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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석이 처음 밝힌 “기러기 아빠 생활 3년 & 방송생활 30년 뒷얘기”

“두딸 유학 보내고 기러기 아빠 생활 3년, 노래로 가족사랑을 전하고 싶어요”

■ 글·최호열 기자 ■ 사진·조영철 기자

입력 2004.08.02 17:26:00

70년대엔 ‘가는 세월’을 부른 통기타 가수로, 80~90년대엔 라디오 교통 프로그램 ‘푸른 신호등’ 진행자로 폭넓은 사랑을 받은 방송인 서유석씨가 최근 자신의 30년 방송생활을 담은 자전에세이를 펴냈다. 그를 만나 방송 뒷얘기와 가족사랑을 들어보았다.
서유석이 처음 밝힌 “기러기 아빠 생활 3년 & 방송생활 30년 뒷얘기”

지난 6월28일 서울 안국동에 있는 카페 느티나무에서 이색 콘서트가 열렸다. ‘가는 세월’을 부른 가수이자 라디오 교통 프로그램 ‘푸른 신호등’의 진행자로 출근길 서민들의 귀와 마음을 시원하게 해주는 청량제 역할을 했던 서유석(57)이 출판 기념회를 겸한 작은 콘서트를 연 것. 그가 최근 펴낸 자전에세이 ‘청개구리들이여! 다시 날자구나’엔 30년 방송생활 뒷얘기뿐 아니라 당시 수재들만 모인다는 경기중·고등학교에 입학했던 그가 핸드볼 선수로, 가수로, 사업가로, 시민운동가로 끊임없이 변신해온 파란만장한 개인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재작년 연말에 정부로부터 교통문화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국민훈장 목련장을 받았어요. 상을 받고 돌이켜 보니 교통 관련 프로그램을 진행한 기간만 25년이 되었더라고요. 방송활동을 한 것은 30년이나 되었고요. 이젠 물러날 때가 되었구나 싶었죠. 오랫동안 쉬었던 가수활동도 다시 하고 싶고…. 그래서 지난해 봄에 방송을 그만두면서 30년 방송생활을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글을 쓰기 시작했어요.”
그가 진행했던 ‘푸른 신호등’은 당시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다. 그건 단순히 교통 상황을 알려주는 전달자에 머물지 않고 운전자들, 특히 버스·택시 운전기사들과 함께 호흡했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사회적 분위기가 교통문제는 직업운전기사들만 운전을 잘하면 된다는 의식이 팽배했어요. 사회에서 해주는 것 없이 비난만 하니까 그들로서는 미치는 노릇이었죠. 방송을 하다 보니 그걸 느끼겠더라고요. 그래서 저라도 그분들에게 애정이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렇게 해서 만든 게 ‘푸른 신호등’의 이름을 건 교통가족 축구대회와 체육대회였어요. 15년 동안 해마다 열었죠.”
그는 운전자들의 권익을 보호하는 일에 앞장서기도 했다. 택시운전사들의 사기진작을 위해 25년 이상 무사고 운전자들에게 개인택시 자격증을 주는 제도를 건의한 것도, 가벼운 교통법규를 위반했을 때 무조건 딱지를 떼지 말고 주의만 줘서 운전자들이 기분 좋게 반성할 수 있게 하자는 ‘옐로카드제’를 제안한 것도 바로 그였다. ‘어린이는 빨간 신호등’ ‘장애인의 반대말은 비장애인’ 등도 그가 만들어낸 말들이다.
재미있는 건 그가 교통 관련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사업가로 변신하기도 했다는 것. 그는 90년대 중반 교통안전물 제조 벤처기업인 (주)다물을 설립했다.
“방송을 하니까 교통사고 소식을 많이 접하게 되는데, 사람들이 사망하는 대형사고가 대부분 고가도로에 올라가는 길목, 중앙분리대, 급커브길에 세워진 콘크리트 구조물에 부딪친 사고더라고요.”
문득 ‘구조물을 콘크리트가 아닌 부딪칠 때 충격을 흡수하는 재료로 만들면 사망사고가 줄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떠오른 게 폐타이어. 그는 96년 서울시내에서 사고가 많은 3백여 곳에 폐타이어를 이용해 만든 구조물을 설치했다. 폐타이어 구조물이 세워진 곳의 교통사고 사망률이 확실하게 줄었음은 물론이다. 또한 콘크리트보다 더 튼튼하면서도 안전한 중앙분리대를 개발해 여의도에 시범적으로 설치했는가 하면, 현재 가드레일을 대신할 제품을 개발중에 있다고 한다.
“교통 프로그램을 하면서 가장 좋았던 점은 ‘아침형 인간’이 되었다는 거예요. 아침부터 방송을 해야 하니까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습관이 생겼거든요. 일찍 일어나기 위해 술도 끊게 되고, 체력관리를 위해 헬스클럽에 가서 운동도 하게 되고…. 그러니까 전보다 더 건강해졌어요.”
방송활동 외에도 독도사랑운동을 전개하는 등 사회운동에도 적극적으로 활동하던 그는 96년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다 낙선의 아픔을 겪기도 했다. 그런데 당시 그의 행보를 놓고 뒷말이 많았다. 신문에서 하루는 여당으로 출마한다고 보도했다가 다음날은 야당으로 출마한다고 보도했기 때문이다. 국민들에게 마치 ‘어느 정당이 유리할까’ 저울질하는 모습으로 비춰져 비난이 일기도 했다.

서유석이 처음 밝힌 “기러기 아빠 생활 3년 & 방송생활 30년 뒷얘기”

라디오 교통 관련 프로그램을 진행할 때의 서유석.


“오해였어요. 당시 신한국당, 새정치국민회의, 공화당 등 여야 3당으로부터 모두 출마 제안을 받은 건 사실이에요. 셋 다 개인적으로 인연이 깊었거든요. 동생이 이희호 여사의 조카사위니까 김대중 전 대통령과 저는 사돈간이에요. 김영삼 전 대통령은 당시 제가 기획한 오페라 ‘안중근’ 공연에 직접 와서 관람을 한 후에 저를 부르더니 ‘(총선을) 준비하라’고 했을 정도였어요. 제 친한 친구들이 다 그곳에서 활동하고 있었고요. 공화당 한영수 선배와는 정말 막역한 사이고…. 그런데 생각을 해보니까 여당으로 가면 초선의원이 할 수 있는 일이 거수기밖에 안되겠더라고요. 그렇다고 야당으로 가자니 사돈끼리 공천을 주고받았다는 소릴 듣기 싫고…. 그래서 무소속으로 출마를 결심했어요. 당시 일산은 신도시여서 지역색이 없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더라고요.”
그의 나이에 비해 아이들이 어린 편이다. 결혼이 많이 늦었기 때문이다. “여성팬이 사인을 해달라고 하면 인상을 쓸 정도로 이성에 대해 별 관심이 없었다”는 그가 결혼하게 된 사연이 재미있다. 술집에서 시비가 붙어 말다툼을 하다 결혼으로 이어졌다는 것.
어느 날 카페에서 방송국 PD와 술을 마시다 국악계와 클래식계를 성토하게 되었다. 그의 작은 누나가 한양대 음대 교수였고, PD는 국악 프로그램을 맡고 있어 ‘서로 쿵짝이 맞아’ 신나게 욕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 건너편 테이블에서 술을 마시던 여성 3명과 시비가 붙게 되었다. 한양대 음대생들이어서 자기네 선배들을 욕하는 게 귀에 거슬렸던 모양이다.

“역시 인생의 마지막 귀착점은 사랑”
“시비가 붙으니까 PD는 어느새 줄행랑을 쳐버리고, 저 혼자 말싸움을 하게 되었어요. 결국 제가 사과하기로 하고 3명의 전화번호를 받았지요. 다음날 전화를 했는데 다른 두 명은 안 받고 한 명만 전화를 받더라고요. 그래서 다시 만났는데, 바로 제 아내예요. 재미있는 게 사과를 하겠다고 만나서 또 시비를 걸고, 다시 사과하겠다고 만나서 또 시비를 걸고… 그러면서 인연이 되었죠.”
당시 그의 나이 마흔둘. 이젠 가정을 꾸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당시 서른이었던 아내는 유학을 준비하고 있었다.
“어떻게든 잡고 싶었어요. 그래서 ‘외국 나가 석·박사 학위 받고 돌아와 봤자 시간강사 자리 하나 얻으려면 4천~5천만원을 학교에 기부해야 한다. 게다가 교수라도 될라치면 나이가 마흔을 훌쩍 넘게 된다. 평생 혼자 살 거면 모르지만 결혼할 생각 있으면 유학 포기해라. 난 평생 부끄럽지 않게 살았고 하루 세 끼 먹고 사는 데 문제없다’고 설득을 했죠.”
딸만 둘인 그는 3년째 기러기 아빠 생활을 하고 있다. 추석이나 설날 등 명절 때는 그가 아이들과 아내가 있는 말레이시아로 가고, 여름방학 때는 아이들이 한국에 온다.
“오래 전부터 아침은 우유 한 잔에 찰떡을 구워 먹는 것으로 해결을 했고, 점심과 저녁은 밖에서 해결하면 되니까 먹는 것 때문에 불편한 것은 없어요. 빨래는 세탁기가 하고, 청소는 청소기가 하고…. 문제는 외로움인데, 솔직히 혼자인 게 다행이다 싶기도 해요. 가수 활동을 하려면 기타도 연습해야 하고, 작사 작곡도 해야 하니까요. 처음 6개월이 힘들었어요. 가족들이 있다가 갑자기 없어지니까 집이 너무 넓어 보이더라고요. 겨울에 예년처럼 보일러 온도를 맞췄는데 추운 거예요. 왜 그런가 했는데, 사람의 온기가 없어져서 그랬나 봐요.”

서유석이 처음 밝힌 “기러기 아빠 생활 3년 & 방송생활 30년 뒷얘기”

서유석은 지난해부터 가수 활동에 주력하고 있다.


자녀들을 말레이시아로 보내기는 했지만, 흔히 말하는 조기유학 열풍에 편승한 것은 아니라고 한다.
“이곳에 있을 때 큰아이의 학교 성적표를 받아보면 100점 아니면 0점이었어요. 자기가 좋아하는 과목은 열심히 하는데 싫어하는 과목이나 선생님이 싫은 과목은 공부를 전혀 안 해요. 툭하면 수업시간에 책가방을 싸들고 집으로 오기 일쑤여서 아이 엄마가 학교에 가서 빌기 바빴어요. 중학교 1학년 때는 학생들을 선동해 수업 거부를 하기도 하고…. 그래서 캐나다로 보냈는데 거기선 너무너무 잘 지내는 거예요.”
그런데 그는 1년6개월 후 학교에 잘 다니고 있던 큰아이를 말레이시아의 학교로 옮겼다.
“둘째가 언니랑 같이 공부하고 싶은데 꼭 김치를 먹는 나라에서 공부하고 싶대요. 그래서 여기저기 알아보다 선택한 게 말레이시아예요. 우리나라 사람들이 잘 몰라서 그렇지 그곳은 물가가 훨씬 싸면서도 교육환경이 훨씬 좋아요. 학교도 미국학교와 영국학교가 많아 졸업 후 미국이나 영국의 대학으로 진학하기도 수월하고요. 학비가 한달에 1백만원가량 드는데 전 싼 편이라고 생각해요. 미국이나 캐나다보다 싼 것은 물론이고, 우리나라와 비교해도 과외비와 생활비를 생각하면 적게 드는 편이죠.”
가족에 대한 그리움 때문일까, 가수 활동을 재개한 요즘 그의 메시지는 가족과 사랑이다.
“역시 인생의 마지막 귀착점은 사랑이더라고요. 연인간의 사랑, 동료간의 사랑, 가족간의 사랑…. 그 중에서도 가족간의 사랑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사회의 최소단위는 가족이잖아요. 가족이 건강하고 튼튼해야 사회가 건강해져요.”
노래로 가족사랑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기타를 어깨에 둘러메고 무대에 오르는 그의 뒷모습이 듬직해 보였다.

여성동아 2004년 8월 48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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