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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례문 복구 공사 도편수 신응수 대목장의 뚝심

반세기 질긴 인연

글·구희언 기자 | 사진·조영철 기자, 동아일보 사진DB파트

입력 2013.06.17 16:27:00

스무 살 청춘부터 목수 일을 하며 숭례문과 인연을 맺은 신응수 대목장. 주요 문화재 보수를 진두지휘한 그가 숭례문이 불타던 날부터 복구 작업을 완료하기까지 1천9백11일의 여정.
숭례문 복구 공사 도편수 신응수 대목장의 뚝심


“속보입니다. 국보 1호인 숭례문에서 방화로 추정되는 큰불이 났습니다.”
2008년 2월 10일은 설 연휴의 마지막 날이었다. TV를 보던 기자의 눈에 새카만 연기가 피어오르는 숭례문의 모습이 들어왔다. 무언가에 홀린 듯 겉옷만 대충 챙겨 입은 채 카메라를 가지고 택시를 잡아탔다. “아저씨, 숭례문으로 가주세요” 마침 라디오로 소식을 들은 택시 기사도 현장이 궁금한 눈치였다. 신촌에서 숭례문까지 택시로 10여 분 남짓. 그동안에도 라디오에서는 긴박한 현장음과 다급한 기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숭례문으로 가는 길목은 소방차와 방송사 중계 차량, 택시와 일반 차량이 이리저리 뒤엉킨 상태였다. 현장에 도착한 택시 기사는 다음 손님을 잡을 생각도 못하고 차를 세워둔 채 “아이고, 아이고”만 반복했다. 더 가까이 진입할 수가 없어 멀찍이 내렸는데도 양 볼에 후끈한 열기가 느껴졌다. 한밤중에 거대한 조명이라도 켠 듯, 말 그대로 숭례문은 활활 불타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뷰파인더 너머로 서까래가 힘없이 추락하는 모습이 보였다.
이날 오후 8시 50분경 발생해 커진 불길은 5시간 만에야 잡혔다. 이미 1, 2층 누각이 전소한 뒤였다. 신변을 비관한 한 70대 남성의 방화가 원인이었다. 조선 태조 4년(1395년) 짓기 시작해 태조 7년(1398년) 완성된 이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수차례 전란을 겪으면서도 살아남아 위용을 자랑한 6백 년의 역사가 삽시간에 잿더미가 된 것이었다.

신 대목장과 숭례문의 반세기 인연
같은 날 밤, 북한산 등반을 마치고 지인과 맥주 한잔을 기울이며 연휴를 즐기던 신응수 대목장(71)은 숭례문이 불타고 있다는 믿을 수 없는 뉴스를 듣고 한달음에 현장으로 향했다. 그의 눈에 들어온 건 기왓장 사이로 불이 붙어 하얀 연기를 내뿜는 모습이었다. 악몽이었다. 숭례문 상층 적심목에 불이 붙어 계속 번지고 있다는 생각에 현장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소리를 질렀지만 아수라장에선 소용이 없었다. 5시간 동안 연기만 내뿜던 불길은 크게 살아나 2층을 삼켰다. 문루가 어이없이 주저앉는 모습에 억장이 무너졌다. 그날 그는 현장에서 밤을 꼬박 지새웠다.
2009년 12월 숭례문 복구 공사의 도편수(목조 건축 총감독)가 된 그는 몇 번의 계절을 보내며 복구에 힘썼다. 복구는 전통 방식으로 진행됐다. 현장에 대장간을 설치해 못과 철물을 만들고, 기와를 일일이 손으로 구웠다. 목재를 다듬을 때에도 내릴 톱이나 큰자귀 같은 옛 공구를 썼다. 그렇게 장인정신으로 복구한 숭례문을 올해 5월 4일 기념행사에서 만날 수 있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다. 신 대목장은 “천년을 가도 살아남을 수 있도록 복구하고 싶었는데 여러 장인이 힘을 합쳐 좋은 결과가 나왔다”며 뿌듯함을 감추지 않았다.
신 대목장은 국내 목재 문화재 복원, 복구 현장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중요무형문화재 제74호인 그는 대한제국 시대 창덕궁 대조전과 희정당을 복원한 최원식 선생으로부터 조원재, 이광규 선생으로 계승된 전통 건축의 명맥을 잇는 인물. 1975년 수원화성 장안문 복원 공사에서 처음 도편수가 된 이래 초대형 문화재 복원 현장에는 늘 그가 있었다. 숭례문 외에도 경복궁과 광화문, 수원 화성 장안문, 청와대 상춘재와 대통령 관저, 경주 불국사와 안압지 임해전, 고 이병철 삼성 회장의 이태원 승지원 등이 그의 손을 거쳤다.
숭례문과도 참 질긴 인연이다. 파릇한 청년 신응수가 중수공사에 참여했는데 희끗희끗한 머리에 칠순을 넘긴 대목장 신응수가 복구하게 될 줄 그 누가 알았을까. 6·25전쟁을 겪으며 심하게 훼손된 숭례문 복구 작업에 그가 참여한 게 1962년이다. 당시 공사의 도편수는 조원재 선생, 부편수는 조 선생의 제자 이광규 선생이었다.

숭례문 복구 공사 도편수 신응수 대목장의 뚝심

신응수 대목장에게 숭례문과의 만남은 인생의 터닝포인트였다.



“제가 9남매 중 여덟째예요. 집에서 중학교에 보낸 자식도 저 하나였는데, 1958년에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인 충북 청원을 떠나 사촌 형이 있는 서울로 올라왔어요. 그때는 꿈이고 뭐고 있었나요. 먹고살기 위해 목수인 사촌 형을 따라다니면서 일을 시작했죠. 현장에서 누가 대패질 한번 해보래서 해봤는데 ‘어, 잘한다’ 하더니 ‘얘 일 시키면 잘하겠다’ 하더라고요. 1962년 숭례문 중수 공사 때 도편수였던 조원재 선생님과 부편수인 이광규 선생님을 만나 방 한편에서 도면을 그리며 일을 제대로 배웠죠.”
그는 숭례문 덕에 인생이 바뀌었다고 했다.
“신응수라는 사람을 제대로 된 목수로 만들어준 게 바로 숭례문이에요. 그전까지는 생계를 위해 목수 일을 했지만 숭례문 중수 공사를 한 이후로 목수로서 살아야겠다고 마음먹었어요. 그러고 나니 책도 더 찾아보게 되고, 길을 가다가도 한옥이 보이면 어떻게 지은 건물인지 살펴보게 되더라고요. 이번에 숭례문 복구 도편수가 된 건 인생에서 뿌듯했던 순간이었어요. 준공식 때 박근혜 대통령이 악수를 청하며 수고했다고 했을 때는 울컥했죠.”



전통 방식 고수, 원형 가깝게 복구한 숭례문
공사를 마무리한 소감을 물었다.
“인생에서 중요한 가르침을 주신 두 분의 스승(조원재, 이광규)이 반세기 전 중수한 숭례문을 제가 다시 책임지게 돼 어깨가 무거웠어요. 최대한 전통 방식을 고수해 중건 당시의 느낌을 살리려 노력했죠. 저는 자기 이름 석 자를 걸고 평생 한길을 걸어가는 것, 죽어서도 이름을 남길 수 있는 것이야말로 장인정신이라 생각해요. 숭례문 복구도 그런 마음가짐으로 임했죠.”
복구에서 중점을 둔 것은 고증과 실측, 그리고 경험이었다. 기술적으로 가장 신경 쓴 부분은 처마. 그는 “처마는 한옥의 미적인 면과 구조적 완성도를 좌우하는 중요한 부분이다”라며 “처마의 선은 궁궐의 생명과 같다”고 했다.
“복구에 현재의 기준을 적용하면 안 돼요. 기초 자료를 토대로 당시 기록된 방법에 따라 복구해야지 진정한 의미의 복구라 할 수 있어요. 재료도, 기법도 마찬가지고요. 어떻게 해야 오래갈지, 건축물의 ‘생명력’에 대해서도 고민했죠. 우리 전통 목조 건물은 ‘정성’이 가득 담겨 있기에 대들보부터 지붕, 추녀를 잇는 모든 부속물을 못 하나 박지 않고 일일이 깎아서 끼워 맞췄어요.”
목조 건물에서 또 중요한 것이 바로 ‘나무 고르기’다. 신 대목장은 질 좋은 소나무를 찾으려 전국 방방곡곡을 누볐다. 그는 “우리 소나무는 쉽게 부패하지 않고 오래간다”라며 “속이 붉고 나이테가 촘촘한 적송이 좋지만 궁궐에 쓰이는 나무는 2백~3백 년은 자라야 훌륭한 재목이 되기에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고 했다. 수백 년 묵은 아름드리 소나무를 찾아내면 “어명이오”라는 말과 함께 벌목했다. 그렇게 좋은 목재를 구하면 크기와 상태에 따라 기둥감, 대들보감 등으로 나눠 사용했다. 강원도 삼척에서 베어온 1백 년 된 소나무 10본은 물론, 국민이 기증한 나무도 복구 작업에 알뜰하게 쓰였다.
공사 과정이 마냥 순조롭지만은 않았다. 도편수 결정 과정에서부터 시간이 걸렸다. 국내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대목장이 세 명(신응수, 전흥수, 최기영)인데, 문화재청에서 2년 가까이 도편수를 정하지 못했던 것. 그는 “일찌감치 도편수를 정하고 어떤 나무를 쓸 것인지부터 시작해야 했는데 큰 실책이었다”라고 했다. 의견 마찰로 공사가 중단된 적도 있었다. 신 대목장은 “전통적인 방법으로 공사하되 그렇게 하면 인건비가 많이 나오니 문화재청에서 직영으로 일을 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문화재청 측에서 도급을 맡기면서 예산 문제가 발생했다. 그는 “나중에는 ‘신응수가 숭례문을 담보로 공사를 중단하고 돈을 더 받으려고 장사한다’는 소리도 나왔다”고 했다.
“처음부터 돈 때문에 시작한 일도 아니었는데 당치도 않은 소리죠. 제가 젊은 시절 숭례문을 만나 이 자리까지 온 사람인데, 기어이 예산 문제가 좁혀지지 않으면 기부하는 방식으로라도 작업하겠다고 했지만 견해 차를 좁히지 못해 공사가 한동안 중단됐었어요. 그때는 별 이상한 소리를 다 들었습니다.”
문화재 복원 전문가라는 이름값 덕에 웃지 못할 일도 종종 생긴다. 지금도 현장에서 그의 제자라며 사칭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그는 “제가 현장에 와서 열흘만 일했어도 이름을 다 기억하는데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사람들이 ‘내가 신응수의 제자다’라 하고 다닌다”며 웃었다.

자다가도 영감이 떠오르면 일어나서 메모할 정도로 “일을 떠나서는 못 산다”는 그는 평소 여가에는 등산과 골프를 즐긴다. “집에 있을 땐 말이 필요 없다”라며 “TV 틀어놓고 드라마 보는데, 요새는 재밌는 건 다 끝나고 새로 하는데 자꾸 보면 빠져들어서 문제”라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국민이 문화재 주인의식 가져야
복구 과정에서 오해도 있었고 어려움도 있었지만 신 대목장과 여러 장인이 묵묵히 자기 자리에서 맡은 바를 다한 덕에 숭례문은 비교적 빨리 국민과 다시 만났다. 그는 “5년이라고 하지만 실제로 공사한 건 3년 정도”라며 “이웃 나라 일본만 해도 작은 건축물 하나 복원하는 데 10년씩 걸린다”며 아쉬움을 표했다.
“상량문 기록에 따르면 도편수는 열두 명의 편수를 거느리고 궁궐의 대역사를 총지휘해요. 그렇기에 도편수는 나무를 보는 안목과 장인의 성격, 능력을 파악해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능력이 있어야 하죠. 그래야만 여러 장인과 함께 천년이 지나도 견고하게 버틸 건물을 만들 수 있거든요. 숭례문 복구에 저 말고도 수많은 장인이 참여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힘을 쏟았는데, 이들의 노력도 기억해주세요.”
숭례문 복구를 계기로 국민이 좀 더 주인의식을 갖고 문화재를 사랑해주기를 바란다고 했다.
“숭례문이 불타면서 문화재에 관한 관심이 높아졌잖아요. 그걸 보면서 부모가 느꼈던 안타까운 감정을 아이에게 그대로 전해주면 좋은 교육이 될 것 같아요. 우리 전통 건물은 문고리 하나를 만들더라도 대장간에서 직접 쇠를 달구고 쳐서 만들잖아요. 나무 기둥 하나도 허투루 만든 게 없어요. 산꼭대기까지 올라가서 백 년, 이백 년 된 나무를 베어서 뗏목으로 운반해 손으로 다듬어 만들었잖아요. 돌도 그렇죠. 지상에 있는 건 질이 나빠서 좋은 돌을 얻으려면 땅속 깊이 파야 하거든요. 그런 노력을 생각하면 문화재가 달리 보여요. 각 지역의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은 대한민국의 고유한 가치를 보여주는 유산이자 자본이에요. 모든 문화유산이 내 재산이라는 생각으로 아껴주셨으면 좋겠어요.”
숭례문 복구 공사 도편수 신응수 대목장의 뚝심


여성동아 2013년 6월 59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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