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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 인터뷰 | 심상정 정의당 대표 남편 이승배 씨와의 수다

“아내는 이 사회를 썩지 않게 하는 소금 같은 존재, 주부 남편으로 살아온 세월에 후회 없어요”

editor 김지영 기자

작성일 | 2017.02.27

‘2017년 특별 기획’ 유력 대선 후보 배우자 릴레이 인터뷰 4
그동안 세 차례 대선 후보 부인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놓친 이가 있었다. 유력 대선 후보 가운데 홍일점인 심상정 정의당 상임대표의 남편 이승배 씨다. 심 대표와 같은 서울대학교 출신 노동운동가였던 이씨는 2004년 심 대표가 국회에 진출한 후 스스로 주부가 됐다. 그동안 많은 이들이 궁금해했으나 공개적으로 나서기를 꺼려했던 이씨가 2월 14일 〈여성동아〉와 단독으로 만났다. 이씨가 언론 매체와 인터뷰를 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최초 인터뷰 | 심상정 정의당 대표  남편 이승배 씨와의 수다
2월 16일, 정의당의 19대 대통령 선거 후보로 심상정(58) 상임대표가 선출됐다. 대선 출마 선언은 앞서 1월 19일에 이뤄졌다. 지난 대선에서는 문재인 민주당 후보 지지 선언을 하고 중도 하차했지만 이번에는 끝까지 완주하겠다는 의지를 불태운다. 목청 높은 남성 국회의원들에게도 밀리지 않을 만큼 걸걸한 성격을 지녀 정치권에서 그는 ‘여걸’로 통한다. 지난해 7월 창단식을 가진 그의 팬클럽 이름도 심상정과 걸 크러시(여성이 다른 여성을 선망하거나 동경하는 마음)를 합친 ‘심크러쉬’다.

서울대학교 역사교육학과 78학번인 심 대표는 1980년 서울대 안에 총여학생회를 처음 만들었고 1985년 구로동맹파업을 주도했다. 현 민주노총의 발판인 전국노동조합협의회(이하 전노협) 등에 몸담으며 노동운동가로 활약한 그는 2004년 민주노동당 초선 의원으로 국회에 입성해 야권 최고의 스타 중 한 명이 됐다. 대학생 아들을 둔 결혼 26년 차 워킹맘인 그가 지난 13년 동안 정치에 매달릴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남편 이승배(61) 씨의 든든한 지원 덕분이다. 이씨는 심 대표가 금배지를 단 후 스스로 집안 살림을 도맡으며 주부로 살고 있다.

이씨는 1956년 전북 정읍 태생으로, 고교 비평준화 시절 엘리트 코스로 불리던 KS(경기고등학교·서울대학교)를 나왔다. 서울대 동양사학과 75학번이지만 시위를 하다 무기정학을 당해 1983년 졸업했다. 이후 노동운동의 길을 간 그는 1992년 결혼식을 올리고 이듬해인 1993년 아들 우균(24) 군을 얻었다. 키가 훤칠하고 선한 미소를 지닌 그를 2월 14일 오후, 심 대표의 지역구인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의원실에서 만났다. 그는 매주 토요일마다 촛불 집회에 참석하고 있다.



▼ 집회에 매주 참석하시는 이유가 있습니까.

건전한 시민들이 갖고 있는 생각이 궁금해서 가기 시작했는데, 촛불 집회에 참석한 분들을 보면 맑고 밝은 기운이 느껴져요. 그분들은 조금이라도 더 나은 사회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어요. 그런 공감의 장을 만들다 보니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인 축제가 됐죠. 날씨가 추워지면서 참석자의 수가 줄긴 했지만 그럼에도 나오는 분들을 보면 참 씩씩해요. 그분들이 만들어가는 공감대가 좋아요.

▼ 현 대통령을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듭니까.

거짓말을 하고 상식에서 벗어난 분이, 국민들의 마음을 모르는 분이 너무 버티는 것 같아요. 초등학생들도 고개를 절레절레할 정도예요.

▼ 심상정 대표는 야당 대표 가운데 가장 먼저 탄핵을 외쳐서 국민적 지지를 받은 바 있습니다. 부부는 일심동체일까요.

국민이 바라는 탄핵을 소신 있게 외쳤을 때 정치인으로서 바람직한 태도라고 생각했어요. 민심을 바로 읽고 그 뜻을 받드는 것이 국회의원의 도리니까요. 심 대표가 촛불 집회 초반에 대통령 퇴진을 외칠 때도 공감했고요.  

▼ 정의당이 탄핵 정국에서 존재감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국회에서 탄핵 소추가 가결될 때까진 정의당이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했어요. 그런데 2백34석의 압도적인 숫자로 가결된 후 대선 후보들에 대한 관심이 뜨거워지고 새누리당이 분열돼 정의당이 5당으로 밀리면서 존재감이 약화됐죠. 하지만 탄핵이 될 때까지 방심해서는 안 된다는 게 정의당의 생각입니다. 정의당이 다른 당보다 먼저 경선을 진행한 것도 조기에 후보를 확정지어 앞으로 전개될 정치 일정에 적극 대응하기 위해서죠.

▼ 심 대표와 노회찬 정의당 원내대표를 부부로 아는 사람들도 꽤 있어요(웃음).

그런 이미지로 인식되는 게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면 괜찮아요. 그렇다고 부부 사이가 갈라지는 건 아니니까요. 두 사람이 그만큼 잘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생각해요. 노회찬 대표는 한국 진보 정치가 낳은 훌륭한 정치 지도자예요. 더 잘되기를 바랍니다. 노 대표가 경기고 1년 후배여서 개인적으로도 서로 잘 알아요. 제가 한창 노동운동을 할 때 알음알음으로 알았죠.

▼ 우리 사회의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여혐·남혐에 대한 두 분의 생각이 궁금합니다.  

여성과 남성이 다른 것에 대해서는 서로가 존중하고 이해해야 하는데 차별과 많이 혼동하는 것 같아요. 차별은 없어져야 합니다. 특히 성, 인종, 종교, 사상 때문에 차별받는 것이 용납돼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이런 다름에 대한 인식을 갖지 못하고 자신이 믿는 가치를 절대적인 기준으로 여기기 때문에 남성에 대한 극단적 적대 의식, 여성에 대한 극단적 적대 의식으로 나타나는 것 같아요. 하지만 표현의 자유가 무한정 열려 있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본의와 다르게 왜곡될 수 있으니까요.  

▼ 심 대표가 서울대 다닐 때 찍은 사진을 보고 네티즌들이 ‘진보 수애’로 부르던데, 개인적으로 심 대표에게 붙여주고 싶은 애칭이 있나요.

아내가 젊었을 때 모습에 배우 수애 씨 같은 느낌이 있대요. 요새는 그 느낌이 아니지만요(웃음). 붙여주고 싶은 애칭은 딱히 생각나는 게 없는데, 아내를 보면 시련 속에서 피어나는 눈꽃 같아요.

▼ 두 분이 서울대 운동권 선배인 김문수 전 경기지사의 소개로 처음 만났다고 들었습니다.

김문수 선배가 저희 둘을 엮어서 만남의 자리를 주선한 건 아니에요. 1985년에 제가 노동현장을 경험하려고 화물차 운전을 할 때 저와 같은 이유로 버스 기사로 일하던 박노해 시인과 자주 만났어요. 그해 구로동맹파업이 일어났는데, 그 파업을 주도한 사람이 심상정이라고 박노해 시인이 알려줬어요. 그때 아내의 이름을 처음 들었고,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도 알게 됐죠. 그런데 그해 겨울 김문수 선배에게서 “너랑 심상정하고 만나면 좋겠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그 선배가 다리를 놔준 건 아니지만 그 말을 듣고 아내에게 더 관심이 생긴 건 사실이에요. 그러다 이듬해인 1986년 가을에 노동운동을 하는 분들과 모인 자리에서 아내와 첫 대면을 했죠. 당시 아내는 특급 수배자였어요. 경찰에서는 구로동맹파업의 배후 조종자로 보고 몇 계급 특진에 5백만원의 현상금까지 걸어둔 상태였죠. 김문수 선배는 5·3인천항쟁으로 당시 남영동 보안사령부에 끌려가 그 자리에 없었는데, 그 선배를 고문할 때 “심상정이 어디 있느냐?”고 추궁했대요. 물론 입을 열지 않았으니까 아내가 끌려가지 않았겠죠.

▼ 김 전 지사의 요즘 행보는 뜻밖입니다.

너무 벗어난 길로 가신 게 아닌가 싶어요. 그 선배를 보면 굉장히 다양한 생각이 들어요. 예전에는 아주 권위 있고 존경받는 선배였고 어마어마한 분이었는데, 오늘날 와서 좀 추해지신 것 같아 안타까워요.

최초 인터뷰 | 심상정 정의당 대표  남편 이승배 씨와의 수다

1 1992년 서울 종로구 수운회관에서 결혼식을 올리는 신부 심상정과 신랑 이승배.
2 새댁 심상정이 아들, 남편과 함께한 나들이 모습.
3 ‘좌’승배, ‘우’회찬 사이에서 웃고 있는 젊은 날의 심상정 대표.
4 제주도 신혼여행중의 이승배 심상정 부부.

▼ 심 대표의 첫인상은 어땠나요.

수배자 신분이고 그간의 활약을 들어서 여러 환상을 갖고 있었는데, 크지도 작지도 않고 단정한 외모였어요. 그런데 자신의 생각을 논리적으로 펼치는 걸 보면서 생각했던 그대로구나 했죠.

▼ 이성으로서 호감이 갔나요.

첫눈에 딱 꽂힌 건 아니었는데 그다음 해인 1987년 6월 항쟁이 일어났을 때 서울 혜화동에 있는 서울대 의대 앞 횡단보도에서 우연히 스치듯 다시 만났어요. 그때는 서로 일정이 있어서 가볍게 인사를 하고 헤어졌는데, 그 당시 노조가 전국적으로 마구 생길 때여서 1988년 이후에는 공동 집회 회의에서 자주 만나며 교제를 하게 됐지요. 저도, 심 대표도 나중에 노조 지원 활동을 하는 단체에서 일했거든요. 심 대표는 1990년에 생긴 전노협, 저는 1988년 발족한 전국노동운동단체협의회(전국노운협)에서요.

▼ 노동운동을 하며 사랑이 싹텄군요.

1989년경에 제가 사귀자고 했어요. 1990년 전국노운협의 관계자로 남산 안기부에 연행된 적이 있는데 조사관이 저더러 “심상정이 네 애인이냐?”고 묻더라고요. 모른다고 시치미를 뚝 뗐죠. 그랬더니 “여기가 어딘 줄 알고 거짓말을 하느냐. 같이 다니는 거 다 봤다”는 거예요. 민간인 사찰을 한 거죠. 사진도 찍어둬서 부정할 수 없을 정도였어요. 결국 안기부에서 인정한 커플이 됐죠(웃음).  

▼ 심 대표의 어떤 면에 끌리셨습니까.

그 사람이 갖고 있는 소신이 제가 가진 세계관이나 신념과 잘 통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심 대표에게 특별히 배운 건 성 평등에 대한 의식이에요. 노동운동을 하던 옛날 선배들은 여성을 옥바라지해주는 대상 정도로 여기는 가부장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는데 아내를 만나면서 천박한 성 의식이 많이 바뀌었어요.

▼ 데이트는 어떻게 하셨나요.  

가난한 연인이니까 가끔 만나면 차 한잔 마시고 같이 걷고 하는 게 데이트였어요. 심 대표가 걷는 걸 많이 피곤해했던 기억이 나요.

▼ 호칭은 뭐였나요.

저는 ‘상정 씨’, 아내는 ‘선배’라고 했던 것 같아요.

▼ 프러포즈도 먼저 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1991년인가에 제가 프러포즈를 했는데 이 사람이 답을 안 하더라고요. 다방에서 만나 “평생 동반자로 같이 가자. 둘이 앞을 보고서 같이 가고 싶다”고 멋진 말로 고백했던 것 같은데 아내가 답을 안 해서 상당 시간은 만남이 소원해졌었어요. ‘이건 뭔가? 내가 마음에 안 드나?’ 했어요.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다가가는 것도 성격상 내키지 않았어요. 지켜보는 과정이 길어지니까 마음에서 지워야 하나, 하다가 서로 마음을 확인하게 됐죠. 아내도 작심을 하고 나서는 함께할 인생에 대해 많이 생각하고 계획하고 그랬어요. 그쪽도 급했으니까요. 하하하.

▼ 양가에서는 두 분의 결혼을 환영했나요.

결혼 당시 저는 우리 나이로 37세, 아내는 34세였어요. 그때만 해도 노총각, 노처녀였으니까 양가 모두 대환영이었죠. 장인, 장모가 엄청 좋아했어요. 아내가 시집을 안 가고 있어서 걱정이 크셨던 모양이에요.

▼ 양가 어른들은 어떤 일을 하셨나요.

장인은 초등학교 교사셨고 제 부친은 소상인이셨어요. 양가 어머님들은 주부셨고요. 처가는 저희 집보다 상대적으로 자유스러운 분위기였어요. 저희 집이 경제적으로는 더 가난했죠.

▼ 결혼식과 신혼여행에서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었을 것 같아요.   

결혼식을 1992년 가을 서울 낙원동에 있는 허리우드극장 뒤 수운회관에서 했는데, 늦게 결혼해서 그런지 하객이 많이 오셨어요. 그러고 나서 후배 가족과 제주도로 신혼여행을 함께 갔어요. 대학 1년 후배가 결혼해 아이까지 낳았는데 결혼식을 못 해서 한이 됐나 봐요. 저희 결혼을 계기로 그 후배도 신혼 아닌 신혼여행을 하게 됐죠. 그때는 요즘처럼 여행 상품이 많지 않을 때인데 후배가 제주도에 아는 분이 있어서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무엇보다 제주도 사람들만 아는 독특한 곳을 볼 수 있어서 좋았어요(웃음).

▼ 결혼 후 출판·기획 분야에서 일하셨더군요.  

제가 결혼할 무렵 세계사가 격변했어요. 전국노운협에 몸담았던 사람들이 다른 길을 찾거나 새로운 변화에 맞는 진로를 모색했어요. 심 대표가 몸담았던 전노협은 계속 건재했는데 저희 조직은 분열돼 제가 할 일이 없어졌죠. 그때 심 대표와 연관이 있는, 주인 없는 조그만 출판사 운영을 제가 맡았어요. 제가 해오던 일의 연장선으로 생각했어요. 결혼도 했고, 당분간 먹고는 살아야 하니까요. 언젠가 다시 노동운동을 해야지 했는데 생각대로 되지 않았어요. 전심전력을 다해도 될까 말까인데 확고한 의지를 갖고 시작한 일이 아니어서 출판사 일에 잘 집중하지 못했거든요. 그래도 출판·기획 일을 10여 년간 했어요. 2000년대 초반까지요.

최초 인터뷰 | 심상정 정의당 대표  남편 이승배 씨와의 수다
▼ 2004년 심 대표가 민주노동당 국회의원이 된 후 집안 살림을 도맡았다고 들었어요.

당시 민주노동당도 처음 원내에 들어간 터라 정비돼 있지 않았고, 당내에 초선 의원들뿐이어서 노하우를 알려줄 선배도 없었어요. 심 대표가 뭐든 새롭게 만들어가야 하는 상황이어서 할 일이 정말 많았어요. 그래서 제가 집안일부터 어느 때는 비서, 보좌 역할까지 했어요. 그게 제게 주어진 소임이라 여겼어요. 제가 똑 부러지게 정치하겠다고 나선 게 아니니 한 사람이라도 확실하게 세우려고 스스로 주부가 된 거죠. 일을 잘할 수 있도록 심 대표를 세우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겠다는 판단에서요. 요새 보면 심상정을 통해 자신의 요구나 열망을 실현하고자 하는 분들이 정말 많더라고요. 심 대표의 뜻에 공감하고 지지하는 분들이죠. 지지자들이 있으니 심 대표는 개인이 아닌 거예요. 그런 심 대표에게 도움이 될 만한 일을 찾아 하는 게 제 일이죠.  

▼ 주부가 된 후 집안일만 하신 게 아닌가요.

집안일을 하는 건 맞지만 전적으로 가사에만 매달리는 건 아니에요. 취업이나 부업을 하면서, 어떤 때는 맞벌이를 하기도 해요. 아내가 국회에 들어가기 전에는 빨래와 설거지를 제가 하고 요리나 식사 준비는 아내가 하는 식으로 가사를 분담했는데, 아내가 의정 활동을 시작하고 나서는 제가 그 일들을 모두 맡았어요,

▼ 주부로서 고충은 뭔가요.

정말 살림 잘하는 분들이 많은데 제가 감히 ‘주부’라는 말을 써도 될지 모르겠어요. 저는 자질 미달이거든요. 집에서 가끔 제 밥을 챙겨 먹는 정도예요. 다만 맞벌이를 하던 기간에는 육아 문제로 어려움이 많았어요.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겨도 끝나는 시간을 도무지 맞추기가 힘들었거든요. 서로 피 마르는 거죠. 아이가 스트레스를 많이 받을 것 같아서 나중엔 아이를 처가에 맡기고 주말에 보러 갔어요. 아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는 방과 후 인근에 사는 후배 집에 있게 했고요. 아이에겐 미안했지만 그때는 둘 다 일을 하고 있어서 어쩔 수 없었어요.

▼ 가계 지출은 누가 관리하나요.  

제가 합니다. 심 대표가 의원 세비를 월급으로 받아오면 살림하고 아이 키우는 데 쓰는데 모자라는 것은 제가 부업 형태로 일해서 충당하고 있어요.

▼ 생활비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건 뭔가요.  

아무래도 아이 교육비죠. 학업을 다 마치지 못했으니까요. 아들이 (대안학교인) 이우학교를 졸업하고 1년 재수해서 경희대학교 철학과에 입학했는데 지금 4학년이에요. 졸업하고 나서 군대에 갈 것 같아요.  

▼ 아드님을 대안학교에 보낸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아이가 어려서부터 부모의 보살핌을 못 받아서인지 사춘기로 접어든 초등학교 고학년 때 그다지 밝지 않았어요. 그래서 일반 중학교 대신 대안학교에 보낸 거예요. 입시 위주로 교육하지 않아 학습 경쟁력이 떨어질 수는 있지만 분위기가 자유스럽고 하고자 하는 것들을 다채롭게 경험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아이와 잘 맞을 것 같았어요. 아이를 그 학교로 보내면서 집도 거기서 가까운 경기도 용인 수지로 이사했고요. 고등학교 과정도 이우학교에서 마쳤는데 그 학교를 다니면서 아이가 많이 밝아졌어요. 그때 인문학적 관심이 커져 대학도 철학과로 갔는데 요즘은 사회문제에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죠.

▼ 심 대표와 사회 이슈나 정치 현안에 대해 집에서도 자주 대화를 나누시나요.

심 대표가 보통 새벽 5시 반에 일어나 오전 6시 전에 집을 나가요. 밤 10시 넘어서 귀가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요. 그래서 집에서는 말을 많이 안 걸어요. 밖에서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하느라 집에 오면 진이 빠져 있는데 나까지 피곤하게 만들면 안 되겠다 싶어서요. 다음 날 나가서 활동하려면 충전을 해야 하니까 꼭 필요한 대화 외에는 안 해요.

▼ 심 대표는 아내이자 엄마로서 몇 점쯤 되나요.

저희 집 살림은 제가 하니까 밖에서 일하는 아내의 모습으로 판단하자면 95점 정도는 주고 싶어요. 아들도 엄마를 롤 모델로 생각해요. (자신의 직무를) 올곧게 성심성의껏 하려고 노력하거든요. 가족과 함께할 시간이 많지 않음에도 집에 있을 때는 두 남자를 위해 찌개라도 하나 더 끓이려고 하고요.

▼ 심 대표가 잘하는 요리가 뭔가요.

양념게장을 잘 만들고 자신 있어 해요. (손으로) 주물럭거리면서 잘 만들어요.

▼ 요즘 인기 있는 ‘요섹남(요리 잘하는 남자)’이실 것 같아요.

아들과 있을 때 김치찌개나 부대찌개를 곧잘 끓여 먹는데 솜씨가 대단한 건 아니에요. 삼시 세끼 제가 만든 음식을 먹어줄 사람이 있으면 요리에 재미를 느껴 제대로 배우고 싶을 것 같은데, 아내도 아들도 아침 일찍 나가서 대부분 외식으로 해결하거든요. 저는 ‘혼밥’ 할 때가 많아서 밥과 김치, 김 놓고 먹거나 생선 하나 구워서 대충 때워요.
최초 인터뷰 | 심상정 정의당 대표  남편 이승배 씨와의 수다

▼ 얘기를 듣다 보니 부부간에 싸울 일이 거의 없을 것 같아요.

부부간에 의견 대립이 전혀 없을 수 있나요. 함께 지내면서 서로 자극하는 게 뭔지 아니까 피하는 거죠. 서로 100% 만족하는 부부는 없을 거예요. 같이 살다 보면 단점이 보이게 마련이잖아요. 예를 들면 제가 청소를 깔끔하게 잘하지 못하는 모습이 심 대표가 보기에는 부족할 수 있고, 저도 나름대로 심 대표에 대해 이런저런 느낌이 있을 수 있는데 합리적으로 생각하면 문제될 정도는 아니니까 굳이 말하지는 않아요. 예를 들면 저와 아내의 관점이 달라 시각이 꼬이는 경우가 있는데, 여전히 남아 있는 남자 위주의 사고 때문이거든요.

▼ 만약 역할이 바뀌었다면 어땠을까요.

아내가 남편이 된다면 적어도 가부장적이진 않을 것 같아요. 아내에게 과한 기대도 하지 않을 것 같고요(웃음).

▼ 부모님은 아들이 주부로 사는 걸 어떻게 보시나요.

당연히 저에 대한 기대가 있었으니 “너도 정치할 수 있는데 왜 안 하냐?”고 말할 수 있죠.  요즘은 지역(일산 덕양구) 주민 중에도 그런 얘기를 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결혼을 아예 안 했으면 모르지만 누군가는 받침이 돼야 다른 사람이 설 수 있으니까 부모님도 이해를 하세요. 지금은 어머니가 아내를 굉장히 자랑스러운 며느리로 생각하세요. 돌아가신 아버지도 그러셨고요.  

▼ 집 밖에서는 어떤 외조를 하시나요.

지역구 주민들을 위한 시민 활동도 하고 정의당과 관련된 다른 시민운동도 해요. 그것 또한 제가 해야 하는 중요한 외조라고 생각해요.

▼ 결혼 생활 중 가장 힘들었던 시기는 언제인가요.

출판업을 1992년 결혼할 즈음 시작해 10여 년을 했는데 1997년 외환 위기가 닥쳐서 어려움이 있었어요. 사업이 완전히 엎어지진 않았지만 매출도 떨어지고 부채도 생겼는데 만회하기가 쉽지 않았죠. 당시 심 대표는 계속 노조 일을 하고 있었는데, 그런 문제가 생활에 압박을 줘서 많이 힘들었어요.  

▼ 그 위기를 어떻게 극복하셨나요.

주변의 도움과 사람들의 협조 덕분에 심 대표가 국회로 진출하기 직전인 2003년경 문제가 해결됐어요. 이후 다른 진로를 모색하며 ‘한의사가 될까?’ 생각한 적이 있는데 아내가 정계에 나간 후 접었어요. 지금은 새롭게 일을 벌일 때가 아니라고 판단했죠. 그런 제 선택이 나쁘지 않았다고 지금도 생각해요.

▼ 2008년 재선에 실패했을 때는 심 대표에게 어떤 위로를 해주셨나요.

대의민주주의를 하는 나라에서는 국회 밖에 있으면 정치인으로서의 활동 영역이 축소되니까 “4년을 지역구에서 일하다 다시 시작하자. 세상에 우리가 할 일은 쌔고 쌨다”고 했어요. 이후 심 대표는 지역 주민들과 마을학교를 함께 만들어 강연도 하고, 기획도 하고, 지역에 필요한 활동도 펼쳐나갔죠.  

▼ 2012년 국회에 다시 입성한 심 대표가 통합진보당의 비례대표 부정 경선 파문에 책임을 지고 공동대표직을 사퇴했을 때는 어떠셨어요.

그 당시 통합진보당 안에서 가장 큰 세력은 이정희 씨로 대표되는 옛날 민주노동당계였어요. 그다음 세력이 유시민 씨로 대표되는 국민참여당계였고, 심상정·노회찬 세력이 가장 소수였죠. 서로 힘을 규합하려고 세 세력이 뭉쳐 공동대표 체제로 갔는데, 두 큰 세력의 화학적인 동질화가 어려웠어요. 그 문제가 비례대표 부정 경선으로 드러난 거예요. 그 문제는 심 대표가 해결할 도리가 없어서 공동대표직을 사퇴한 거예요. 그 덕분에 새롭게 만든 정의당은 2014년 해산된 통합진보당과는 체질적으로 다르다는 인식이 유권자의 마음에 자리 잡을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 최근 대선 후보들이 자신의 이미지를 음식에 비유해 화제가 됐는데, 심상정 대표는 어떤 음식에 비유할 수 있을까요.

심상정은 소금이에요. 이 사회가 썩지 않게끔 초지일관 신념을 갖고 일했고, 그때그때 우리 사회가 필요로 하는 정책들을 제시해 시대의 요구에 간 맞추는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소금을 닮았다고 생각해요.

▼ 심 대표가 정치인으로서 가장 잘한 일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재벌 문제, 백혈병에 걸린 삼성전자 여성 노동자의 산업재해, 가습기 살균제 폐해 등 생활 속에서 당하는 국민의 고통에 문제 제기를 한 것도 잘한 일이죠. 하지만 무엇보다 현대적인 민주 정당의 중요성을 일관되게 추구하는 점에 방점을 찍고 싶어요. 대의민주주의의 주체인 정당이 주권자인 국민의 뜻을 정확하게 읽지 않고 위에서 내리꽂기 식으로 공천을 하는 것이 정말 문제예요. 심 대표는 제대로 된 정당을 만들어서 국민의 여론을 잘 받드는 정치를 하고 싶어해요.   

▼ 심 대표가 꿈꾸는 대한민국은 어떤 나라인가요.

누구나 땀 흘려 일하면 보상이 이뤄지는 나라, 그런 사람들이 행복한 나라를 만들고 싶어 해요. 그래서 이번 대선 구호로 압축한 것도 ‘노동이 있는 민주주의’예요. 또 전쟁의 위험 없이 한반도에 평화가 정착하고 호혜적인 국제 관계 속에 있는 대한민국도 꿈꾸죠.

▼ 심 대표가 대선에서 당선되면 ‘퍼스트 젠틀맨’으로서 어떤 일을 해보고 싶으신가요.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때가 바로 우리나라가 ‘선진 복지국가’가 되는 날이 아닐까 싶어요. 다른 나라를 부러워할 필요가 없는 시대가 되는 거죠. 그때가 되면 유능한 인재들이 적재적소에서 자기 몫을 다할 텐데 저 같은 사람이 굳이 필요가 있을까요. 심부름을 할 일이 있으면 그것이나 좀 할까요. 만일 그런 날이 정말 온다면 인류의 미래를 위해 환경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일해보고 싶어요.

▼ 인생의 나침반으로 삼는 좌우명이 있습니까.

(의원실 벽에 걸린 액자에 든 ‘처음처럼’이라는 글씨를 가리키며) 초심을 잃지 말라는 의미를 지닌 신영복 선생의 붓글씨예요. 저분의 글씨를 보며 내용을 음미하면 마음이 편해져요. ‘우공이산(愚公移山)’이라는 글도 좋아요. 어떤 일이든 꾸준히 열심히 하면 이룰 수 있다는 뜻이죠. 역사 선생님이 중국사를 가르치며 했던 말도 마음에 새겼어요. 송나라 때 군사 전략가인 범중엄이라는 재상이 쓴 글귀인데, 사자성어로 이야기하면 ‘선우후락(先憂後樂)’이에요. ‘모름지기 선비 된 사람은 천하의 근심을 남보다 앞서서 하고, 천하의 즐거움을 남보다 나중에 맛보라’는 의미죠. 공인들이 반드시 새겨야 할 말이 아닌가 싶어요(웃음).



인터뷰를 마치며 그에게 올해 소망을 물었다. 그는 잠시도 망설이지 않고 “촛불 민심의 소망이 이뤄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지금 국내외 사정이 안 좋고 국민들이 살기가 팍팍해요. 헌법재판소의 탄핵 판결이 날 때까지, 답답하지만 인내심을 갖고 기다리는 선한 민심이 배신당하는 일이 없기를 간절히 기원해봅니다. 촛불 민심이 바라는 대로 하루빨리 이 상황이 정리돼 국정이 안정되면 좋겠어요.”

사진 조영철 기자
디자인 이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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