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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leb 작가의 공간

보육원에서 자란 유년기와 가난으로 힘겨웠던 젊은 날 보낸 나희덕 시인

■ 글·박상건 ■ 사진·박성배

입력 2003.01.08 19:32:00

힘겨운 삶에 지친 독자들에게 나희덕 시인의 시는 그 어떤 투정도 다 받아줄 것 같은 속 깊은 누이처럼 다가온다. 거기엔 남다른 유년기가 한몫했던 듯싶다. 부모님의 종교적 이상에 따라 고아들과 보육원에서 함께 자랐던 그는 가난과 사회 참여와 종교적 이상 사이에서 힘겹게 이십대를 보냈다고 한다.
해맑은 겉모습과 달리 녹록지 않은 개인적 체험을 감동적인 시어로 녹여내고 있는 나희덕 시인의 속 깊은 이야기.
보육원에서 자란 유년기와 가난으로  힘겨웠던 젊은 날 보낸 나희덕 시인

나희덕 시인(37)을 만나러 전라도 광주 조선대를 찾았다. ‘최루탄’세대인 그의 연구실은 아이러니하게도 518호. 지난 봄학기부터 광주와 인연을 맺었는데, 처음에 ‘광주’는 그에게 막연히 두렵고 부담스러운 ‘역사의 땅’이었다고.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무거움 대신 친근감이 자리잡았다. 틈틈이 학교 뒤 무등산에 오르며 시심을 건져 올린다는 그는 신작시 한편을 컴퓨터 화면에 띄워 보여줬다.

동쪽 창으로 멀리 보이던 無等갈매빛 눈매는 성글고 그윽하였으나그 기억의 분화구를 들여다 보기가 두려워한 번도 가까이 가지 못했다너무도 큰 죽음을 보아버린 눈동자가저리도 평화로울 수 있다니,진물 흐르는 가슴이 저리도 푸르다니,그러나 오늘은 그가 먹구름 속에 들어 계셨다( ‘그는 먹구름 속에 들어 계셨다’ 중에서)
서정주, 김현승, 이성부, 정일근, 문병란에 이르기까지 여러 시인들이 평등과 신념, 긍지의 산으로 묘사한 무등산. 그 무등산이 나희덕 시인에게는 상처 입은 짐승처럼 보인다. 밤이면 조금씩 내려와 그의 잠자리를 지켜주는 산.
나희덕 시인의 시는 튼실한 언어들이 피라미떼처럼 잔잔하게 물살을 가르는 모습처럼 다가온다. 건강한 생명력이 느껴지는 정직한 시. 거기에 특유의 따뜻하고 담백한 인상까지 더해져 그의 시집을 든 사람들은 누구나 편안한 느낌을 받는다. 쉽게 읽히기에 쉽게 씌어진 듯 보여도, 그만의 독특한 시적 틀은 남들은 흉내내기 어려운 점이 있다.
그 이유를 그의 습작기에서 찾을 수 있을 듯싶다. 대부분의 시인들은 습작 시절 앞서 간 시인들의 작품을 되풀이해서 필사하는 과정을 거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면서 ‘펜혹(볼펜을 쥔 손가락 마디에 굳은살이 박이는 것)’의 추억을 가지게 마련인데, 그는 펜혹이 없다. 그저 혼자서 작품을 읽고 익히면서 자기만의 창작 훈련을 해온 까닭이다. 연세대 국문과 시절 방법론 강의를 들었지만 그것이 창작의 문제를 다 해결해주지는 못했고 결국 스스로 개척해야 했다. 그 과정을 통해서 독창적인 작품이 나왔다. 이런 시 쓰기는 ‘나희덕식 정형화’라는 일종의 단점으로 작용한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지만, 신춘문예 지망생들에게 그의 시가 끼치는 영향은 엄청나다. 혹자는 ‘시 창작 교과서’로 여길 정도다. 섬세하면서도 강력한 시어와 진솔한 서정의 세계가 감동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의 시를 읽으며 감동을 얻는 가장 큰 까닭은 그의 시적 표현이 ‘체험’을 거쳐 비롯됐다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 곱고 앳되어 보이는 첫인상과 달리 그는 어릴 적부터 퍽 쓰디쓴 시간의 거리를 걸어왔다.
어머니가 근무하던 보육원에서 태어나고 자라
그는 66년 충남 논산 연무대의 ‘에덴원’이라는 보육원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회사에서 결재서류 서식 등을 의뢰받아 밤새도록 철필을 긁어 글씨를 쓰던 필경사였다. 청년 시절부터 순수 신앙공동체를 꿈꾸고, 함석헌 선생의 글에 매료되었던 신앙심 돈독했던 아버지. 어머니 역시 친지가 운영하는 보육원의 총무 일을 맡았다. 이런 부모님으로 인해 그도 ‘고아 아닌 고아’로 이곳에서 태어나 열살 때까지 살았다. 그리고 서울 면목동으로 이사온 후에는 어머니의 직장인 보육원 ‘애향원’에서 스무살 처녀가 될 때까지 있었다. 부모가 있지만 부모 없는 외로운 아이들과 함께 공동체적 분위기에 젖어서 살았다. 흔히 어린아이라면 부모에게 투정도 하고 떼도 쓰련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부모 없는 아이들과 똑같이 밥 먹고 옷 입으며 평등한(?) 시절을 보냈다. 또래의 마음을 헤아리며 생활하고 감정을 절제하는 법까지 터득했다. 그렇게 너무 일찍 철이 들어버렸다. 소녀 시절 나씨는 유달리 예뻤다. 그래서 양자나 양녀를 구하러 온 사람들에게 늘 먼저 지목받곤 했다. 그때마다 부모님은 소녀를 숨기곤 했다. 부모와 그는 그럴 때마다 다른 아이들이 어떻게 여길까 염려하는 마음뿐이었다고 한다. 지금도 나시인은 그때 일은 시의 소재로 쓰지 않는다. 행여 친구들에게 마음의 상처를 줄까 걱정해서다. 그만큼 속이 깊다.

보육원에서 자란 유년기와 가난으로  힘겨웠던 젊은 날 보낸 나희덕 시인

연세대 국문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한 나시인은 현재 전남 광주 조선대에서 교수로 재직중이다.


그러나 때로 그 울타리를 벗어나고 싶을 때도 있었다.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으로 기억한다. 남과 다른 생활환경에서 오는 차이가 그에게 정신적 혼란을 안겨줬다. 답답할 때면 그는 보육원을 나서 무작정 혼자 걸었다. 한참 걷다 보니 툭 뚫린 여러 갈래의 길이 보였다. 지금 생각하니 그 길은 호남고속도로 인터체인지였던 모양이다. ‘짧은 가출’ 끝에 보육원으로 돌아와 혼이 났던 소녀는 그네를 타며 마음을 달래곤 했다. 그때의 기억을 그는 이렇게 노래한다. “산 너머 고운 노을을 보려고/그네를 힘차게 차고 올라 발을 굴렀지” 그러고는 “아름다움에 취해 땅끝을 찾아갔지/그건 아마도 끝이 아니었을지 몰라”라고.
남루한 생활에 대한 아쉬움은 있었으련만 아버지를 향한 마음은 늘 애틋했다. 그 사랑이 절절하게 그려진 시가 ‘누에의 방’이다. “가리방 긁는 소리가 밤새 들리던 밤/목에 둘렀던 수건을 감아 뜨거운 전구알을 갈던 모습이며/쥐가 난 다리를 뻗어서 두드리던 모습이며/전구 위에 씌웠던 종이갓이 검게 타 들어가던 모습이며/자줏빛으로 죽어가던 손마디와 팔꿈치를 문지르던 모습이며/내가 반쯤 뜬 눈으로 보고 있었다는 것을/아버지는 알고 계셨을까 그 방을 벗어나고 싶어했다는 것을”
20대에 정신적 고통 이기지 못해 잠시 수도원과 기도원에서 생활해
희미한 백열등 아래서 가리방(철필)으로 긁어가며 대신 글을 써주는 게 생업이었던 아버지는 좁은 방에서 뒤척이는 식솔들의 잠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곳간이나 헛간에서 쓰던 아스라한 십오촉전구 불빛에 기대어 일을 했다. 그나마 종이와 수건으로 전구를 감싼 채 눈을 부벼가며, 손마디와 팔꿈치를 문질러가며 밤을 지새웠다. 그 모습을 훔쳐보는 큰딸은 한편으로 가슴이 저렸고, 한편으로 이런 삶으로부터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아버지는 본래 글을 쓰고 싶어했다. 그러나 딸이 그 길을 걷는 것은 반대했다. 아버지는 딸이 법대에 가길 바랐다. 그래서 당신의 못다한 삶을 보상해주길 바랐다. 그러나 딸은 결국 시인이 되었다. 아버지가 가고 싶어한, 그러나 가지 말라고 말린 그 길을 기어코 걸어간 것이다.
그가 처음 문학과 인연을 맺은 것은 중학교 3학년때의 일. 선생님 권유로 백일장에 나가 상을 받으면서부터다. 고등학교 때는 문예반 활동에 푹 빠졌고 방학이면 종로서적이 도서관인 양 찾아갔다. 아침 일찍부터 종로서적으로 등교(?)하기를 되풀이했다. 저녁이 오도록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김춘수 박재삼 김수영 강은교 시인 등의 시집과 세계시인선을 읽었다.
대학에 입학하자 최루탄, 돌멩이들이 기다렸다. 그 시절 그는 스스로 글쓰기에는 너무나 평범한 학생이라고 여겼다. 학자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80년대의 캠퍼스 상황은 그런 그를 편하게 놓아두지 않았다. 한때 사회과학 동아리에서 활동한 적도 있었지만, 2학년 때 문학회로 옮겼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돌 던지고 최루탄을 덮어 쓴 채 분노하고 남들처럼 돌멩이를 마음껏 던져보지 못했던 일, 어깨에 어깨를 걸고 거리로 뛰쳐나가 보지 못한 일들이 마음의 빚으로 남아있다고 했다.
대학 시절은 개인적 고통도 깊고 질겼다. 아르바이트를 다섯개씩 해가며 대학 등록금을 벌어야 했고, 가족까지 부양해야 했다. 사회 참여적인 대학 분위기와 집안의 종교적 분위기는 그에겐 정신적 갈등을 이중으로 안겨주었다. 괴로움을 이기지 못해 수도원, 기도원 생활을 잠시 하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운명이나 숙명은 스스로 헤쳐나가야 한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돌아왔다.
그런 젊은 날의 아픔과 갈등이야말로 시의 불꽃을 긋는 큰 부싯돌이 되어준 것이 아닐까. 나이에 비해 버거웠던 특이한 가족사와 사회적 격랑을 작은 한몸에 끌어안고 있던 그는 시를 토해내기 시작했다. 아무리 잘 나가는 시인이라도 한 생애에 대표작은 고작 두어 작품에 불과하다는 말이 있다. 그런데 지금 그는 가래떡을 뽑아내듯이 희고 고운 시편들을 주르륵 쏟아내고 있다. 연 이은 문학상 수상 소식이 이를 입증한다. 그는 김수영문학상에 이어, 김달진문학상, 현대문학상 등을 거푸 수상했다.

보육원에서 자란 유년기와 가난으로  힘겨웠던 젊은 날 보낸 나희덕 시인

그는 한때 교사, 방송작가로 일하기도 했지만 결국 시인의 길로 들어섰다.


그는, 시는 구체적이고 현실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시의 소재를 착상하면 안에서 저절로 우러나올 때까지 기다린다. 마음속에 오래도록 간직해두는 편이다. 생감이 홍시가 되고, 홍시가 찔근찔근한 곶감이 될 때까지 기다린다. 그리하여 시상이 영혼과 함께 익어가 영혼의 언어로 발효될 때에야 작품을 발표한다. 또한 그는 시란 삶과 일심동체라고 믿는다. 삶이 미리 세워 둔 계획표처럼 진행되는 것이 아니듯이, 시 역시 방향을 정해놓고 만드는 것이 아니라고 믿는다. 하루 하루 그저 열정을 다해 살 뿐이듯이 시 역시 그렇다.
그를 인터뷰하러 간 날은 마침 안도현 시인의 특강이 있는 날이었다. 수업이 끝나고 학교 앞 호프집에서 뒤풀이가 있었다. 학생들의 질문이 쏟아졌다. 백일장 특차생으로 입학한 여러 문학도들의 매서운 질문이 이어졌다. 그 자리에서 나희덕 시인은 문학을 왜 하느냐는 질문에 대해 이런 답변을 했다. “글은 무엇을 확인해주는 것이 아니다. 읽어주고 보여주는 것도 아니다. 충족감이다. 스스로의 만족이다. 외적인 것을 기대하면 스스로 소외되고 실망한다. 성적은 몇등이라고 점수를 매겨주지만 문학은 그런 것이 아니다. 상을 위해 상금을 위해 백일장에 나가고 그런 성적에 얽매이면 바람직하지 못하다. 글을 쓰는 것을 업으로 알고 살아야 한다” 라고. 그렇다. 문학은 그런 것이다.
“글은 읽고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만족이다”
고달픈 생활 속에서도 늘 그는 시인을 꿈꿨다. 대학 졸업후 생활이 어려워 택한 교사의 길. 당시는 학교가 학내분규, 전교조 문제 등으로 몸살을 앓을 때였다. 게다가 그는 아이를 키우는 엄마였다. 사회생활과 육아의 이중 삼중의 고통이 뒤따랐다. 한 때 방송작가 일도 했지만, 결국 그가 꿈꾼 건 시인의 길임을 다시금 확인했다. 학비 대책도 없으면서 그는 무작정 대학원에 진학했다. 일주일에 무려 20시간을 뛰어다니는 보따리 시간강사 시절도 거쳤다. 본디 학자가 되는 것이 꿈이었던 그가 이제 그 길을 걷고 있다. 강사시절보다 강의 부담이 없어, 조금은 호흡 조절을 하면서 걸을 수 있는 것에 감사할 따름이다. 그렇다고 시간과 생활이 넉넉한 것만은 아니다. 하지만 지금 이렇게 꿈꾸는 세상이 아름답고, 그런 세상과 동행하는 것에 만족한다고 한다.
시로 추운 겨울밤을 따뜻하게 데워주는 그가 이렇게 말했다. “어둠도 시에 들어오면 어둠만은 아닌 게 되는지, 때로 눈부시고 때로 감미롭기도 했죠. 그런 암전(暗電)에 대한 갈망이 이 저물녘의 시들을 낳았나 봐요. 어두워진다는 것, 그것은 스스로 삶을 밝히려는 내 나름의 방식이자 안간힘이었던 셈입니다”.
어둠이 빛을 찾아 몸부림치는 사이에, 빛은 어둠에 스며든다. 그래서 세상은 살만해진다. 빛과 어둠의 사이 좋은 조화. 배추벌레 한 마리가 배추 속에 갇혀 못 나오면 어떡하나 걱정해, 배추를 동여매지도 못하는 그다운 말이다.
그의 시 중에서 한편 ‘그 복숭아나무 곁으로’를 골라봤다. 복숭아나무에 인간의 마음을 대비시킨 시. 너무 여러 겹의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는 다가서기 싫다고 우화적으로 노래하던 시인은 이내 편견을 버리고 복숭아나무 그늘 아래서 깨달음의 저녁을 맞이하고 있다. 어쩌면, 새해를 맞는 우리 모두에게 던져주는 삶의 메시지일지도 모른다.

너무도 여러 겹의 마음을 가진그 복숭아나무 곁으로나는 왠지 가까이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흰꽃과 분홍빛을 나란히 피우고 서 있는 그 나무는 아마사람이 앉지 못할 그늘을 가졌을 거라고멀리로 멀리로만 지나쳤을 뿐입니다흰꽃과 분홍꽃 사이에 수천의 빛깔이 있다는 것을나는 그 나무를 보고 멀리서 알았습니다눈부셔 눈부셔 알았습니다피우고 싶은 꽃빛이 너무 많은 그 나무는그래서 외로웠을 것이지만 외로운 줄도 몰랐을 것입니다그 여러겹의 마음을 읽는 데 참 오래 걸렸습니다



흩어진 꽃잎들 어디 먼 데 닿았을 무렵조금은 심심한 얼굴을 하고 있는 그 복숭아나무 그늘에서가만히 들었습니다 저녁이 오는 소리를(‘그 복숭아나무 곁으로’ 전문)



여성동아 2003년 1월 46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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