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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이 여자의 당당한 고백

담배 피우다 혹독한 대가 치른 체험 바탕으로 ‘흡연 여성 잔혹사’ 펴낸 칼럼니스트 서명숙

“한국 여성에게 흡연할 자유와 금연할 자유를 허하라!”

■ 기획·최호열 기자 ■ 글·박윤희 ■ 사진·정경택 기자

2004. 07. 12

한국사회에서 여성이 담배를 피우면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잔인하고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 27년 동안 담배를 피우다 지난해부터 금연을 한 칼럼니스트 서명숙씨가 털어놓은 흡연의 자유는커녕 금연의 자유조차 없는 대한민국 여성들의 담배에 관한 이야기.

담배 피우다 혹독한 대가 치른 체험 바탕으로 ‘흡연 여성 잔혹사’ 펴낸 칼럼니스트 서명숙

“제애인요? 27년간 뜨거운 사랑을 했죠. 그러면서도 호시탐탐 어떻게 하면 벗어날 수 있을까 궁리를 했어요. 내 한 생애를 애인한테 다 빨린 것 같은 기분이어서 정말 지긋지긋 했거든요.”
애정의 크기만큼 증오의 그림자도 끈질긴 것일까. 오래된 연인과 이별을 고한 칼럼니스트 서명숙씨(47·전 ‘시사저널’ 편집장)의 ‘애증’은 예상보다 수위가 높았다. 그런데 그의 오래된 연인은 남자가 아니다. 그가 한때 눈에 콩깍지가 씌어 ‘마법의 풀’이니 ‘영적인 카리스마’니 하는 말로 예찬을 했던 ‘담배’다.
“이 책을 통해 ‘금연’을 말하고 싶었어요. 저도 5년에 걸쳐 금연을 시도했다가 실패하기를 반복하다가 드디어 지난해 1월1일부터 지금까지 담배를 안 피우고 있거든요.”
최근 그는 에세이집 ‘흡연 여성 잔혹사’를 통해 담배와 얽히고설킨 파란만장한 스캔들(?)을 폭로해 화제를 모으고 있다.
“흡연 여성, 비흡연 여성들의 반응이 제각각이에요. 주변에 담배 피우는 친구들은 ‘배신 때렸다’는 분위기예요. 특히 건축가 김진애씨는 담배를 맛있게 피우는 여자로 유명한데 제 책을 보더니 ‘금연 운운하는 게 짜증난다’고 해요(웃음). 반면 비흡연 여성들은 ‘책을 보다가 흡연 욕구를 느꼈다’고 말하더군요.”
그런데 더 흥미로운 것은 남자들의 반응이다.
“젊은 남자나 나이 든 남자 할 것 없이 ‘한국에서 여자들이 담배 피우는 것 자체가 그렇게 힘든 일인 줄 몰랐다’며 놀라더군요. 남자들이야 담배 하나가 별 것 아니지만 여자들이야 어디 그런가요?”
‘흡연 여성 잔혹사’는 담배를 통해 페미니즘을 해석한 책이다. 책 제목 그대로 한국사회에서 여성이 담배를 피운다는 행위는 잔인하고 혹독한 대접을 불러온다는 사실을 그는 자신의 흡연사를 통해 고발하고 있는데, 기자가 “아직도?” 하고 반문하자 그는 “여전히!”라고 응수한다.
“인터넷 금연사이트에 들어온 주부들과 이야기를 해보면 ‘누군가 베란다를 엿보고 있는 것 같다’ ‘남편이 흡연 사실을 알면 끝장난다’ ‘시집에서 알까 늘 불안하다’고 하소연해요. 흡연 여성에게는 20세기에 이어 21세기에도 여전히 ‘주홍글씨’가 새겨지고 있어요.”
별 것도 아닌 담배 하나 때문에 수난당하는 한국 여성들의 모습은 한편의 코미디 영화를 연상시킨다.

여자가 담배 피운다고 술집에서 남자들에게 맞은 적도 있어
우선 그의 ‘흡연 잔혹사’부터 살펴보자. 그는 대학 1년 때 그가 몸담고 있는 대학신문사 여자 선배의 권유로 첫 담배를 입에 물었다.
“박정희 정권이 유신헌법으로도 모자라 위수령을 선포한 이듬해라 사회 전반이 얼어붙어 있었죠. 그때 담배는 제가 순종적인 여성이 아님을 드러내는 표식이었고, 남자들에게 내지르는 주먹이었죠. 영혼을 자유롭게 해방시키는 깃발 같았다고 할까요.”
대학 2학년 때 그의 흡연 잔혹사를 알리는 예고탄이 터졌다. 겨울방학을 이용해 고향인 제주도에 내려온 그는 아버지한테 흡연 모습을 딱 걸리고 말았다.
“그날 저는 아버지와 텔레비전에서 생중계되는 세계 체조선수권대회를 보고 있었어요. 체조 요정 코마네치의 현란한 기술을 보고 있는데 담배가 너무 피우고 싶은 거예요.”

담배 피우다 혹독한 대가 치른 체험 바탕으로 ‘흡연 여성 잔혹사’ 펴낸 칼럼니스트 서명숙

‘흡연 여성 잔혹사’에 실린 흡연 여성의 비애를 풍자한 카툰.


그때만 해도 화장실에서 몰래 흡연을 했던 그였건만 화면 속의 코마네치가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더구나 날씨까지 추워 한참 동안 담배를 참을까, 나가서 피울까 망설이는데 아버지가 베개 위로 머리를 툭 떨어뜨리시는 게 아닌가! 그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아버지의 눈앞에다 대고 두 팔을 휘저어봤다.
“그때만 해도 흡연 초보자였는데 아버지의 숙면을 방해할까봐 자세를 한껏 낮추고 가슴 깊이 담배 연기를 들이마시고, 폐 속에 한참 가두었다가 조금씩 내보냈어요. 마치 스릴 서스펜스 영화를 찍는 기분이었죠.”
폭탄은 다음날 떨어졌다.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명숙이가 안방에서 버젓이 담배를 피우는데 한두 번 피워본 솜씨가 아니더라’며 노발대발한 것이다.
“변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한두 번 피웠다고 둘러댔죠. 어머니가 다음날 바로 변비 특효약을 한아름 사다 주시더라고요.”
그의 어머니는 변비약을 안겨주는 것으로 그쳤지만, 잠든 척하고 딸의 흡연 장면을 목격한 아버지는 그날 이후 그에게 눈길 한번 제대로 주지 않았다고 한다.
흡연의 긴 꼬리는 장차 시어머니가 될 분 앞에서도 밟혔다. 대학 3학년 때 남자친구의 집에 놀러 간 그는 예비 시어머니가 과일을 깎으러 부엌에 간 틈에 몰래 흡연을 시도했다. 그런데 예상보다 일찍 예비 시어머니가 남자친구의 방문을 노크했고 당황한 그는 피우던 담배를 남자친구에게 넘겨주긴 했으나 이미 입 안에는 담배 연기가 한가득 담겨 있었다.
“제가 평소에 인사성이 밝거든요. 어머니가 저에게 과일접시를 건네는데 제가 순간 ‘아이고, 감사합니다’ 하고 말하는 동시에 하얀 연기가 입에서 술술 나오는 거예요. 그야말로 황당 엽기죠.”
이 정도면 귀여운 수난이다. 진짜 흡연 여성 잔혹 사건은 집 밖에서 벌어졌다. 그는 대학 3학년 때 학교 앞 술집에서 동아리 친구들과 술을 마시며 담배를 피우다가 남자들한테 린치를 당한 경험도 있다.
“술집에 있던 몇몇 남학생들이 ‘감히 여자들끼리 모여 담배나 피워대느냐?’며 제 친구 얼굴을 향해 술잔을 집어던졌어요. 제 친구는 말 한마디 없이 빈 술잔에 술을 따랐고 문제의 남학생들 쪽으로 가서 그들의 머리 위로 골고루 술을 부어주었죠. 그때부터 남자들의 무지막지한 폭행이 시작되었고 술집은 아수라장으로 변했어요.”
그때 담배를 피운 ‘나쁜 여자’들은 밤새워 엉엉 울었고 이 가운데 한 친구는 폭행사건의 충격 때문인지 졸업 후 곧바로 비구니가 되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하는 대목에서 그는 잠시 긴 한숨을 쏟아냈다.
“군사정권과 가부장제 문화가 결합된 가장 보편적인 여성 탄압 사례예요. 그때가 다른 어떤 시대보다도 남자들이 여자들에게 군림하던 때였으니까요. 더군다나 남자들의 전유물이라고 생각되는 담배를 여자들이 피우니까 폭력적으로 돌변했던 것이죠.”
이처럼 담배에 얽혀 있는 아픈 인연과 사연 때문에 그는 책을 집필하는 중간 몸이 심하게 아팠다고 한다.
“학생운동 하면서 겪었던 일을 생각하니까 가슴을 쥐어뜯고 싶을 정도로 괴로웠어요. 책을 다 쓰지도 않았는데 거의 탈진 상태에 빠졌어요.”

담배 피우다 혹독한 대가 치른 체험 바탕으로 ‘흡연 여성 잔혹사’ 펴낸 칼럼니스트 서명숙

서명숙씨는 여기자 출신으로 페미니즘 운동에 앞장서왔다.


그에게는 천지가 개벽을 해도 잊기 힘든 지옥의 한순간도 있었다. 79년 대학 4학년이던 그가 모교에서 교생실습을 하기 위해 제주도 집에 머물고 있을 때였다. 어느 날 형사들이 집에 들이닥쳤고 그는 ‘구국학생동맹’사건에 연루돼 서울로 압송되었다. 눈이 가려진 채 쥐도 새도 모르는 곳으로 끌려간 그는 몸수색을 당했다. 그의 등에 매달린 배낭에서는 시집, 지갑, 어머니가 싸준 밑반찬이 쏟아져 나왔고 마지막으로 청자 담뱃갑과 성냥이 굴러떨어졌다. 순간 수사관들의 눈빛이 싹 변하더니 그의 눈에 번갯불이 번쩍 했다.
“한 남자가 대뜸 따귀를 올려붙이더니 ‘이년들이 다 이렇다구. 갈보들처럼 담배나 뻑뻑 피워대면서, 뭐 나라 걱정한다구? 네년들이나 똑바로 해!’ 그러더라고요. 남학생들은 경찰서에 잡혀가면 형사들이 맨 먼저 권하는 게 담배인데 여학생들은 그걸 갖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따귀를 맞아요. 그때 맞으면서 이 땅에서 남녀가 얼마나 다른 존재인가를, 여자가 이 땅에서 담배를 피우면 어떤 대가를 치르게 되는가를 쓰라리게 느꼈어요.”
이때의 악몽은 8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도 ‘담배 감추기’ 형태로 재현됐다. 그가 낮에는 갓난애를 돌보는 초보주부로 밤에는 자유기고가로 일하며 바쁘게 살던 87년이었다. 갑자기 집에 형사들이 들이닥쳐 ‘문을 열라’며 대문을 부술 듯이 두드려댔다. 당시 남편이 인천에서 노동운동을 하고 있던 터라 그는 벌벌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증거물이 될 만한 것들을 없애 나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처구니없게도 그가 제일 먼저 치운 물건은 담배와 라이터, 그리고 재떨이였다.
“대학 때 경찰서에서 당한 일 때문에 그런 행동이 무의식중에 나온 것 같아요. 제가 생각해도 한심하기 짝이 없는 일이어서 그날 형사가 가고 난 후 온몸의 맥이 탁 풀리더라고요.”
그가 아는 다른 흡연 여성들의 처지도 그의 경우와 별반 다르지 않다. 그가 잘 아는 아나운서 A씨는 다른 사람들의 구설에 오르기 싫어 차 안에 혼자 있을 때만 몰래 흡연을 한다고 한다. 어느 날 A씨는 운전중에 신호대기가 길어져 담배를 한대 피웠다. 때마침 경찰 한명이 저만치 앞쪽에서 주차단속을 하고 있었다. 이때 A씨는 담배를 끄고는 단속경찰 앞에 차를 세웠다. 그리고 경찰에게 이런 말을 건넸다.
“저 안 피웠는데요.”
이 밖에도 운전중 담배를 피우다가 경찰이 나타나자 해 가리개에 대고 담뱃불을 비벼 껐다는 여자, 경찰 보고 놀란 가슴에 조수석 가죽시트에 담뱃불을 꺼 산 지 두달 만에 가죽시트를 갈았다는 여자, 그리고 시집 화장실에서 흡연을 하다 불을 내고 시어머니에게 들킨 여자도 있다.
“여성 흡연을 안 좋은 시각으로 보니까 커밍아웃을 안 해서 그렇지 굉장히 많은 주부들이 몰래 흡연을 하고 있어요. 더군다나 남몰래 피워야 되니까 시간 될 때 한꺼번에 담배를 서너 대씩 몰아 피우는 ‘체인 스모커’로 발전해요.”

담배 피우다 혹독한 대가 치른 체험 바탕으로 ‘흡연 여성 잔혹사’ 펴낸 칼럼니스트 서명숙

서씨는 금연을 위해 5년 동안 처절하게 몸부림을 쳤다며 웃었다.


‘빨래는 햇볕에 널어 말려야 한다’는 것이 일단 금연에 성공한 그의 지론인데 흡연 여성들은 흡연 남성들에 비해 공개 금연 또한 힘들다.
“금연을 공개적으로 해야 격려도 받고 제재도 받으면서 담배를 끊게 되는데 몰래 흡연하는 주부가 어떻게 주변 사람들에게 금연 선언을 할 수 있겠어요? 그래서 저는 앞으로 흡연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 ‘금연 강연회’를 열어보고 싶어요.”
여성들이 ‘흡연할 자유’와 ‘금연할 자유’를 가로막지 말라는 것이 그의 주장인 만큼 함께 흡연했던 친구들이 아무리 그를 변절자 취급해도 그는 당당하게 ‘금연 잔혹사’ 또한 밝힌다.
“‘시사저널’에서 일할 때 제 별명이 ‘부터 서’였어요. 개천절부터 금연한다, 설날부터 금연한다 그러면서 매번 실패하니까요. 금연에 왕도는 없지만 담배가 생각날 때 자주 물을 마시고 운동하고 반신욕을 하니까 도움이 되더군요. 지금 담배를 안 피우는 것도 지난 5년 동안 처절하게 몸부림친 결과예요.”
얼마 전 그의 친정아버지가 암으로 돌아가셨다. 그런데 문상 온 지인들이 위로의 말 뒤에 “앞으로 맨얼굴로 다니세요. 훨씬 보기 좋아요” 그러더라는 것.
“초상집에 어울리는 인사말이 아닌데 오래간만에 본 사람들이 그런 말을 하더라고요. 평소 진한 화장도 안 하고 다니는데…. 금연의 효과죠.”
국내 여기자 1세대로 당시 남자들만 빽빽한 언론계에서 마치 ‘여자 타잔’처럼 밀림을 넘나들며 불모지를 개척한 서명숙씨. 월간 ‘마당’ ‘한국인’ 등을 거쳐 시사주간지 ‘시사저널’ 정치파트 기자, 정치팀장, 편집장을 해오는 동안 어쩌면 담배는 그에게 사회생활의 숱한 굴곡을 이겨내게 만든 필요악이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는 27년간 사귄 애인과 깨끗이 결별했다. 그동안의 구속과 집착이 지겨워 우연한 재회조차 꿈꾸지 않는다. 무엇보다 애인이 새로 생겼다. 새 애인의 이름은 ‘욕’이다.
“여성에 대한 문화적·정치적·사회적 금기 중 하나가 욕이잖아요. 저는 원래부터 담배 잘 피우는 것 못지않게 욕도 예술적으로 잘해요. 분노의 표현방식 중 하나가 욕인데 한국 여성들은 욕이라는 금기에 묶여 있어요. 다음번에는 욕을 주제로 책을 써서 여성들의 품위를 손상시키지 않으면서 욕으로 상대방을 제압할 수 있는 비결을 알려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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