 보낼 때 어떤 결과물을 기대하거든요.”
그는 “감자를 쪼개서 하얀 녹말이 나오는 것을 눈으로 보고, 맛을 보는 것이 작품 하나를 완성하는 것보다 중요한데, 엄마들은 훌륭한 작품을 기대하는 것은 물론 한 단계 더 나아가 다른 집 아이와 비교를 한다”며 “비교는 절대 해서는 안 될 일”이라고 강조했다.
“상담을 해보면 엄마들이 ‘옆집 아이는 사람을 그리면 팔 다리가 다 있는데 우리 아이는 그렇게 안 그린다’며 걱정을 해요. 그런데 아이들은 똑같은 사람을 그리더라도 발달 단계에 따라 다 다르게 그려요. 사람이 자랄 때도 왼팔 오른팔이 각각 다르게 자란대요. 모든 능력이 동시에 발달할 수 없는 거죠. 그러니 내 아이가 다른 집 아이보다 모자란 것을 찾을 게 아니라 아이의 장점을 살려줘야 해요. 내 아이가 옆집 아이보다 나은 점이 분명 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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