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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이제야 밝힌다

데뷔 10년 만에 자기 이름 내건 TV 쇼 진행 맡은 천하장사 강호동

“말 많은 연예계 생활 10년, 나를 둘러싼 수많은 루머들에 대한 최초 항변”

■ 글·이영래 기자(laely@donga.com) ■ 사진·지재만 기자

2003. 01. 09

89년 프로 씨름을 시작한 이후 3년 6개월 동안 다섯 번의 천하장사, 일곱 번의 백두장사 타이틀을 따냈던 ‘씨름판의 악동’ 강호동이 코미디언으로 변신한 지 벌써 10년이 지났다. 이만기의 7년 독주를 끝내며 모래판의 황제로 군림하던 그가 연예계 스타로 10년을 살아오는 동안 겪었던 애환, 에피소드, 그리고 그간 나돌았던 소문에 대한 그의 항변.

데뷔 10년 만에 자기 이름 내건 TV 쇼 진행 맡은 천하장사 강호동

“이기고 나면 와 그리 소리를 지르냐고예? 모르겠심더. 제 속에 뭔가 다른 게 있는 게 아닌가 싶어요. 한번은 학교에서 친구 오토바이를 타고 사고를 낸 적이 있었십니더. 오토바이를 타니까 신이 나더라고요. ‘야! 신난다’면서 달리는데 저 앞에 화단이 있고 벽이 보이는 겁니다. 10m, 5m, 이제 바로 앞이네, 하면서 속으로 생각은 드는데 신이 나니까네, 브레이크를 잡을 생각이 안 드는 겁니다. 네, 박았심더, 맨정신이었는데 고마 박아부리대예. 무릎팍 까지고 아파 죽겠는데 병원 가보니 정강이뼈가 조금 나갔다 하대예.”
90년, 천하장사 강호동(33)이 당시 최고의 인기 라디오 프로그램이었던 <이문세의 별이 빛나는 밤에>에 출연했다. 당시 강호동은 마산상고 7년 선배이기도 한 이만기의 7년 독주를 누르며 새로운 모래판 스타로 떠오르던 신예 스포츠 스타였다.
89년, 열여덟에 프로 무대에 데뷔한 그는 대부분의 시합을 하늘같은 선배들과 치러야 했다. 그러나 긴장에 떨어야 할 신인이었던 그는 오히려 유들유들 웃거나 혼자말을 해대며 상대 선수의 비위를 건드렸다. ‘어린 놈이 건방지다’며 달려든 선배들은 그러나 불행하게도 모두 모래판에 거꾸러지고 말았다. 그러고 나면 이른바 그의 ‘생쇼 세리머니’가 시작됐다. 그는 허공을 향해 주먹질을 해대며 팔짝 뛰었다. 그리고 괴성을 질렀다. 상대 선수를 약올리는 듯한 그런 태도 덕에 사람들은 그에게 ‘모래판의 악동’이란 닉네임을 지어줬다. 이문세가 그의 닉네임에 대해 질문하자 강호동은 ‘내 안에 또다른 나’가 있다고 대답한 것.
아버지 권유로 씨름 시작, 7년 만에 천하장사 등극
“허허, 참 오래전 일인데 기억하네예. 그때 1부에 제가 나갔고 2부에 이경규씨가 나왔습니더. 나중에 이경규씨가 그러대예. 방송일에 지쳐서 대기실에 있는 동안 너무 피곤했는데, 제 이야기에 잠이 확 깨고 신이 나더라고. 그게 인연이 돼서 나중에 코미디언으로 픽업을 한 겁니다. 제가 DJ.DOC 흉내내면서 ‘슈퍼맨의 비애’ 부를 때도 이경규씨가 그랬죠. 강호동이는 바보 아니면 천재라고. 평소에 제가 점잖은 편인데 방송 카메라만 앞에 오면 신이 나버려요. 정말 제 속에 뭔가 딴 게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목 울대뼈를 조금씩 누르는 듯한 경상도 사투리의 딱딱한 어조는 고스란히 살아 있지만 오랜 방송 생활 덕인지 그의 평소 말투는 표준어에 가까웠다. 게다가 이야기를 이어 나가자 그의 말투는 점점 더 점잖아졌다. 코미디언 강호동에게 기대한 인터뷰치곤 너무 점잖다고 말하자 그는 “원래 제 모습이 이렇습니다. 그렇다고 저를 비난하면 안돼요. 사람은 다 자기 사는 방식이 있는 거니까네” 하며 웃었다.
“제가 코미디언이 된 게 잘된 건지, 안된 건지는 아직 판단하기 일러요. 천하장사 출신으로 제게 보장됐던 삶이 있었는데…. 지금도 가장 후회되는 게 그겁니다. 내가 왜 선수 생활을 그리 일찍 그만뒀는가 하는. 그때 제 나이가 스물둘이었는데, 지금 돌아보면 아무 것도 모를 땐데 확신이 지나치게 강했어요. 지금 공부하지 않으면 때를 놓친다는 생각 때문에 은퇴를 선언했죠.”
그는 마산중학교 2학년 때 씨름을 처음 시작했다. 2남3녀의 막내로 태어난 그는 형제 중 유독 덩치가 좋았다. 딸 셋 끝에 아들 하나를 낳은 아버지가 아들 하나를 더 얻을 욕심에 온갖 보약을 어머니에게 해드렸다. 그 덕에 태어난 것이 천하장사 강호동. “내 놓으면서 어머니가 기절했다 하데예”라는 말은 신생아 강호동의 체격을 짐작케 한다. 더욱이 그의 식성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데뷔 10년 만에 자기 이름 내건 TV 쇼 진행 맡은 천하장사 강호동

강호동은 큰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수줍음이 많다.


“어렸을 때 우리 형 먹는 것 때문에 내한테 많이 맞았습니다. 라면이란 게 그래요. 끓인다고 하면 별로 먹고 싶지 않은데 끓여놓으면 그리 먹고 싶어요. 형이 라면을 먹고 있는데 ‘내 좀 줘!’하면 형이 안 줘요. 뭐 해주면 준대요. 안 먹는다고 이러고 있는데 군침이 돌잖아요? 라면 국물이 또 밥 말아 먹으면 오죽 맛있습니까? 그래, 그럼 그 남은 국물이라도 달라고 하면 그것도 뭐 해줘야 준대요. 설마 하고 뒤돌아 앉아 있으면 그걸 다 먹어치워요. 그럼 마 달려들어 가지고 때렸죠.”
“형한테 이겼느냐?”고 묻자 그는 “형하고 두살 터울인데, 마, 그냥 그때는 형이 맞대요. 마, 어릴 때니까”며 말까지 더듬었다. 무안해하는 그의 표정이 오히려 재밌다.
어릴 때부터 지나친 ‘우량아’였던 그를 보다못한 부모님이 ‘살을 빼라’고 태권도장에 보냈는데, 그때 부모님은 그가 운동신경이 뛰어나다는 사실을 알았다. 한창 민속씨름 붐이 일던 때라 아버지는 그에게 씨름을 권했다. 하지만 씨름부에 들어 한 보름 남짓 열심히 운동을 하던 강호동은 어느날 ‘내 안해!’하고 샅바를 팽개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유인즉 샅바 잡느라 손에 피멍이 다 들었다는 것. 아버지는 그런 아들이 보기 싫다며 일주일간 같이 밥상조차 마주하지 않았다. 결국 아버지에게 항복하고 그는 다시 씨름부로 돌아갔다.
“지가 타고난 겁니다. 한 한달쯤 하니까 나보다 오래 한 친구들을 다 이기버렸습니다. 이기니까 재밌어지대예. 입문 한달 만에 경상남도 씨름대회 1등을 묵었어요. 이만기 선배가 누굽니까? 이만기 선배가 천하장사 하는 걸 보고 제가 씨름에 입문했는데 7년 만에 제가 그 선배를 이겨버린 겁니다.”
흔히 사람들은 그가 코미디언이 되기 위해 씨름을 그만둔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그는 92년 4월 은퇴했다. 그가 개그맨으로 데뷔한 것은 93년 4월. 중간에 1년의 시간이 빈다. 사실 그 1년은 강호동 인생의 최대 시련기였다. 92년 4월 은퇴 당시, 그는 “새로운 인생을 설계해보겠다. 10년 후에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이란 묘한 말을 남겼었다. 물론 여기서 10년 후의 인생 계획은 코미디언이 아니었다.
그는 이만기가 인제대학교 교수가 된 것을 보고 자신 또한 지도자의 길을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려면 공부가 필요했다. ‘공부란 때가 있는 법’이란 말을 맹신했던 그는 계약이 만기되던 때 은퇴를 선언했다. 그러나 그의 대학진학은 좌절되고 말았다. 다시 씨름판으로 돌아가려 했지만 많은 만류를 뿌리치고 나온 터라 그 또한 여의치 않았다. 정말 어정쩡한 시기였다. 당시의 기억은 아직도 그에게 상처가 되고 있는 듯했다. “대학을 가고 싶었냐?”고 묻자 그는 떨떠름하니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 큰 덩치에 얼굴이 붉어졌다.
은퇴 후 지도자 수업 받던 중 코미디언 데뷔
“그때 이경규씨가 전화를 한 겁니다. 밥 한끼 먹자고. 그래서 서울에 올라왔는데 MBC 앞에 있는 중국집에 데리고 가는 겁니다. 그때 이경규씨는 ‘몰래 카메라’도 하고 인기 많던 때거든요. 근데 자장면 하나 시켜놓고 저보고 먹고 싶은 걸 시키라는 겁니다. 그 상황에서 제가 무슨 비싼 걸 시키겠습니까? 그냥 짬뽕 하나 시켰죠. 밥 먹으면서 같이 코미디를 해보자고 하더라고요.”
당시 이경규는 <코미디 동서남북>의 진행을 맡으면서 시청률 때문에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고 한다. KBS의 경쟁프로 <한바탕 웃음으로>가 ‘봉숭아 학당’ 등의 코너에 힘입어 시청률 수위를 차지할 때 일이다. 누군가 새로운 인물이 필요했고, 이경규는 <별이 빛나는 밤에>에 출연했던 강호동을 떠올렸다.

데뷔 10년 만에 자기 이름 내건 TV 쇼 진행 맡은 천하장사 강호동

현재 어머니와 같이 살고 있는 그는 “빨리 장가 가라”는 성화에 시달리고 있다고..


그러나 당시 강호동의 반응은 ‘노’였다. 천하장사가 코미디를 할 수 없다는 게 이유였다. ‘나는 천하장사 출신’이라는 프라이드가 강했던 강호동은 ‘천하장사의 명예를 훼손해선 안된다’라는 의식이 강했다. 고정 출연은 거절했지만 결국 그는 이경규의 간청에 못 이겨 ‘스타! 궁금합니다’라는 20분짜리 인터뷰에 응했다. 그리고 특유의 ‘재롱’을 선보였다. 이 20분이 그의 인생을 바꿨다. 이날 방송은 같은 시간대 <한바탕 웃음으로>와 똑같은 시청률을 기록했다.
이경규는 강호동을 다시 설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당신이 실패하면 내가 같이 옷을 벗겠다”는 선언을 했다. 강호동은 지금까지도 이경규의 이 말에 무한한 감사를 느끼고 있다. 그 감사의 뜻을 그는 “지금 내 위치가 그때 이경규씨 위치였다. 그러나 나는 그런 말을 후배에게 하지 못한다”는 찬사로 대신했다.
“제가 이렇게 코미디언으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건 사실 <소나기> 덕분이었습니다. 포동이하고 호흡 맞추면서 참 신명나게 했습니다. 제 능력의 110%가 발휘됐던 것 같아요. 그외에도 <캠퍼스 영상가요>라든지 <쿵쿵따>도 기억에 남는 프로였습니다. 돌이켜보니 참, 좋은 프로그램 많이 했네예.”
뭐니뭐니 해도 지금의 그를 만들어준 것은 역시 <소나기>다. 94년 그는 대본에도 없던 애드립 ‘행님아, 반갑습니데이’ ‘예쁘게 봐주이소’ 등과 같은 유행어를 낳으면서 톱스타의 반열에 올랐다.
강호동은 자신의 인기비결을 ‘씨름 잘하던 놈이 코미디도 열심히 하니까 어른들이 귀엽게 봐주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하지만 그의 코미디언으로서의 캐릭터는 바로 <소나기>에 뿌리를 두고 있다. 큰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막내 특유의 재롱, 그리고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수줍음. 하나 더 덧붙이자면 ‘순박함이 묻어나는 막무가내 억지’를 들 수 있을 듯싶은데, 그는 그 말에 다소 비위가 상한 듯 “코미디는 타이밍”이라고 기자의 말끝을 덮어버렸다. 의아해 쳐다보니 그의 얼굴이 다시 홍조다. 아마도 그는 ‘막무가내 억지’라는 말이 듣기 싫었던 듯싶다.
‘결혼할 상대 만나면 느낌 올 것’ 기대
그와 1시간 30분 남짓 이야기를 이어 나가다 그에 대해 아주 색다른 느낌을 받았다. 그는 수줍음이 많았다. 아무렇지 않게 체중을 묻자 그는 다시 얼굴을 붉혔다. 그는 “안 가르쳐줍니다. 그건 비밀입니다” 하며 완강히 대답을 거부했다. “방송 활동 자체가 다이어트입니다. 저녁에는 아무것도 안 먹습니다. 아침에 얼굴 부은 채로 방송 녹화할 수 있겠습니까?”라며 의외의 세심한 면을 드러냈다.
“집에서는 장가가라고 난리입니다. 근데 내가 그래요. 어떤 때는 작고 귀여운 여자가 좋다 말입니다. 그러다 한 1년 지나면 이번엔 키 크고 날씬한 여자가 좋아요. 그래서 우리 큰 누님에게 물어봤어요. 내가 이리 왔다갔다하니 장가를 어떤 여자에게 가야 하겠냐고. 그랬더니 누야가 하는 말이 결혼할 때가 되면 자기도 모르게 느낌이 온다 하대요. 그걸 기다리고 있습니다. 장가야 못 가겠습니까?”
그는 어머니와 같이 살고 있다. 아직은 옆에서 어머니가 챙겨주기에 그다지 색시 아쉬운 건 모르고 살지만 결혼에 대한 부담은 가지고 있다고 한다. 더욱이 인터넷을 중심으로 도는 항간의 어지로운 소문들은 그에게 많은 상처를 주고 있다. 연상녀 K와의 동거설, 그와 여배우 L의 가슴 수술과 관련된 이야기 등.
“제가 천하장사고 힘이 세다는 것 때문에 참 별이야기가 다 떠도는데 내도 그렇고 그 소문의 상대들도 인격이 있고, 체통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다 듣고는 있는데, 천하장사는 그런 소문이 돌아서는 안됩니다. 우리 씨름계는 그런 데가 아닙니다. 또 제가 연예인으로 지켜야 할 명예도 커요. <주병진 쇼>다, <쟈니 윤 쇼>다, 누구 이름 건 토크쇼는 있어도 주말에 하는 버라이어티 쇼를 자기 이름 걸고 하는 거 본 적 있습니까? 아마 <강호동의 천생연분>이 처음일 겁니다. 이름값은 해야죠.”
어쩌면 우리는 코미디언 강호동의 익살에 익숙해져 천하장사 강호동을 잊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그는 씨름인으로서 자신이 지켜야 할 품위, 그리고 연예계에 종사하는 공인으로서 가져야 할 의무를 누구보다 명확히 새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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