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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인물 & 화제 │따뜻한 사람들

피를 나누는 희귀 혈액형 봉사모임 Rh 네거티브 봉사회

“한밤중에 택시 타고 달려가 헌혈한 환자가 살아났을 때 보람 느껴요”

■ 기획·정지연 기자(alimi@donga.com) ■ 글·조희숙 ■ 사진·박해윤 기자

2002. 10. 09

소수의 사람들은 서로 단단한 끈으로 연결되어 있게 마련이다. 희귀 혈액형 Rh 네거티브 봉사회도 바로 그런 사람들의 모임이다. 피를 구한다는 TV 자막만 보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병원으로 달려가 사랑의 피를 나누는 그들. 우리나라 인구 중 0.3%에 속한 사람들의 가슴 따뜻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피를 나누는 희귀 혈액형 봉사모임 Rh 네거티브 봉사회
“저희는 피로 뭉친 사람들이에요.”
서울 서소문 국립중앙혈액원에 모인 Rh 네거티브 봉사회 회원들. 이들은 국내 희귀 혈액형인 Rh 네거티브 보유자들로 구성된 순수 봉사단체로 ‘피를 나눈’ 가족처럼 지내는 사이다.
그들이 이처럼 끈끈한 정으로 이어진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회원들 대부분이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Rh 네거티브 봉사회의 도움을 받아 극적으로 살아났거나, 그와 같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준 이들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생명의 은인들끼리 뭉친 셈이다.
“크리스마스 이브였는데 라디오에서 어떤 할머니가 교통사고를 당해 급하게 Rh 네거티브 혈액형을 찾는다는 방송이 나오더라고요.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병원으로 달려갔죠. 할머니에게 수혈을 해드리고 돌아오는데 왠지 모르게 흐뭇했어요.”
고교시절 전교생 중 혼자만 Rh 네거티브여서 놀림도 많이 받았다는 김판원씨(43, 전국협의회회장). 그는 이 일을 계기로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봉사회에서 본격적으로 활동하게 되었다고 한다.
중앙혈액원 Rh 네거티브 봉사회 간사를 맡고 있는 이윤희씨(45)는 가입 동기가 조금 특별하다. Rh 네거티브 혈액형을 가진 사람이 본인이 아니라 두 딸들이기 때문이다. 두 딸들이 초등학교에 다닐 때 Rh 네거티브라는 것을 알았다는 이씨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자진해서 봉사회 회원으로 가입했다고 한다.
“그때는 딸들이 어렸으니까 봉사회 활동을 할 수가 없어서 제가 대신 봉사회 회원으로 등록했죠. 지금은 두 딸 모두 잘 자라서 성인이 되었고 긴급 헌혈이 있을 때마다 저랑 택시 타고 병원으로 달려가곤 해요.”
“Rh 네거티브 여성도 임신할 수 있나요?”
올해로 30년째 되는 Rh 네거티브 봉사회가 처음 모이기 시작한 것은 지난 73년. 당시만 해도 각 학교나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헌혈 제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필요한 혈액은 전적으로 매스컴에 의존하거나 음성적으로 ‘거래’되곤 했었다. 그러니 처음 뜻을 같이한 Rh 네거티브 보유자 10여명이 봉사회를 만들었을 때만 해도 그 취지는 ‘서로의 안위를 위한 것’ 즉 위급할 때 서로 피를 나눠주기 위함이었다. 그후 혈액원 중심으로 Rh 네거티브 보유자들이 알음알음 모이기 시작하면서 봉사회는 거대 단체로 발전했다. 현재 우리나라 Rh 네거티브 보유자는 약 10만명 정도. 이중 자신이 Rh 네거티브라는 걸 아는 사람은 1만 명에 해당하는데, 봉사회에 가입한 회원은 그중 절반인 약 5천명에 이른다고 한다.

피를 나누는 희귀 혈액형 봉사모임 Rh 네거티브 봉사회

회원이 약 5천명에 달하는 Rh 네거티브 봉사회.

“헌혈 캠페인에 나가 보면 자신이 네거티브인지 아닌지도 모르는 사람이 너무 많아요. 게다가 40대 이상은 몸이 아파서 병원에 가기 전에는 거의 모르고 지낼 정도죠. 특히 여자들은 대부분 출산을 앞두고 모임에 들어오게 된 경우가 많아요. 위기 상황이 닥쳐야 봉사회를 찾게 되는 거죠.”
남부혈액원 Rh 네거티브 봉사회 총무 김경숙씨(43)의 말처럼 여성 회원들 대부분은 임신을 통해 자신의 혈액형을 알게 됐고 모임에도 가입한 경우가 많다. 하지만 회원들은 좀처럼 가입 동기에 대해 밝히기를 꺼려한다. 이유는 Rh 네거티브 보유자에 대한 잘못된 편견 때문이다.
“여성이 Rh 네거티브 보유자일 경우 아이를 낳을 수 없는 것 아니냐고 오해하더군요. 심지어는 간호학과에 다니는 여학생이 네거티브 혈액이어도 아이를 가질 수 있느냐고 물어오는 경우도 있어요. 그만큼 Rh 네거티브에 대한 편견이 큰 거죠. Rh 네거티브 혈액형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시급해요.”
중앙혈액원 Rh 네거티브 봉사회 회장 백승엽씨(41)는 그런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너무 답답하다고 한다. 남부혈액원 Rh 네거티브 봉사회 총무 김광희씨(47)도 “20년 전만 해도 어려움이 있었지만 지금은 원하는 대로 아이를 낳을 수 있다”며 Rh 네거티브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이 야속하기까지 하다고 한다.
물론 Rh 네거티브 여성이 Rh 포지티브 여성에 비해 출산이 자유롭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Rh 네거티브 여성이 Rh 포지티브 남성과 결혼해도 출산에 지장이 없다는 것은 일반인에게 제대로 인식되어야 할 부분임에 틀림없다.
헌혈하는 순수한 마음을 몰라줄 때가 제일 서운해
Rh 네거티브 봉사회의 주된 활동은 긴급 헌혈이다. 평균 위급환자의 발생 건수는 한달에 4∼5건 정도. 봉사회는 전국 네트워크망이 잘 갖춰져 있어 필요하다면 제주도에서도 항공편으로 피를 공수해오기도 한다. 가장 보람을 느낄 때는 물론 위급환자가 그들의 도움으로 회복되었을 때다. 백씨는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으로 꼬마 소아암 환자를 꼽았다.
“소아암에 걸린 다섯살짜리 꼬마였는데 혈소판이 떨어질 때마다 긴급수혈을 받아야 했어요. 그 아이 어머니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울면서 전화를 해오면 바로 회원들이 병원으로 달려가서 헌혈했죠. 그렇게 30회 정도 헌혈하러 갔었을 거예요. 지금은 상태가 좋아져서 저희 봉사회 최연소 회원이 되었어요.”

반면 중앙혈액원 Rh 네거티브 봉사회 총무 김기섭씨(35)는 안타까운 경우도 많다고 한다.
“급하게 제주도에서 올라온 Rh 네거티브 O형인 긴급 환자였어요. 혈소판이 당장 필요해서 동부, 남부, 중앙에 있는 회원들을 급하게 수배해서 40명 정도가 달려가 릴레이 헌혈을 했었는데 결국 고인이 되셨죠. 지금 생각해도 너무 안타까워요.”
봉사활동 중에 회원들의 순수한 마음에 상처를 주는 일도 종종 발생하곤 한다. 위급한 환자 소식을 듣고 달려갔는데 은근히 후사 이야기를 건네는 보호자들을 만날 때가 그런 경우다. 김기섭씨도 얼마전 그런 경험이 있었다.
“저희는 병원으로 달려가는 차비도 따로 받지 않고 헌혈할 때도 개인의 신상에 대해서는 일절 비밀로 하는 것이 원칙이거든요. 정말 순수한 마음으로 달려가는 것인데 가끔 보호자들이 따로 불러 사례를 하겠다고 할 때가 있어요. 그럴 때는 기분이 좀 그래요.”
봉사회원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은 무례한 보호자뿐이 아니다. Rh 네거티브 봉사회에 대해 무지한 병원 관계자들도 그들의 속을 태우게 한다. 일반적으로 병원에서 긴급 혈액이 필요할 때는 1차적으로 병원 내 혈액은행의 지원을 받게 된다. 지원이 안 될 경우 각 혈액원을 통해 Rh 네거티브 봉사회로 도움을 요청하게 된다. 하지만 대부분 병원에서는 이와 같은 채널을 알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다고.
“딸이 병원에 입원했을 때 수술해야 할 것 같다고 해서 의사한테 수혈을 하게 될 것 같으면 제가 직접 구하겠다고 했어요. 그랬더니 어떻게 할 수 있냐며 자기네가 구하겠다고 하더군요. 병원측에서 봉사회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다는 얘기죠.”
이윤희씨 말처럼 병원뿐 아니라 일반인에게도 Rh 네거티브 봉사회는 낯설다. 때문에 보호자들은 혈액이 필요하다는 병원측 설명만 듣고 TV나 매스컴을 이용해 무작위로 Rh 네거티브 혈액을 구하게 된다. 이럴 때의 문제는 회원과 비회원까지 동원해 무작정 헌혈하게 한 후 필요 이상의 혈액이 모이면 대부분 유효기간이 지나버려 결국 폐기처분된다는 점. 그렇게 되면 정말 위급한 환자가 생겼을 때 도움을 줄 수 없다고 봉사회원들은 입을 모은다.
Rh 네거티브 봉사회 회원들에게는 저마다 든든한 후원자가 있다. 바로 회원들의 가족들. 남부혈액원 Rh 네거티브 봉사회 박점출 회장(54)은 “봉사회도 남편이 알려줘서 가입하게 되었다”며 가족들의 이해가 없으면 봉사회에서 활동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회원끼리 체육대회나 사적인 친목 모임을 자주 갖고, 서로의 경조사를 챙기며 애틋한 정을 나누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지난 8월말 Rh 네거티브 봉사회는 대한적십자사 산하 정식 봉사단체로 발족했다. 긴급헌혈뿐 아니라 Rh 네거티브 혈액형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심어주고 싶다는 Rh 네거티브 봉사회원들. “더 많은 Rh 네거티브 보유자가 봉사회원으로 참여했으면 해요.” 그들의 마지막 당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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