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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leb 이 여자의 삶

국내 최초로 말단직 주부사원 출신으로 대기업 임원에 오른 장계원

“사표 쓸 때 가족 핑계 대지 말라는 아들 말에 이를 악물었어요”

■ 글·최호열 기자 ■ 사진·김형우 기자

입력 2004.02.10 14:19:00

두 아이를 키우다 서른이 넘은 나이에 뒤늦게 주부사원으로 입사, 대기업 임원 자리에까지 오른 CJ GLS 장계원 이사. 그가 들려준 드라마틱한 주부 취업 성공기 & 그동안 가슴에 묻어두었던 아픔.
국내 최초로 말단직 주부사원 출신으로 대기업 임원에 오른 장계원

채용정보업체 인크루트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우리나라 1백대 대기업 중에서 여성 임원이 있는 기업은 17개사로 약 20명에 불과하다. 그나마 처음부터 임원으로 영입되었거나 박사학위 이상의 전문가들 일색이다. 그런데 지난 1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말단 사원 출신의 대기업 여성임원이 탄생했다. 제일제당 계열사인 물류서비스사 CJ GLS 이사에 오른 장계원씨(53)가 그 주인공.
더구나 장이사는 전업주부로 두 아이를 키우다 뒤늦게 입사한 주부사원 출신이어서 그의 성공은 주부들에게 특별한 의미로 다가온다. 전업주부에겐 희망을, 일하는 주부에겐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준 것.
“저도 82년 삼성에 입사하기 전까진 다른 주부들과 똑같은 길을 걸어왔어요. 우울증을 앓기도 했고요.”
73년 대학을 졸업한 그는 곧바로 부산에 있는 중학교 영어교사로 발령을 받으며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당시만 해도 교사는 여성에게 최고의 직업. 하지만 그에겐 고역이었다. 6개반을 가르치다 보니 매번 교실만 바뀔 뿐 똑같은 이야기를 앵무새처럼 반복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던 그에게 도피처가 생겼다. 결혼이었다. 15개월 터울로 큰아들 혁수(29)와 둘째딸 희정(27)이 태어나면서 그는 육아를 핑계삼아 3년 만에 교사직을 그만두고 전업주부로 돌아섰다.
“거의 연년생으로 낳다 보니 쌍둥이를 키우는 것과 똑같았어요. 정말 아무 생각할 겨를도 없이 아이들만 키웠죠. 돌아서면 기저귀가 산처럼 쌓이고 돌아서면 젖병이 쌓였으니까요. 하루종일 세수도 안하고 지낸 적도 많았어요. 아파도 꼭 같이 아파요. 동시에 우유 토하고, 동시에 열나고, 동시에 설사하고….”
육아로 인해 쌓이는 스트레스를 남편에게 풀었다. 아무것도 아닌 일로 시비를 걸고, 싸우고, 그러다 울고…. 무작정 집을 뛰쳐나갔다가 갈 곳이 없어 놀이터에서 몇 시간이고 앉아 있었다. 집에 있을 때도 틈만 나면 지도책을 펴놓고 ‘어디로 도망갈까’ 생각하며 하염없이 들여다보았다.
그렇다고 아이들이나 남편에게 어떤 불만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서울대를 나와 유학까지 다녀온 후 공기업에 다니는 남편이었으니 남부러울 것 없었다. 월급이 적은 것도 아니었고, 남편에게 어떤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자신의 현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결혼 후 아이 낳고 우울증 앓다 서른한살에 다시 사회생활 시작
“나중에 제가 다시 직장에 다니고 집안일을 거의 못해도 남편은 아무 불평도 하지 않았어요. 심지어 다리지 않은 와이셔츠를 입고 다니면서도 불평 한마디 안했어요. 5년 동안 그렇게 심했던 우울증과 스트레스가 직장생활을 하면서 딱 없어졌으니 그럴 수밖에요.”
남편을 따라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온 그는 다시 일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지방대학 출신에 아이 딸린 전업주부가 취직하기란 하늘에 별따기였다. 그래도 희망을 버리지는 않았다. ‘취직을 하는 데 도움이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3년 동안 타임지를 구독하고, 영어 학원에도 나갔다.
“학원에 다니려면 아이를 맡겨야 하는데 맡길 데가 없었어요. 그래서 학원에 갈 때 아이들에게 먹을 것 주고 밖에서 문을 잠가놓고 가곤 했어요.”

국내 최초로 말단직 주부사원 출신으로 대기업 임원에 오른 장계원

장을 직접 담그는 장이사는 주말에 일주일치 장을 한번에 보는 나름의 살림법을 가지고 있다.


‘공부를 하다 보면 기회가 오겠지’ 하는 막연한 기대감은 그의 나이 만 서른을 넘기면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대학원에 갈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나도 대학밖에 안 나왔는데 너를 어떻게 대학원 공부를 시켜주냐”는 남편의 말에 그마저도 접어야 했다. 남편은 아내가 밖으로 나돌기보다는 집에서 아이들을 잘 키워주기를 바라는 전형적인 경상도 사나이였다.
그러던 어느 날, 신문에 난 조그만 기사가 눈에 확 들어왔다. 삼성그룹의 기혼여성 공채에 수천명의 여성들이 몰렸다는 기사인데, 마감이 바로 다음날이었다. 그는 부랴부랴 대구에 있는 친정어머니에게 전화를 해서 졸업증명서와 성적증명서를 떼어 고속버스편에 보내달라고 하고, 그날 밤에 자기소개서와 이력서를 써서 다음날 아침 일찍 삼성본관으로 갔다.
“여성 지원자들로 삼성본관이 발 디딜 틈도 없더라고요. 도저히 이력서를 제출할 용기가 나지 않았어요. 그래서 인근 백화점에 가서 쇼핑도 하고, 점심도 사 먹으면서 갈등을 했어요. 그러다 오후 3시쯤 용기를 내서 다시 접수창구에 가보니까 사람들은 다 돌아가서 없고 직원들만 남아 서류를 정리하고 있더라고요.”
이력서를 제출하자 담당 직원이 쭉 훑어보더니 “오전에는 이 정도 경력이었으면 돌려보냈는데 마지막이니까 받아줍니다” 하며 서류를 받아줬다.
“너무 쟁쟁한 이력의 지원자들이 많다고 해서 별 기대도 안했어요. 그런데 지원자 수천명 중에서 2백명이 서류전형에 합격했는데 제 이름도 있더라고요.”
그는 내처 33명의 최종합격자에 들며 꿈에 그리던 재취업에 성공했다. 물론 그때까지만 해도 이렇게 오랫동안 다닐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고 한다.
“유치원 다니는 아이들을 떼어놓고 회사에 출근했으니 저도 참 강심장이었죠. 처음에 남편은 방관자적 입장을 취하더라고요. ‘네가 얼마나 다니겠냐’는 생각이었겠죠. 저도 동기 중에 제가 마지막까지 남을 줄은 몰랐어요.”
다시 시작한 사회생활은 그리 녹녹하지 않았다. 주부라고 배려해주는 것이 없었다. 게다가 교사생활을 할 때는 느끼지 못했던 남녀 차별도 느껴야 했다. 손님이 오면 커피 심부름은 당연히 그의 몫이었다.
“처음엔 기분이 상했는데 다시 생각해보니까 ‘그럼 우리 집에 손님이 오면 내가 갖다주지 누가 갖다줘’ 싶더라고요. 이왕 하는 거 기분 좋게 하자고 생각했죠. 그래서 직접 타주면서 ‘커피 맛이 어때요’ 하고 웃으면서 말하니까 상대방도 좋아하죠.”
여자라는 이유로 그에게는 자잘한 업무만 맡겨졌다. 첫달은 복사만 하다 지나갔고, 다음달부터 텔렉스를 치는 일을 했다. 다른 업무 역시 나중에 생각해보면 시간이 날 때 해도 되는 일들이었다. 그래도 그는 중요한지 어떤지도 모른 채 최선을 다했다. 남자 직원이 오후 9시까지 일하면 같이 그때까지 남아서 일을 했고 입사 이후 지금까지 생리휴가 한번 써본 적이 없다. 아이가 30℃가 넘는 고열에 시달리며 정신을 차리지 못할 때도 매몰차게 회사에 출근했다.

‘열심히 일해서 회사가 나를 필요로 할 때 떠나리라’ 결심

그러던 중 제일제당에서 해외지사를 늘리는 업무를 맡았다. 그는 이 일에 열심히 매달렸고, 그의 손으로 제법 많은 해외지사가 만들어졌다. 당시로서는 드물게 중개무역을 통해 수익을 늘리기도 했다. 그는 마음속으로 ‘이 정도면 과장을 달겠구나’ 싶었다. 하지만 과장 진급 소식은 요원했다. 남자 후배가 과장이 되어 그의 상사로 오기도 했고, 과장이 되지 못한 남자 동료 직원들은 모두 나가고 없었다. 어느새 그의 나이 마흔을 바라보고 있었다. 남들보다 일은 더 잘하는 것 같은데 진급이 계속 늦어지니 조바심이 났다.
“그때 정말 사표를 수없이 썼다 찢었다 했어요. 울기도 많이 울었죠. 전 슬픈 땐 안 울어요. 억울할 때 울지. 그때 인사팀장이 늘 하는 말이 ‘된다면 제일 먼저 될 텐데’였어요. 여자라서 안된다는 거였죠. 심지어 어떤 사람으로부터는 노골적으로 ‘우리 회사에 여자 간부는 필요없다. 당신이 외국 바이어 만나 술 마시고 사우나 갈 수 있느냐’는 말까지 들었어요. 그때는 정말 힘들었는데 시간이 지나니까 저보다 먼저 승진한 사람들이 제 뒤에 있더라고요(웃음).”



국내 최초로 말단직 주부사원 출신으로 대기업 임원에 오른 장계원

삼성그룹 주부사원으로 입사해 CJ GLS 이사에 오른 장이사는 취업을 꿈꾸는 주부들에게 꿈을 주었다.


94년 그에게 뜻밖의 발령이 났다. 과장으로 승진하기는 했는데 물류팀으로 보내진 것이다. 당시 물류팀은 영업 업무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는 직원이 가는 곳이라고 할 만큼 한직이었다. 게다가 그는 물류는커녕 영업 경험도 없는 여자였다. 일주일간이나 발령부서로 가지 않고 삼성본관으로 출근하며 항의 표시를 했다. 그러면서 사표를 써야겠다고 마음을 굳히고 가족에게 뜻을 내비쳤다. 그랬더니 고등학생이던 큰아들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초등학교 다니면서 미술숙제를 놓고 가서 점수가 나쁘게 나온 적도 있고, 책가방은 놓고 도시락만 들고 학교까지 갔다가 되돌아온 적도 있었어요. 엄마가 정말 필요했을 때는 일만 하고 사셨지요. 이제 다 커서 혼자 할 수 있는데 가족을 위해 돌아오신다고요? 엄마 스스로 그만두는 건 모르지만 우리 때문에 그만둔다는 말은 하지 마세요.”
정신이 확 들었다. 처음엔 무척 서운하고 섭섭하게 생각되었지만 맞는 말이었다. 아들의 이 말은 현실을 도피하려는 그에게 다시 한번 이를 악물게 하는 자극이 되었다.
일주일이 지나자 물류팀 부장이 ‘왜 안 오느냐’며 직접 와서 그를 데려갔다. 삼성본관을 떠나면서 그는 결심했다고 한다. ‘내가 열심히 일해서 회사가 나를 필요로 할 때 회사를 떠나리라’ 하고.
물류팀에서도 여자라는 이유로 텃세가 심했다. 과장인데도 과장회의에 부르지 않았다. 그렇다고 물러설 그가 아니다. 그는 회의 시작하기 10분 전에 먼저 자기 의자를 들고 회의실로 들어가 앉았다. 자존심이 상해 속울음을 울기도 했지만 그는 지지 않겠다며 입술을 깨물었다.
물류팀으로 난 발령이 그에겐 전화위복이었다. 끊임없이 새로운 일을 개척하려는 그의 코드와 물류 업무가 딱 맞아떨어졌던 것이다. 물류는 현장부터 알아야 하는 일이었기에 그는 신입사원처럼 열심히 뛰어다녔다. 남자 직원들과 야근을 하며 함께 라면을 끓여먹고, 회식 자리에도 빠지지 않았다. 술을 한잔 걸치면 욕도 한두 마디 뱉어가며 거친 물류 업무를 익히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그는 주문물량을 팩스로 받은 후 다시 전화로 확인하는 번거로운 절차를 효율화하기 위해 물류시스템을 구축했다. 모뎀을 이용해 온라인으로 정보화 시스템을 만든 것. 이를 위해 전국의 안 돌아다닌 창고가 없을 정도였다.
“보통 창고가 외진 곳에 많이 있잖아요. 마땅히 잘 때도 없어 식당의 방을 빌려서 자기도 했고, 작은 모텔에 젊은 남자직원들과 함께 들어가면 사람들이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기도 했어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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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장으로 승진한 뒤 다른 기업의 물류 일을 따내기 위해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하면서 일주일간 잠도 자지 않고 남자 상사들과 함께 작업할 때였다. 갑자기 한 상사가 불쑥 말했다. “아니, 당신이 여자요?” 하지만 남성들의 시각은 참으로 이율배반적이다. 한번은 술을 심하게 마셔 길거리에서 구토까지 했다. 그랬더니 당장 “아니, 여자가 말이야” 하는 말이 튀어나왔다.
“남자 직원들과 함께 치열하게 일하되, 여성으로서의 품위를 잃지 않아야 한다는 걸 느꼈어요. 그래서 직장 다니는 여성은 더 힘든 것 같아요.”
남자들은 흔히 직장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가정을 포기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살림을 맡아 하는 주부이기도 하다. 가정부를 두지도 않는다. 그만의 살림 노하우는 토요일에 장을 봐서 일주일 식단을 만들어놓는 것이다. 그리고 주말은 가족에게 충실하려고 노력한다. 이를 위해 부장급 이상이 되면 영업을 위해서라도 주말이면 골프 치러 필드에 나가야 하지만 기꺼이 포기했다.
“토요일이면 대형할인점에 가서 장을 보는데 회사에서 출발하는 순간 무엇을 살지, 어떻게 동선을 잡고 움직여야 물건 사는 시간을 줄일 수 있는지 머릿속에 그려요.”

국내 최초로 말단직 주부사원 출신으로 대기업 임원에 오른 장계원

장이사는 일할 때는 여자라는 사실을 잊는다고 말한다.


그는 또한 지금도 장을 직접 담가 먹는다. 12월 중순, 사장으로부터 임원승진을 통보받고 이틀 후엔 주말을 이용해 직접 김장을 하기도 했다. 그의 절대적인 응원군은 시어머니다.
“어머니가 저를 많이 이해해주고 격려를 하시죠. 연세가 많으시지만 정정하셔서 소일거리 삼아 재활용 쓰레기 분류 같은 것을 해주시는데 저에겐 큰 도움이 되죠.”
남편은 어떻게 외조를 하느냐고 묻자 “주말부부 생활을 한 게 도움이 되었다”며 흉을 본다.
“직장이 지방이라 주말에만 올라왔어요. 그런데 제가 나가서 힘들게 일하고 돌아와도 자기 밥상은 항상 제가 차려주어야 해요. 그것 때문에 많이 싸우기도 했는데 지금은 포기했어요. 수건도 쓴 자리에 그냥 두는 사람이니까요. 차도 안 닦아요. 그러면서 ‘다른 사람들은 다 여자가 차를 닦는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도 전에는 주말마다 제가 내려가곤 했는데 나중엔 나이가 드니까 그것도 힘들고 귀찮아서 한달에 두세 번 볼까 말까 했어요(웃음).”

성장과정에서 엄마의 무심함에 상처받은 아이들에게 미안함 느껴
그는 아이들에게는 미안한 마음이 많다고 했다. 심지어 아이들이 사춘기였을 때는 그가 과장 승진이 안돼 한창 방황할 때여서 아이들이 사춘기였는지도 모른 채 지나갔기 때문이다. 다행히 아이들이 삐뚤어지지 않고 자랐다. 큰아들은 서울대 회계학과를 졸업한 후 현재 삼일회계법인에 다니고 있고, 둘째딸은 경원대를 졸업하고 웹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다.
“큰아이가 고3 때였어요. 출장을 갔는데 학교에서 전화가 왔어요. 수능 모의고사를 보다가 졸도를 했다고요. 놀라서 학교로 갔더니 큰아이 말이 ‘시험을 보는데 모르는 문제가 나오니까 앞이 캄캄해지면서 그 다음부터는 기억이 없다’고 하더군요. 그때 담임에게 얼마나 혼났는지 몰라요. 고3인데 이렇게 신경을 안 쓰면 어떡하냐고. 총명탕을 먹이라고 하는데 전 그게 뭔지도 몰랐어요. 지금은 웃으면서 이야기하지만 그래도 부모인데 아이가 졸도할 정도로 무신경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아펐죠.”
그는 아이들을 어려서부터 자기 일은 스스로 하도록 키웠다. 숟가락질을 하면서부터는 아무리 느리게 먹어도 절대 떠먹여주지 않았다. 학교 다닐 때는 아이들 스스로 도시락을 씻어놓고, 때로 아침에 직접 도시락을 싸서 학교에 갈 정도였다.
“그래서 그런지 큰아이는 냉철하다 싶을 만큼 독립적이에요. 반면 작은아이는 엄마에게 불만이 많았어요. 어려서 저에게 하는 말이 ‘집에 있는 아줌마들도 다 똑똑한 사람들이에요. 엄마만 잘난 것 아니에요. 내 꿈은 아무것도 안하고 집에 가만히 있는 거예요’ 그러는 거예요. 한창 엄마가 필요할 때 엄마가 없는 것이 상처였던 것 같아요. 하지만 이젠 친한 친구처럼 지내요. 엄마를 많이 이해하고요.”
이야기를 마치며 그는 자기처럼 일하는 주부들에게 한가지 조언을 했다.
“결혼한 후배들에게 항상 ‘자기 자신을 극복하라’고 충고해요. 흔히 아이 때문에, 남편 때문에, 시집 때문에 일을 그만둔다고 말하지만 사실 문제는 자기 자신에게 있거든요.

여성동아 2004년 2월 48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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