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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leb 애틋한 사연

고생 끝에 낙이 오자 홀연히 세상 뜬 아내를 향한 김용석 청와대 비서관의 눈물 젖은 사부곡

“결혼생활 20여년 만에 처음 받아본 생활비1백만원에 감격하던 아내의 얼굴이 지금도 눈에 선해”

■ 기획·구미화 기자 ■ 글·김기영 ■ 사진·정경택 기자

입력 2003.08.08 13:45:00

최근 김용석 청와대 비서관의 아내 안순분씨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올해 초 남편이 청와대에 입성해 첫 월급을 받아오자 아이 같이 좋아한 아내였다.
80년대, 명문대 출신 노동운동가와 노동자로 처음 만나 부부이자 동지로 순탄치 않은 길을 걸어온 두 사람의 가난했지만 행복했던 지난 날을 취재했다.
고생 끝에 낙이 오자 홀연히 세상 뜬 아내를 향한 김용석 청와대 비서관의 눈물 젖은 사부곡

지난 7월2일 오전 5시45분, 김용석 청와대 인사혁신비서관(54)은 아내 안순분씨(50)의 배웅을 받으며 여느 때처럼 집을 나섰다. 인천시 부평구 부평공원묘지 부근, 전세 2천5백만원짜리 허름한 연립주택을 나서 전철과 버스를 갈아타며 1시간을 달려 청와대에 도착한 시각이 7시경, 김비서관은 평소처럼 샤워실에 들러 세수를 하고 구내식당에서 아침식사를 했다. 그리고 사무실로 돌아와 그날의 일정을 살피며 업무준비를 했다.
청와대 직원들에게 이날은 특별한 날이었다. 오전 8시 반부터 노무현 대통령이 참석하는 직원조회가 예정돼 있었기 때문이다. 조회장으로 가면서 김비서관은 휴대전화를 껐다. 9시반, 조회가 끝난 뒤 휴대전화를 다시 켜자 대학생인 큰아들의 다급한 메시지가 남겨져 있었다. 아들과 바로 연결되는 통화 버튼을 누르자 아들이 울먹였다.
“어머니가 위독해요. 지금 모시고 병원에 도착했는데 의사 말이 가망이 없대요.”
눈앞이 캄캄했다. 오늘 아침까지도 멀쩡하던 아내가 아닌가. 그런데 가망이 없다니, 도대체 무슨 날벼락 같은 소리인가. 택시를 잡아타고 아내가 입원해 있다는 인천 길병원까지 달려가는 동안 그는 내내 ‘아파서 잠시 의식을 잃었을 뿐 아내에게 다른 일이 생긴 것은 아닐 거야’라고 되뇌었다.
병원에 도착했을 때 그를 맞이한 건 아내가 이미 이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이야기였다. 아내의 사망원인을 설명하는 의사의 목소리가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했다.
“집사람 얼굴을 보고 싶습니다.”
그는 간신히 입을 열어 이렇게 말했다. 22년을 함께 살아왔건만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는 자괴감이 그를 엄습했다. 영안실에서 만난 아내는 출근 전 보았던 얼굴 그대로였지만 이미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잘 다녀오라”며 밝게 웃던 그 사람에게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을까. 사망 원인이 급성 심장마비라고 하는데 갑자기 일을 당할 만큼 평소 건강이 나빴던 사람도 아니다. 몇년 전인가 부정맥이라는 진단을 받기는 했지만 부정맥은 보통 사람에게도 흔히 나타나는 증상이 아니던가. 사는 게 바빠 건강검진도 제때 받아보지 못했는데 이런 일이 닥칠 줄이야. 마침내 아내의 죽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되자 그는 참았던 눈물을 쏟아냈다.
가난한 집안의 딸로 태어나 중학교를 간신히 마친 뒤 생업의 현장에 뛰어들었던 아내는 여공시절 노동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격렬하게 싸운 투사였다. 그런 아내와의 만남과 결혼, 그리고 전셋방을 전전하며 가난하지만 따뜻하게 살아온 20여년의 세월이 그의 머릿속에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김비서관이 아내를 처음 만난 건 79년, 그가 명동대학생모임 사건으로 4년간의 옥고를 치른 뒤 서울의 한 방직공장에 취직해 노동운동을 할 때였다. 당시 아내는 어린 나이에 생활전선에 뛰어든 뒤 몸으로 노동현실을 깨친 실천가였다. 노동조합 활동에 열성적으로 가담했고 노조 부지부장까지 역임할 정도로 책임감도 높았다. 그러나 다니던 회사가 화재로 문을 닫으면서 안씨는 직장을 잃었다. 그뒤 노동운동가들이 돈을 모아 차린 ‘공단서점’의 관리인으로 일하게 됐는데 그곳에서 두 사람이 처음 만났다. 공단서점은 당시 서울시 구로구 가리봉동 5거리에 있던 작은 서점. 구로구 일대 노동운동가들의 아지트 비슷한 곳이었는데 각종 노동법 관련 도서와 사회과학 서적을 구해볼 수도 있었고, 현장 활동가들끼리 서로 연락을 남길 수도 있었다. 김비서관도 공단서점을 자주 드나드는 사람 중 하나였고, 두 사람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됐다.
고생 끝에 낙이 오자 홀연히 세상 뜬 아내를 향한 김용석 청와대 비서관의 눈물 젖은 사부곡

김비서관에게 아내이자 든든한 동지였던 안순분씨의 생전 모습.


“처음부터 결혼할 생각이 있었던 건 아닙니다. 서점에서 처음 봤을 때 아내는 수녀가 될 준비를 하고 있다고 했어요. 집사람의 첫인상은 무척 지쳐 보였습니다. 세상사에 시달리고 사람관계에 치이면서 종교에 귀의할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런 아내에게 ‘그런 선택이야말로 도피다. 인간은 원래 악한 존재가 아니라 환경에 지배를 받을 뿐이다’라며 함께 지금의 어려움을 극복해가자고 설득했어요. 그렇게 오랜 시간 서로의 문제를 두고 대화를 나누면서 가까워졌고 마침내 결혼에 이르게 된 거죠.”
그는 아내와의 추억을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요즘 사람들에겐 삼엄한 노동운동 현장에서 만나 어렵게 키워온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로 들릴 수 있지만 결혼을 앞두고 두 사람이 겪은 고통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고생 끝에 낙이 오자 홀연히 세상 뜬 아내를 향한 김용석 청와대 비서관의 눈물 젖은 사부곡

김비서관은 다행히 씩씩한 모습으로 강한 아버지가 되려고 노력하고 있다.


김비서관은 서울의 명문대(연세대) 출신인 반면 아내는 가난한 집안의 딸로 중학교 졸업이 학력의 전부였다. 지난해 작고한 그의 아버지는 두 사람의 결혼을 극구 반대했다. 경찰서장 출신인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 4년간 옥고를 치르는 동안 단 한차례의 면회도 오지 않을 만큼 완고한 분이셨다. 아버지는 내로라하는 대학을 나온 아들이 못 배우고 가난한 집 딸과 결혼하는 것을 끝내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주변의 반대도 두 사람의 사랑을 끊어놓지는 못했다.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남을 위해 살자던 우리 처음 맹세를 잊지 말자.”
두 사람은 이렇게 다짐했다. 비록 아무것도 없이 시작하지만 부정한 것을 탐하지 말고 언제나 인생의 원칙을 지키며 살자고도 약속했다. 81년 봄, 두 사람은 마침내 한 가정을 이뤘다.
그러나 그후의 삶은 고단했다. 노동운동과 재야운동의 현장을 오가는 그에게 풍요로운 결혼생활은 애당초 기대할 수 없었다. 그를 대신해 아내가 생업에 나서기도 했다. 남편이 6남매의 맏아들인 까닭에 시부모를 모시고, 세 아이의 뒷바라지까지 해야 했던 아내에게 안락한 삶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사치였을지도 모른다.

지난해 처음 해외여행, ‘집 한채 있었으면’ 바라던 아내의 말이 가슴에 응어리져
그러한 처지에서도 아내는 순수한 소녀 같은 마음을 잃지 않았다. 김비서관의 대학동창으로 함께 재야운동을 했고, 지난해 부부동반으로 함께 여행을 가기도 했던 김학민씨(학민사 대표)는 안씨를 “참 마음이 순수한 분”이라고 기억했다.
“지난해 10월쯤인가 김비서관 부부와 우리 부부 등 네쌍이 중국 연변을 거쳐 백두산에 오르는 단체관광을 간 적이 있어요. 당시 ‘평생 처음 가는 해외여행’이라며 소녀처럼 기뻐하고 감격해하던 부인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묵은 숙소가 중국의 중급 호텔이었는데 ‘호텔이 이런 곳인 줄 처음 알았다. 호텔 구경을 하게 돼 정말 좋다’며 마냥 즐거워하더라고요.”
민주화 운동을 하던 사람들이라고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김비서관은 유독 재산 불리는 데 관심이 없는 사람이다. 청와대 1급 비서관이면서도 그는 전철로 출퇴근한다. 청와대 1급 비서관이라서가 아니라 50대 가장이라면 탐낼 법한 자동차가 아예 없다. 심지어 “내 인생에 자동차를 탈 일이 없는데 운전면허가 무슨 필요가 있냐”며 운전면허 따는 것에도 관심이 없다고 한다.
그래서 재야운동가 시절, 그는 아무리 흥겨운 술자리도 밤 10시 반이면 자리를 떴다. 전철이 끊기면 부평 집까지 갈 길이 막막해지기 때문이다. 심야택시를 탄다거나 여관에서 외박을 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럴 마음도, 경제적 여유도 없었다.
노동운동, 재야운동을 거쳐 그는 88년, 김대중 전 대통령이 평화민주당 총재로 있을 때 입당해 정치권과 인연을 맺었다. 87년 대통령 선거 때 김대중 후보의 상대적 진보성에 주목하고, 지지한 재야 인사들을 ‘비판적 지지론자(비지론자)’라고 부르는데, 김비서관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대선이 끝난 뒤 그를 비롯한 비지론자들은 차제에 정당에 입당해 본격적으로 김대중 총재를 돕기로 작심했다.
그 첫번째 계기가 88년 봄 14대 총선이었다. 김영삼 총재의 통일민주당과 갈라서면서 절대적으로 인재가 부족했던 평민당은 비지론자 재야 인사들을 대거 영입해 지역구에 출마시켰다. 김비서관도 그때 그야말로 ‘얼떨결에’ 인천 부평에서 출마했다. 하지만 이것이 그에게 처음이자 마지막 출마였다. 그후 정당인으로, 지방자치단체장 비서실장으로 활동했지만 정치인으로서는 그다지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시쳇말로 가진 것 없고 ‘빽’도 없는데다 ‘융통성’마저 없던 그에게 정글 같은 정치판에서 살아남기란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남편을 내조하는 아내의 생활도 편할 리 없었다. 성장 배경이 다른 까닭에 아내는 남편 형제들과도 잘 어울리지 못했다. 함께 사는 시부모들로 인한 마음고생도 비켜갈 수 없는 짐이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아내는 삶이 고단하고 힘들 때마다 성당을 찾아 조용한 명상으로 마음을 다스리곤 했다.
김비서관은 “비록 가난하지만 원칙과 벗어나는 타협은 하지 않았다”고 자부한다. 청와대 인사혁신비서관의 역할은 행정자치부, 중앙인사위원회, 국무총리조정실 등 정부부처의 인사 관련 기능을 청와대 차원에서 조율하고 점검하는 것. 또 정부투자기관, 정부산하 연구기관의 인사기능 점검도 그가 챙겨야 할 업무다. 이처럼 정부의 인사 관련 업무를 조율하는 중요한 자리에 있다 보니 주변의 청탁이 끊이질 않는다. 그러나 그는 그런 요청을 대쪽같이 거절한다. 지금까지 적당히 타협하며 살아오지 않았는데 청와대 비서관 자리에 있다고 그 원칙이 달라지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고생 끝에 낙이 오자 홀연히 세상 뜬 아내를 향한 김용석 청와대 비서관의 눈물 젖은 사부곡

지난해 백두산과 중국 연변으로 여행 갔을 때의 모습. 아내에게는 처음이자 마지막 해외여행이었다.


하지만 가정적으로 그는 ‘무능한 가장’이라는 비판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누구나 어려웠던 고난의 80년대에는 그렇다 쳐도 90년대 2000년대에 들어서도 가족들을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했고, 나이 50세가 넘어서도 전셋집을 전전한 것이 자랑스러운 이력일 리 없다. 가난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가끔 “우리집 하나쯤은 있어야 하는데” 하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곤 했던 아내가 떠난 지금, 그는 그런 아내의 넋두리가 그렇게 한스러울 수 없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는 한번도 가난을 불행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아내가 죽자 나와 우리 가족이 부평의 허름한 동네에 산다는 신문기사가 났더군요. 나는 못 느꼈는데 아이들은 상처를 받은 것 같아요. 우리는 스스로 한번도 가난한 동네에 산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언론에서 그렇게 표현하고, 주변에서 뭐라고들 하니까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더라고요.”
아내에게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언제였을까. 김비서관은 “아마 나의 청와대 입성이 평생 가장 큰 기쁨이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집사람은 처음에 청와대 비서관이라는 직책이 뭔지 잘 몰랐어요. 그런데 인수위원회 시절, 청와대 비서관 내정자라고 내 이름이 언론에 나고 하니까 주변 사람들의 태도가 달라지는 거예요. 아내에게 ‘축하한다’는 인사가 쏟아지고, 심지어 어떤 동네 분은 우리 마을의 오랜 숙원사업을 들고 와 남편을 통해 해결해달라고 부탁까지 했다는 겁니다. 이런 주변의 반응에 어리둥절하던 아내도 마침내 내가 남들이 선망하는 자리에 가게 된 것을 알고는 크게 기뻐했어요. 큰아이가 대학에 합격했을 때도 좋아했지만 아마 내가 청와대 비서관으로 발탁된 것이 아내에게는 가장 행복한 뉴스였을 겁니다.”
아내를 기쁘게 한 사건이 또 하나 있다. 3월부터 남편이 생활비를 가져다 주기 시작한 것이다. 김비서관이 아내에게 준 돈은 월급의 일부인 1백만원이 전부. 하지만 지난 3월말부터 꼬박꼬박 손에 쥐게 된 1백만원은 지금까지 아내가 남편에게서 받은 월 생활비로는 가장 큰 액수였다.

“나와 아내는 가난했지만 언제나 서로 존중했고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그 작은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아내가 세상을 떠난 게 7월2일. 남편이 제대로 된 월급을 받기 시작해 ‘생활비’라는 것을 따로 받아본 지 겨우 넉달 만에 세상을 떠나고 만 것이다.
‘가난한 청와대 비서관과 그 아내의 죽음’을 취재하기 위해 기자는 두 차례 김비서관을 만났다.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언론이 괜히 우리 얘기를 미화하고 있다”며 취재를 꺼렸다. 자신과 아내의 삶이 사실과 다르게 알려진 점이 많다는 것이다. 그는 “가난했지만 아내와 나는 언제나 동지처럼 서로 존중했고 사랑했다”고 말했다. 기자와의 몇 차례 만남 끝에 그는 어렵게 몇달 전 아내가 눈물을 흘렸던 일을 들려줬다.
“청와대 월급을 받은 지 두달째 된 어느날이었습니다. 집사람과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언제라도 청와대 비서관직을 그만둘 수 있으니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말했습니다. 내가 하는 일은 사심이 있어서는 안되고, 만약 그런 상황이 온다면 당장이라도 그만둘 결의로 일하겠다는 각오를 말하려는 것이었는데 갑자기 아내가 눈물을 뚝뚝 흘리는 겁니다. 아내는 ‘그만두겠다’는 말만 듣고는 당장 사표를 내는 것으로 오해했던 모양이에요. 결혼생활 22년 만에 처음으로 제대로 된 월급을 받고, 작은 돈이지만 계획을 갖고 쓸 수 있는 처지가 됐는데 그만두겠다고 하니 억장이 무너지지 않았겠습니까.”
아내가 세상을 떠난 뒤 김비서관에게 작은 변화가 생겼다. 저녁약속을 일체 잡지 않는다는 것. 갑작스럽게 엄마를 잃은 충격에 빠져 있는 아이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다. 아직 감수성이 예민한 중학교 3학년 딸아이와 초등학교 5학년짜리 막내 아들에게 어머니의 빈자리를 채워주고 싶은 절박한 심정에 그는 오후 6시만 되면 마음이 초조해진다고 한다.
“동네 할머니 한분이 와서 집안일을 돌봐주고 계세요. 하지만 상실감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충분한 대화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곧장 집으로 달려갑니다. 지금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은 혼란에 빠진 우리 아이들을 잘 지켜내는 것이니까요.”
처음 부인상을 당했을 때 주변 사람들은 넋이 나간 그를 보고 안타까워했다. 그리고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건 아닌가 걱정하는 이도 있었다. 그러나 다행히 씩씩하게 위기를 극복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내를 대신해 아이들을 돌봐야 하는 강한 아버지로 변해가고 있었다.
잠깐의 인터뷰가 끝나자마자 그는 잘 가라는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허겁지겁 자리를 떴다. 인터뷰 내내 울려대는 휴대전화는 또 얼마나 취재에 방해가 됐던가. 다음 약속 때문에 시간을 많이 낼 수 없다고 사전에 양해를 구하기는 했으나 급히 자리를 뜨는 취재원의 뒤통수에다 인사를 해야 하는 기자로서는 조금 서운한 느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어디론가 달려가는 그의 뒷모습을 우두커니 바라보고 있으려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려운 시절을 함께 보내며 고생한 아내를 이제 겨우 고생이 끝날 듯하니까 돌연 잃게 된 초로의 남자가 본능적으로 깨달은 상처 치유의 방법이 바로 일 속에 자신을 내던지는 것은 아닐까’ 하고 말이다.

여성동아 2003년 8월 47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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