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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이 여자의 멋진 삶

만화 곁들인 육아 에세이 낸 만화가 조숙영

“몸이 불편한 절 배려하는 아들이 고마워 더욱 열심히 썼어요”

■ 기획·정지연 기자(alimi@donga.com) ■ 글·박진숙 ■ 사진·정경택 기자

2002. 12. 11

어린시절 앓은 소아마비로 하반신 마비가 됐지만 해보고 싶은 것 다 해보고, 이루고 싶은 것 다 이룬 씩씩한 여자, 조숙영. 같은 화실에서 만난 만화가 남편과의 사이에 아들을 낳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그가 이번에 육아 에세이를 펴냈다. 이번 책 출간은 다섯살바기 아들을 길러오며 틈틈이 쓴 육아일기가 바탕이 됐다고. 마침 남편의 학습만화도 함께 출간돼 기쁨이 두배가 됐다는 조숙영씨를 만났다.

만화 곁들인 육아 에세이 낸 만화가 조숙영

만화가 조숙영씨(36)가 육아 에세이를 냈다. 아들을 막 낳았을 때의 그 조마조마함과 설렘, 아이가 커가면서 느끼는 경이로움, 그리고 점차 아내와 엄마 역할이 버겁게 느껴지면서 찾아온 두려움 등을 솔직하게 털어놓은 그의 책은 남다른 감동을 준다.
조씨는 5년 동안 2~3일에 한번 꼴로 꾸준히 써온 육아일기를 바탕으로 만화와 글을 엮었다. 아무리 펜과 붓을 늘 들고 사는 그라고 해도 그만한 시간을 육아일기에 투자하기란 쉽지 않은 법. 여간 공들인 게 아님을 한눈에 느끼게 하는 한컷 한컷의 만화와 초보엄마의 마음을 잘 드러낸 글들이 눈에 확 들어온다. 사실, 아이 기르는 과정을 담아낸 육아 에세이는 그 과정이나 감동이 ‘거기서 거기’아니냐고 생각하기 쉽다. 이른바 식상하다는 것인데, 조씨의 책은 좀 다르다. 소아마비 장애를 지니고 있는 만화가 엄마라는 그의 처지 때문이다. <엄마, 똥꼬가 바지를 자꾸 뎃구 갈려구 해!>라는 다소 익살스런 제목의 그의 책에는 다른 엄마와 달리 장애를 지닌 엄마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사랑스런 아들의 모습이 크게 부각돼 있다.
“일부러 기록을 남겨야겠다고 생각해서 일기를 쓰게 된 건 아니에요. 비록 어린 아기였지만 지환이는 제게 안아 달라거나 업어 달라며 보챈 적이 없었어요. 얼마나 착하게 엄마를 배려하는지 그것이 고마워서 쓰기 시작한 거죠. 그러다 아이가 말을 하게 되면서 기발한 단어들을 구사하는데 그게 그냥 묻혀지는 것이 아까웠어요. 그래서 더욱 적극적으로 일기를 쓰게 됐지요.”
몸 불편한 엄마의 보호자인 양 행동하는 착한 아들
아들은 어릴 때부터 참 순했다. 그리고 클수록 의젓해졌다. 엄마가 다른 엄마들과 다르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았던 걸까. 어릴 때부터 힘든 일이 있으면 엄마보다는 아빠에게 먼저 도움을 요청했고, 외출할 때는 엄마를 도울 정도로 속이 깊은 지환이.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엄마와 거실에서 놀다가 그만 똥을 싸버린 지환이. 엄마가 아니라 자고 있는 아빠의 머리채를 확 잡더니 화장실로 가자고 발을 동동 굴렀다고 한다. 힘쓸 만한 일은 무조건 아빠에게 미루는 것이다. 때론 다른 아이들처럼 학원에서 돌아올 때 엄마의 마중을 받고 싶지만, 엄마가 마음이 아플까 봐 몇번이고 현관문 앞에서 들락날락하다가 아무 말도 없이 후다닥 달려나가는 착한 아이의 모습은 읽는 이에게 ‘찡한’ 감동을 준다.
“지환이는 자기가 제 보호자라고 생각하나 봐요. 우습죠? 제가 어디를 가려 하면 늘 옆에서 ‘엄마, 휠체어는 누가 올려줘?’ ‘엄마, 계단은 못 가지?’ 이러면서 알아서 배려해요. 외출했다가 집에 들어올 때 휠체어가 편히 들어올 수 있도록 현관 앞 신발을 일직선으로 나란히 정리하는 것도 아들 몫이랍니다.”
그는 참 밝은 사람이다. 사람들과 만나 깔깔거리며 수다떨기 좋아하고, 무엇이든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자신의 장애에 대해 의식하거나 괴로워하지도 않는다. 임신했을 때도 그는 ‘낳아야 하나 마나’ 그런 걱정 같은 건 하지 않았다. 당연히 아기는 낳아야만 했다.
“제가 늘 앉아만 있는 몸이잖아요. 혹시라도 뱃속의 아기가 불편하지 않을까 걱정이 됐어요. 의사선생님을 찾아갔더니, 아기는 자기가 다 알아서 움직이니까 걱정 말라고 하시더라고요. 임신기간 동안 안 힘들었어요. 워낙 건강체질이라서 만삭일 때도 운전하면서 회사를 다녔는걸요(웃음). 제왕절개 수술로 아이를 낳은 후가 더 힘들었어요. 회복이 느려서 한 20일 정도를 꼼짝도 못 하고 누워 있어야만 했거든요.”
그가 몸조리하는 동안 갓 태어난 2.8Kg의 지환이를 돌본 건 남편 문평윤씨(34)였다. 아내와 마찬가지로 만화가인 문씨는 몸이 불편한 아내의 마음을 헤아려 지환이가 어릴 때는 기저귀 빨래는 물론 젖 먹이는 일을 대신하기도 하면서 적극적으로 육아에 동참했었다고.
“요즘은 예전만큼 육아에 신경을 안 써요. 아무 탈 없이 애가 자라서 그러는 건지…. 육아는 당연히 엄마 몫이라고 맡겨놓는 것 같아서 약이 오른다니까요. 이제 보니 애 아빠도 전형적인 한국 남자인가 봐요.”

만화 곁들인 육아 에세이 낸 만화가 조숙영

아들 지환이의 갓난 아기시절 모습. 지환이는 어릴 때부터 순해 엄마 속을 썩인 일이 없다고.

아내의 뼈아픈 지적에도 문씨는 웃고만 있다.
11년 동안 회사를 오가며 일했던 조씨지만 2년 전부터는 집에서 작업을 하고 있다. 이유는 육아 문제 .
“아이가 27개월쯤 됐을 때 아이를 돌보던 아주머니께서 그만두셨어요. 어쩔 수 없이 가까운 놀이방에 보냈는데 애가 통 적응을 못 하고 힘들어하는 거예요. 지환이를 키우면서 그때가 제일 힘들었죠. 퇴근 시간은 빨라야 저녁 8시니까 아이를 도와줄 수도 없고요. 7개월 정도 아이를 놀이방에 맡기다가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서 결단을 내렸어요. 일하는 것도 좋지만 아이를 잘 키우는 것이 우선이라고 마음먹었지요.”
조씨는 66년 서울 답십리에서 1남7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한살 무렵 소아마비를 앓았다. 그 때문에 휠체어 신세를 졌지만 그는 남들 이상으로 행복한 어린시절을 보냈다. 많은 형제들이 그를 끔찍이 아껴주었기 때문이다. 학창시절 그의 별명은 ‘마당발’. 워낙 활달한 성격에 대인관계가 좋아서 붙여진 별명이었다. 몸은 불편했지만, 가보고 싶은 곳은 친구들과 함께 어디라도 찾아갔고, 그림 그리는 실력을 눈여겨본 고등학교 선생님의 격려로 미술상도 꽤 탔던 그였다. 미술 선생님이 되고 싶었던 그는 그림 실력으로 당당히 사범대학에 입학하기를 꿈꿨다. 그러나 장애인은 입학할 수 없다는 규정에 부딪혔다. 그가 장애 때문에 꿈을 접어야 했던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러나 좌절하지 않았다. 그를 믿고 인정해준 어머니를 생각해서라도 좌절할 수는 없었다.
학창시절 별명‘마당발’, 장애로 절대 좌절하지 않아
“어머니는 꼭 공부가 중요한 것은 아니라고 원하는 일을 하라고 늘 격려해주셨어요. 아주 부유한 편은 아니었지만, 제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형제 가운데 가장 먼저 차를 사주실 정도였죠. 기동력이 없으면 사회생활을 하지 못할 거라고 예상하셨던 거예요.”
그에게 지지목과 나침반 역할을 해주었던 어머니는 당뇨병으로 15년 전에 돌아가셨다. 엄마뻘인 첫째 언니가 어머니를 여읜 슬픔을 다독여주었다. 삶의 고비고비에서 아픔을 겪을 때마다 그는 손잡을 가족이 있다는 데 누구보다 감사하고 있다.
정식으로 그림 공부를 하지 않았지만 실력이 좋았던 조씨의 첫 근무처는 인테리어 회사. 잠시 일을 접고 쉬고 있을 무렵, 뜻밖에도 무협만화의 대가 이재학 화백이 그를 찾아왔다. 그림 솜씨에 대한 소문을 들었다면서 함께 일하고 싶다고 제안했다. 그는 무협만화 특유의 힘차고 화려한 배경그림에 끌려 선뜻 이화백의 화실로 출근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화실로 올라가는 데 계단이 많았어요. 그래서 늘 누가 도와줘야 했는데, 이이가 늘 거리낌없이 절 안아서 옮겨주곤 했어요. 그 모습에 끌렸죠.”
남편보다 두살 연상이라는 것도, 그가 장애를 가지고 있다는 것도 두 사람의 사랑을 막지는 못했다. 그들은 오랫동안 친구처럼 만나고 연애한 끝에 결혼했다. 다행히 신앙심이 깊었던 시집에서도 큰 반대는 없었다.
“전 정말 복이 많은 사람 같아요. 대부분의 장애인들이 겪게 되는 실패나 좌절을 별로 겪지 않았으니까요. 다른 장애 여성들과는 다르게 일반회사를 다니기도 했고, 지금은 전문직 여성으로 일하고 있잖아요. 또 결혼도 수월하게 했죠. 아이도 낳았고요. 이 모든 건 다 제 주변에 늘 고마운 분들이 많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언제나 다른 사람들이 저보다 먼저 손을 내밀어주셨거든요.”
조씨가 장애를 자각하는 경우는 도리어 일상에서의 사소한 부분이라고 한다. 예컨대 빨래걸이대가 높아 손이 잘 닿지 않거나 할 때뿐이다. 하지만 그런 불편함도 합리적으로 해결하려고 노력한다. 조씨의 집 부엌 싱크대가 유난히 나지막한 것은 휠체어에 앉아서도 편안하게 설거지를 할 수 있도록 그가 결혼하자마자 신혼집 부엌 개조를 감행했기 때문이다.

만화 곁들인 육아 에세이 낸 만화가 조숙영

남편 문평윤씨와 아들과 함께. 이들 가족은 내년이면 ‘새 식구’를 맞이하게 된다.

장애를 장애로 보지 않고, 이처럼 환경을 적극적으로 변화시켜가는 그의 힘은 대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그는 ‘가족’이라고 잘라 말한다. 장애가 있다고 해서 과보호하거나 부끄러워하는 일 없이 보통아이들처럼 대해주고 좋아하는 일을 향해 도전할 수 있도록 늘 사랑과 격려와 관심으로 이끌어준 부모와 형제들, 그리고 그런 자신을 자랑스러워하는 남편과 사랑스런 아들이야말로 그가 씩씩하게 세상 속으로 발걸음을 내딪게 만드는 근원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남편 문씨는 인터뷰하는 내내 “글도 잘 쓰고 그림도 잘 그린다”며 아내 자랑에 침이 마를 새가 없었다. 최근 독립적으로 화실을 차리고 <드래곤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아라비안 나이트>를 펴내 학습만화가로 데뷔한 그는 게임 캐릭터 그리는 일도 병행하고 있다.
“화실에서 함께 일할 때 보면 아내는 항상 수다를 떨면서 놀고 있어요. 그런데 나중에 보면 일할 건 다 했더군요. 심지어 남자보다 더 강한 그림을 그려놓는 거예요. 만화작업이 힘든 데 비해 박봉인데도 대부분 만화를 좋아해서 견디고 있는 건데, 이 사람은 만화를 안 좋아하거든요. 그러면서 이 일을 하고 있으니 진짜 특이해요(웃음).”
그러면서 아내가 그렸다는 만화책을 직접 가져와 보여주었다. 조씨의 대표작은 일본으로 수출한 단행본 <용응복명>, 만화잡지에 연재된 <환홍령>과 스포츠 신문에 실렸던 <광사풍>. 그가 만화에서 담당하는 건 배경 그림. 화산이 터지는 장면이나 협객들의 살벌한 결투 장면, 광활한 역사적 배경 등 선이 굵으면서도 역동적인 그림에 특히 재능을 발휘한다.
부부가 같이 일하면 좋은 점이 많다고 한다. 9년 동안 한 화실에서 일한 그들은 호흡이 척척 맞는다. 이번에 펴낸 남편의 학습만화는 아내 조씨가 콘티를 담당했다.
“전 집사람의 밝은 면이 참 좋아요. 보통 그림 그리는 사람들을 보면 자기 세계에만 빠져들기 쉬운데, 이 사람은 그런 면이 없어요. 늘 주위 사람들과 농담하고 잘 어울려가며 일을 하거든요.”
문씨는 만화작업의 특성상 퇴근 시간이 따로 없는 점이 가장 힘들다고 말했다. 출근 시간은 늦지만, 일을 하다 보면 밤샘 작업도 하고 밤늦게 퇴근하게 되니까 가족들을 위한 시간을 내지 못하는 점이 늘 마음에 걸린다고. 그래서 늘 미안함을 느낀다는 문씨는 되도록이면 일요일은 가족과 함께 보내기 위해 의식적으로 노력하고 있다고.
“집안일이나 아이 키우는 일을 많이 도와주지 못해서 늘 미안하죠. 또 아내는 애정표현을 잘 하지만 저는 잘 못하는 편이거든요.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말이죠. 그것도 미안해요.”
서로를 아끼고 배려하는 이들 부부에게는 책 출간과 더불어 또 하나의 기쁜 일이 생겼다고 한다. 오랫동안 기다렸던 둘째 아이의 임신 소식. 책을 내기 위한 산고는 또다른 생명을 위한 산고로 이어져 기쁨을 더하고 있다.
“기회만 된다면, 앞으로도 계속 책을 내고 싶어요. 한번으로 끝나는 건 읽어주는 독자들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요. 다음엔 우리 주부들이 남편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알 수 있도록 남자들의 이야기를 내보면 어떨까요?(웃음) 물론 새 식구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마무리 지은 다음의 일이지만요.”
9개월 후면 세상에 나올 새 식구를 기다리는 조씨 부부의 얼굴은 설렘으로 가득했다. 직접 만화를 그리며, 만화 속 주인공처럼 재미있게 살아가는 조숙영, 문평윤 부부. 그의 육아 에세이만큼이나 감동적인 이들 부부의 삶이 각박한 세상에 따뜻한 온기를 전해주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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