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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이 여자의 삶, 사랑…

조선시대 ‘비운의 왕후’로 열연 펼치는 윤석화

“무대 서느라 아들과 떨어져 지내야 할 때면 제 마음 한쪽에 한 줄기 강물이 흐르는 것 같아요”

글·강지남 기자 / 사진ㆍ조영철 기자

2006. 01. 04

명성황후, 덕혜옹주 등 왕가의 여인으로 무대에 섰던 연극배우 윤석화가 이번에는 조선시대 비운의 왕 단종의 아내 정순왕후가 돼 무대에 올랐다. 무대 인생 30년을 꽉 채운 그가 털어놓은 연극배우로서의 삶, 홍콩에서 지내는 아들에 대한 애틋한 모정.

조선시대 ‘비운의 왕후’로 열연 펼치는 윤석화

“나는 우는 듯 웃으며 죽었습니다….”
서울 신촌에 자리한 소극장 산울림. 어두운 조명이 비추는 작은 무대에 선 윤석화(50)는 이렇게 읊조리며 모노드라마 ‘윤석화의 정순왕후, 영영이별 영이별’의 문을 열었다. 정순왕후는 열다섯 어린 나이에 단종과 결혼해 왕비가 되지만 2년 후 단종이 죽임을 당한 이후 홀로 남아 걸인, 날품팔이, 뒷방 늙은이로 가혹한 운명을 살다 여든두 살에 세상을 떠난 비운의 여인. 그가 단종이 세상 떠난 뒤 예순다섯 해에 걸친 정순왕후의 비극적 삶을 풀어 가는 동안 객석 곳곳에서는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극의 중간 중간 녹음된 대사가 나갈 때면 관객들의 울음소리가 제 귀에 들려와요. 저도 눈물 콧물 닦느라 정신없지만, 요즘 같은 시대에 이렇게 순수한 영혼들을 만날 수 있는 게 연극을 하는 덕분인 것 같아 기쁘고 행복해요.”
12월8일 저녁 공연을 앞두고 있는 윤석화를 소극장 산울림에서 만났다. 그는 한복이 참 잘 어울린다. 사진작가 조세현이 촬영한 이번 작품의 포스터 사진을 보며 “한복이 참 잘 어울린다”고 했더니 “제가 이래봬도 모든 종류의 옷이 잘 어울려요”라며 유쾌하게 웃는다.
“외국의 주요 행사에 초대돼 갈 때 두세 차례의 파티에서 꼭 한 번은 한복 드레스를 입어요. 그럴 때마다 ‘아름답다’는 찬사를 듣곤 해요. 영국의 찰스 황태자도 몇 번 만난 적 있는데 제가 한복 입은 모습이 그렇게 예쁠 수 없대요. 한번은 꽃을 수놓은 고무신을 무척 마음에 들어하셔서 선물한 적도 있어요.”
1인극인 모노드라마를 예술성과 상업성을 모두 만족시키며 성공을 거둘 수 있는 연극배우는 극히 한정돼 있다. 윤석화는 그러한 배우들의 명단에서 단연 맨 앞줄에 꼽히는 배우다. 이미 ‘목소리’ ‘딸에게 보내는 편지’ ‘마스터 클래스’ 등의 모노드라마를 무대에 올려 큰 성공을 거둔 바 있다. 그가 이번에는 소극장 산울림 개관 20주년 기념공연 시리즈의 마지막 작품으로 조선 왕가의 비운의 여인 정순왕후가 돼 오는 2월19일까지 무대에 선다.
“연극은 사랑, 죽음, 질투, 선악 등 다양한 이야기를 다루지만 궁극에는 관객에게 ‘고통은 유익하다’는 메시지를 전하고자 하는 게 아닐까 싶어요. 관객들은 주인공이 고통과 절망을 이겨내는 모습을 보고 위로와 용기를 얻게 되니까요. 이 작품을 하면서 ‘고통은 유익하다’는 메시지를 더욱 자주 떠올리게 됐어요. 다른 사람들 같으면 한(恨)과 절망 때문에 자진해버리고 말았겠지만, 정순왕후는 끝까지 ‘살아내라’는 삶의 명령을 충실히 따르는 위대한 모습을 보여주거든요.”
그는 이번 작품의 공연을 앞두고 청계천 영도교와 단종의 유배지 강원도 영월을 다녀왔다. 청계천 복원사업으로 다시 세워진 종로구 숭인동의 영도교(永渡橋)는 정순왕후와 귀양 떠나는 단종이 헤어진 곳으로 그때 이후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고 해 ‘영이별교’ ‘영영건넌다리’로 불렸다.
“비록 옛 모습이 남아 있진 않지만 그래도 가봐야겠다는 생각에 영도교를 찾아갔어요. 아무 생각 없이 지나다니던 곳에 5백년 전의 가슴 아픈 사연이 있었다는 사실에 감회가 새로웠어요. 단종의 묘가 있는 영월 장릉도 찾았는데, 마치 제가 정순왕후가 된 듯 눈물이 왈칵 쏟아지더라고요. 그러면서 단종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지금 조선의 왕들 중 가장 사랑받는 왕이 되었네요’라고 속삭이고 왔습니다.”

남편과 아들 수민이 만나러 한 달에 두 번 홍콩으로 날아가
그는 소극장 산울림과 인연이 깊다. 그의 필모그래프에서 유독 빛나는 작품들 중 상당수가 바로 이곳에 올려졌다. 성공리에 치러졌던 모노드라마 ‘목소리’ ‘딸들에게 보내는 편지’ 등도 산울림에서 공연된 작품. 그는 “지금까지 출연한 작품들 모두 기억이 선명하지만 굳이 한 가지를 꼽으라면 89년 연출가 임영웅 선생님께서 연출한 ‘목소리’를 꼽을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목소리’는 그가 출연한 첫 번째 모노드라마로 이해하기 어려운 수준의 작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5개월 동안 롱런하면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조선시대 ‘비운의 왕후’로 열연 펼치는 윤석화

윤석화는 ‘…, 영영이별 영이별’에서 처음으로 살풀이 춤을 선보인다.사진제공·조세현


“임 선생님의 출연 제의를 받고 ‘저 따위가 어떻게 혼자 무대에 서요’라며 많이 주저했는데, ‘임마, 너는 충분히 해낼 수 있어’라며 용기를 북돋워주던 임 선생님이 생각나네요. 거칠게 말하자면 배우로서 모노드라마는 발가벗고 사막 한가운데 서 있는 기분을 느끼게 하거든요. 성공한다면 배우로서 최고의 자긍심을 느끼게 되지만 그 반대라면 정말 참혹하거든요.”
윤석화는 75년 연극 ‘꿀맛’으로 데뷔한 이후 유학을 떠난 시기를 제외하고는 지금까지 단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무대에 서왔다. 94년 금융사업가 김석기씨와 결혼한 후에도 변함없이 왕성한 활동을 벌였고 연출가, 제작자 등으로 활동 영역을 넓혀왔다. 2003년 아들 수민이를 공개 입양해 엄마가 된 이후에도 그의 지칠 줄 모르는 왕성한 활동은 계속됐다. 이처럼 연극에 대한 열정이 한없이 넘치는 그이지만 일 때문에 아들과 떨어져 지내야 하는 일은 못내 가슴 아프다. 작품 출연이 결정돼 연습에 들어갈 때부터 작품이 끝날 때까지 수민이는 아빠가 사업을 벌이고 있는 홍콩에 머물기 때문.
“아무리 바빠도 최소한 한 달에 두 번은 홍콩으로 날아가 아들을 만나요. 하루에 서너 번씩 전화통화도 하고요. 벌써 태어난 지 만 2년 9개월이 됐는데 말도 참 잘하고 TV에 나온 엄마 얼굴도 잘 알아봐요. 수화기에 대고 ‘수민이 누구 아들?’ 그러면 천진난만하게 ‘엄마 아들∼’이라고 말하는데, 같이 있어주지 못하는 게 미안하고 보고 싶어서 제 맘 한쪽에는 한 줄기 강물이 흐르는 것 같아요.”
제일 가슴 아플 때는 헤어지지 않으려고 울고불고하는 아들을 떼어내고 한국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오르는 순간. 그래서 아들이 잠든 사이에 몰래 빠져나와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공항으로 재촉한다고.
“가끔씩은 남편과 수민이가 공항까지 배웅을 하는데 그때는 헤어지기 위해 사기를 쳐요(웃음). 아빠와 함께 장난감 가게에 들어가서 좋아하는 장난감을 정신없이 구경하는 틈을 타서 도망치듯 비행기에 오르거든요.”
멀리 떨어져 있는 아들에 대해 이야기하며 마냥 행복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그에게 윤석화만의 육아법이 궁금하다고 말하자 금세 엄한 어머니의 표정을 짓고는 “아이를 키우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과 인내라고 생각한다”고 잘라말했다. 아이에게 어머니로서 무한한 사랑을 주어야 하지만 그 사랑은 ‘무조건의 사랑’이어서는 안 되며 아이에게 냉정하게 “안 된다”라고 말할 줄도 알아야 한다는 것.

아들 수민이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 모아 뮤지컬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 만들고 싶어
조선시대 ‘비운의 왕후’로 열연 펼치는 윤석화

“아이에게 무조건 ‘노’라고 하면 창의성이 없는 아이가 될 것이고 무조건 ‘예스’라고 하면 연약한 아이가 될 거예요. 때문에 아이를 자유의지와 자신만의 철학이 있는 사람으로 키우려면 엄마가 인내심을 갖고 사랑을 베풀어야 해요. 그리고 저는 수민이가 아무리 금쪽같은 아들이라고 해도 과잉보호는 안 해요. 길을 걷다 넘어져 울면 달려가 안고 어르는 대신 ‘수민, 잇츠 오케이. 스탠드 업’이라고 해요. 그러면 정말 아이에게 넘어지는 일 따위는 별것 아닌 게 되거든요. 좋은 것만 먹이고 좋은 것만 입히려고 하는 대신, 상황에 맞는 대로 아무것이든 가리지 않고 먹이고 아무 데서나 재우기도 하고요. 그러다 보니 수민이에게 가장 무서운 사람과 가장 의지하는 사람이 저이기도 해요.”
그는 지난해 5월5일 어린이날에 대통령 표창을 받기도 했다. 수민이를 입양해 기르는 것 말고도 96년부터 10년 가까이 미혼모자 보호시설인 사회복지법인 애란원에 정기적으로 후원금을 보내고 있는 사실이 알려졌기 때문. 95년 소극장 산울림 개관 10주년 기념 공연으로 ‘딸에게 보내는 편지’를 앙코르 공연할 때 ‘원생들과 연극을 꼭 보러 가고 싶은데 표값이 부담되니 할인해줄 수 없겠느냐’는 애란원 원장의 편지를 받은 그는 아예 직접 표를 사서 15명의 미혼모를 초대했다.

조선시대 ‘비운의 왕후’로 열연 펼치는 윤석화

정순왕후로 세번째 조선왕가의 여인이 됐던 윤석화는 1~2년 내에 고종의 딸 이문용 여사의 일생을 그린 뮤지컬 ‘황녀’를 무대에 올릴 계획이다.


“어린 여자아이들이 배가 부른 채 와서 연극을 보며 펑펑 우는데, 저도 너무 가슴이 북받쳐오르더라고요. 공연 후 애란원을 찾아가 아이들을 만나 고민도 들어보고 뭐가 필요한지 물어보고 하면서 인연이 시작됐어요. 요즘도 아주 가끔씩 찾아가고 있어요.”
연극인생 30년을 맞은 그이지만 여전히 못다 이룬 꿈이 많다. 2004년 아들 수민이에게 보내는 편지를 모아 ‘작은 평화’라는 책을 펴냈는데, 여기에 그치지 않고 수민이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들을 더 모아 뮤지컬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제작하고 싶은 꿈도 있다. 그는 또 앞으로 1∼2년 내에 대형 뮤지컬 ‘황녀’를 무대에 올릴 계획. 고종과 그의 총애를 받던 염 상궁 사이에서 태어난 이문용 여사(공식적으로 옹주의 칭호를 받지 못했다)의 일생을 그린 작품으로 그는 18년째 뮤지컬 ‘황녀’를 준비하고 있는데, 2007~2008년에는 반드시 무대에 올릴 것이라고 한다.
그는 늘 앞만 보고 달려왔지만 새해에는 안식년을 가지고 아들 수민이에게 시간과 정성을 쏟아부을 계획이다. 수민이가 올해 감정 표현이 더욱 풍부해지는 네 살이 돼 정서발달상 엄마가 꼭 필요한 시기이기 때문에 이 같은 결정을 했다고 한다.
“3월 예정된 ‘딸에게 보내는 편지’ 일본 공연을 갔다오고, 또 연극 ‘사의 찬미’ 연출을 마친 다음 5월부터는 정말 푹 쉬려고 해요. 수민이랑 내내 붙어 지내면서 그동안 못 만났던 지인들도 만나야지요. 푹 쉬고 돌아온 윤석화도 많이 기대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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