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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기러기맘 3년 차, 제 일을 존중해주는 아이들 덕분에 힘이 나요” 

엄지인 아나운서

이혜진 프리랜서 기자

2025. 11. 12

18년 차 방송인으로서의 고민, 기러기 워킹맘의 고충, 자기 관리 노하우까지. 엄지인 아나운서의 솔직한 목소리를 담았다.

단정한 말투와 안정된 진행으로 오랜 세월 시청자들의 아침을 열어온 KBS 아나운서 엄지인. KBS 시사·예능 프로그램인 ‘아침마당’을 1만 회나 이끌어온 그가 최근에는 ‘사장님 귀는 당나귀 귀’를 통해 예능감을 발산하고 있다. 방송을 통해 남편, 아이들과 떨어져 지내는 ‘기러기 워킹맘’이라는 사실을 밝혀 화제를 모았다. 현재 남편과 아이들은 일본에서 생활하고 있다. 현지 대학교수인 남편을 따라 아이들도 일본에서 공부하고 있는 것. 그는 이런 생활에 대해 “커리어를 계속 이어가기 위한 선택”이라고 말한다. “가족 때문에 일을 포기하진 말라”는 남편의 응원도 기러기맘의 삶을 선택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그래도 아이들이 보고 싶을 땐 일에 더 집중하며 마음을 달래곤 한다고. 가족의 빈자리를 후회로 채우기보다 일로 채워나가는 단단한 워킹맘의 얼굴이 그 안에 있다. ‘욕심을 내려놓고, 핑계 대지 말자’는 다짐으로 자기 자리를 지켜온 엄지인 아나운서. 일과 가족, 두 세계를 병행하며 자신만의 균형을 만들어가는 그를 만났다. 

방송에서 기러기맘 일상 공개

추석 연휴가 길었는데 어떻게 보내셨어요.

아쉽게도 가족과 함께하지 못했어요. 가족들이 있는 일본은 명절이 아니거든요. 아이들은 평소처럼 학교에 가고, 학원도 갔어요. 명절 당일 영상통화로 안부를 전하고 마음만 함께했어요. 저는 대신 연휴 내내 회사에 남아서 뉴스와 라디오 진행을 맡으며 시간을 보냈어요. 그 덕분에 추석 당일에는 ‘마감 뉴스’ 앵커석에도 앉았죠. 오랜만의 뉴스 진행이라 그때 장면을 캡처해서 SNS 피드에 올리기도 했고요. ‘이번 아니면 내가 다시 뉴스 앵커석에 앉을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아침마당’이 1만 회를 넘었는데, 감회가 남달랐을 것 같아요.

정말 대단한 기록이라고 생각해요. 1991년에 시작된 프로그램이니까, 전 세계에서도 이렇게 오래 매일 생방송을 이어온 사례는 드물죠. 1만 회 특집 때 이금희, 손범수 선배님이 함께 나오셨는데, 제가 어릴 때 그분들을 보며 ‘나도 언젠가 저 무대에 서고 싶다’는 꿈을 꾸던 때가 떠올랐어요. 그 무대에 제가 서 있다는 게 믿기지 않더라고요. ‘아, 이래서 방송을 하는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어요. 그 순간이 제게는 정말 큰 위로이자 자부심이었어요.



명절 연휴, ‘마감 뉴스’를 진행 중인 엄지인 아나운서.

명절 연휴, ‘마감 뉴스’를 진행 중인 엄지인 아나운서.

방송에서 ‘기러기 엄마’ 일상을 공개한 계기가 궁금해요.

사실 숨기려던 건 아니에요. 방송을 하다 보면 가족 이야기나 일상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나오잖아요. 그럴 때 제 상황을 설명해야 하는데, 자꾸 돌려 말하려니 오히려 더 어색하더라고요. 특히 ‘사장님 귀는 당나귀 귀’에서 그런 이야기가 나왔어요. 제가 해외에 가족이 있다 보니, 일을 하다 보면 “왜 집에 안 가냐” “방송국에 사는 것 같다”와 같은 질문을 종종 받아요. 처음엔 굳이 말해야 하나 망설였는데, 그걸 피하려고 하다 보니 설명이 더 꼬이는 거예요. 그래서 그냥 자연스럽게 제 얘기를 하게 됐죠.

‘기러기 엄마’라는 단어가 무겁게 들릴 수도 있지만, 그저 하나의 선택이자 과정이에요. 숨기기보다 솔직히 말하는 게 더 편했고, 그게 제 삶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방법이라고 생각했어요. 본의 아니게 고백처럼 들렸지만, 사실은 제 일상을 설명한 것뿐이었죠.

‘기러기맘’이라는 삶을 선택하는 데 큰 용기가 필요했을 것 같아요.

사실 결혼할 때부터 남편이 제 일을 정말 존중해줬어요. “가족 때문에 네 일을 포기하지 않으면 좋겠다”는 말을 늘 했거든요. 저는 그 말이 참 좋았어요. 일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가정과 일을 병행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해줬으니까요. 그런데 막상 아이를 낳고 나니까 현실은 다르더라고요. 결혼하고 8년 정도는 진짜 ‘독박 육아’였어요. 방송국 일을 병행하면서 아이 둘을 키우는 건 생각보다 훨씬 고됐죠. 그러다 1년 정도 육아휴직을 쓰면서 가족이 모두 일본으로 건너갔어요. 남편이 일본에서 교수로 일하고 있었고, 아이들이 학교에 들어갈 시기라 그때는 모두 함께 지냈죠. 1년간의 휴직 후 복직과 휴직을 결정해야 하는 갈림길에 놓였었어요. 오래 쉴 생각이었지만 답답해서 복직할까 고민하던 바로 그 찰나에 ‘아침마당’ MC 자리가 났어요. 남편 역시 복귀를 권유했고요.

엄지인 아나운서와 사랑스러운 두 아이들.

엄지인 아나운서와 사랑스러운 두 아이들.

KBS 예능 ‘사장님 귀는 당나귀 귀’에 출연한 엄지인 아나운서.

KBS 예능 ‘사장님 귀는 당나귀 귀’에 출연한 엄지인 아나운서.

기러기맘이 된 걸 후회하진 않나요. 

각자 자기 자리를 지키면서 가족을 지탱하는 방식이라고 생각해요. 아이들 곁에 있지 못하는 건 마음 아프지만, 제 일을 지키는 게 결국 가족을 지키는 일이라고 믿어요. 한편으론 아이들에게 ‘엄마도 자기 일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가족과 떨어져 사는 게 외롭고 힘들지만, 그 선택이 후회되지 않아요. 스스로를 지키는 일, 그게 결국 가족을 지키는 길이라고 믿고 있어요.

가족과 떨어져 지내며 가장 힘든 점은 무엇인가요.

떨어져 지낸 지도 벌써 3년이 돼가요. 둘째가 처음엔 엄마를 자주 찾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일부러 안 찾으려는 게 느껴질 때가 있었어요. 그게 제일 마음이 아팠죠. 영상통화로 매일 얼굴을 보고, CCTV로 아이들이 뭐 하는지도 다 알고 있지만 그게 곁에 있는 건 아니잖아요. 화면으로는 온기가 전해지지 않으니까요. 아이가 아플 때나 비 오는 날 왠지 마음이 약해질 때는 ‘지금 옆에 있어줘야 하는데…’ 싶은 순간들이 아직도 많아요.

큰아이가 사춘기에 접어들 시기에 가까워지니까 감수성이 예민해지진 않을까 걱정도 많죠. 아빠가 다 해줄 수 없는 부분이 있잖아요. 그런데 이번 방송을 통해 아이들을 공개하고, 부모가 없는 공간에서 큰아이가 인터뷰한 것을 봤는데, “엄마가 아나운서로 일하는 게 멋있다”고 말해서 그 한마디에 정말 많이 울컥했어요. 엄마로서 미안하지만, 제 일을 존중해주는 그 마음이 너무나 고마웠어요.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지만, 매일 같은 시간에 영상통화를 하며 아이들에게 엄마가 곁에 있음을 알려주고 있어요.

아나운서로서, 엄마로서 여전히 균형을 찾는 중

워킹맘으로서 갈등이 생길 때 어떻게 스스로를 다잡으시나요.

솔직히 매번 흔들리지만, ‘핑계 대지 말자’는 생각으로 다잡아요. ‘내가 선택한 길이라면 그 책임도 내가 져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아이 때문에 일을 미루는 순간 그것이 핑계로 들릴 수 있거든요. 특히 워킹맘에 대한 인식이 아직 보수적인 사회에서, “핑계 대지 않고 나 이만큼 했다”고 강하게 말하려면 더 열심히 해야 한다는 현실적인 책임감으로 더 노력하고 마음을 다잡아요.

워킹맘으로서 가장 중요하게 지켜온 원칙은 무엇인가요.

결국은 책임감이에요. 생방송은 누군가 대신할 수 있는 일이 아니잖아요. 제 이름으로 나가는 방송이니 그 무게를 잊을 수 없어요. 시청자와의 약속이기도 하고요. 그 책임감이 늘 저를 다시 일어서게 만드는 힘이에요.

일에 더해 ‘욕심을 조금 내려놓자’는 마음이 생겼어요. 모든 걸 완벽하게 할 순 없거든요. 일도, 육아도 어느 한쪽은 늘 아쉬워요. 예전엔 ‘슈퍼맘’이 되고 싶었는데, 지금은 포기할 건 포기하자고 생각해요. 제가 육아를 했던 시기에도 아이 먹을 걸 일일이 챙기지 못할 때가 있었고, 아이가 학원 진도에 뒤처질 때도 있었지만 욕심을 내려놓자고 마음을 다잡았어요. 그 대신 아이들이 ‘엄마는 자기 일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여겨준다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앞서 스케줄을 들으니 체력 관리가 중요할 것 같아요. 자신만의 루틴이 있나요.

‘아침마당’은 매일 아침 생방송으로 진행되다 보니 체력이 전부예요. 저는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요. 일어나자마자 10분 스트레칭, 20분 홈트레이닝, 그게 제 하루의 시작이에요. 이 일상을 3년째 꾸준히 하고 있어요. 예전에는 허리 통증이 있어서 서 있기도 힘들었는데, 지금은 확실히 달라졌어요. 몸이 버티니까 마음도 안정되고, 하루가 훨씬 단단하게 시작되는 것 같아요.

대한민국의 워킹맘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면요.

대한민국에서 워킹맘으로 사는 게 현실적으로 힘들고 고생스러운 게 맞아요. 하지만 ‘아이 때문에’라는 핑계는 대지 않으면 좋겠어요. 우리 스스로 핑계 대지 않고 열심히 할 때, 워킹맘들이 사회에서 더 목소리를 낼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자기가 선택한 일이라면,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은 스스로 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저 역시 그렇게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요.

앞으로 도전해보고 싶은 일은 무엇인가요.

언젠가 오디션 프로그램 MC를 꼭 해보고 싶어요. 김성주 선배처럼 따뜻하면서도 에너지 있는 진행을 좋아하거든요. 아직 KBS에는 그런 프로그램이 없지만, 기회가 된다면 도전하고 싶어요. 방송인으로서, 엄마로서 계속 성장하는 모습도 많은 분께 보여드릴게요. 

#엄지인 #아침마당엄지인 #여성동아

사진 지호영 기자 사진제공 엄지인 사진출처 KBS ‘사장님 귀는 당나귀 귀’ KBS1 ‘KBS 마감뉴스’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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