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이건희(73) 삼성전자 회장이 선친인 고 이병철 창업주를 기리기 위해 제정한 호암상은 상금의 규모와 권위 면에서 국내 최고 수준으로, ‘한국의 노벨상’이라고 불린다. 인재 양성과 사회 공헌의 가치를 내건 삼성그룹의 가장 큰 대외 행사인 만큼, 삼성가의 향후 행보나 분위기를 반영하는 상징성을 띤 자리이기도 하다.
올해 호암상 시상식은 최근 삼성생명공익재단과 삼성문화재단 이사장에 오른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공식적인 그룹 수장 데뷔 무대 같았다. 6월 1일 오전에 열린 시상식에 삼성가의 온 가족이 참석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이재용(47) 부회장 혼자 모습을 드러냈다. 이어서 몇 시간 뒤인 오후 6시 30분 서울 장충동 신라호텔에서 열린 호암상 수상자를 위한 만찬에는 홍라희(70) 리움 미술관 관장과 이부진(45)호텔신라 사장, 이서현(42) 제일모직 사장이 모두 참석했다. 홍 관장과 두 자매가 오전 행사에 참석하지 않은 것을 두고, 그룹 후계자로서 첫 공식 행보를 시작한 이재용 부회장에게 스포트라이트가 쏠릴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사전에 꼼꼼하게 조율된 듯한 호암상 만찬의 VIP 동선도 이런 분석을 뒷받침한다. 신라호텔이 일터인 이부진 사장은 5시 50분쯤 호텔 로비에 내려와 대기하고 있다가 15분 뒤 홍라희 관장과 이재용 부회장, 이서현 사장 차가 도착하자 밖으로 마중을 나왔다. 홍 관장과 이 부회장은 같은 차량(벤츠)을 타고 왔는데, 이 부회장은 먼저 차에서 내리더니 홍 관장이 내릴 수 있도록 서둘러 반대쪽으로 달려가 승용차 문을 열어주었다. 차에서 내린 홍 관장은 대기하고 있던 이부진 사장과 이서현 사장의 손을 잡고 행사장으로 입장을 했으며, 이재용 부회장과 이서현 사장의 남편인 김재열 제일기획 사장이 약간의 거리를 두고 뒤따랐다.
활발한 경영 행보, 여성스러운 스타일 공통점
오랜만에 삼성가 여성들이 한자리에 모인 만큼 이들의 패션도 큰 관심을 끌었다. 이건희 회장이 투병을 시작한 이후 외부에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홍라희 관장은 흰색 바탕에 수묵화로 그림을 그린 듯한 발렌티노의 플로럴 레이스 원피스와 재킷을 매치하고 손에는 그레이 컬러 악어가죽 클러치백을 들었다. 클러치백은 무한함을 상징하는 콜롬보의 인피니티 컬렉션으로, 앞부분에 나비 모양의 스와로브스키 장식이 달려 있다.
그간 레이스, 새틴 등의 소재를 활용해 우아한 비즈니스 룩을 보여줬던 이부진 사장의 선택 역시 발렌티노의 블랙 케이프 원피스. 목선이 넓게 파인 보트 네크라인으로 어깨가 살짝 드러나고, 케이프와 스커트 등에 시스루 레이스 장식이 있는 여성스러우면서도 세련된 차림이었다. 이부진 사장은 7월 서울 도심형 면세점 사업자 선정을 앞두고 롯데와 신세계 등 다른 대기업들과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는 데다, 제주도 영세 식당을 지원하는 사회 공헌 프로그램인 ‘맛있는 제주 만들기’ 프로젝트까지 직접 챙기느라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데 그 탓인지 예전보다 다소 마른 듯 보였다.
재계에서 이부진 사장은 승부사 기질과 섬세함을 두루 갖춘 경영인으로 꼽힌다. 도심형 면세점 사업권을 따내기 위해 현대산업개발과 손을 잡고 합작법인 HDC신라면세점을 설립한 것은 신의 한 수라는 평가. 두 회사가 면세점 후보지로 내세운 용산아이파크몰은 서울의 중심이자, 용산역과 붙어 있어 중국 관광객을 지방으로 유인하는데 유리하며, 교통과 주차 면에서도 최적의 입지로 꼽힌다.
남편 임우재 씨와의 이혼소송은 장기전으로 갈 전망. 최근에는 법원이 이부진 사장 측이 제기한 가사조사 신청을 받아들이면서 소송이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가사조사는 이혼소송에서 양측의 의견 차가 클 경우 가사조사관이 소송 당사자를 직접 만나 결혼 생활, 갈등 상황, 자녀 양육 환경, 혼인 파탄 사유 등을 듣고 조사하는 절차다. 보통 2~3회에 걸쳐 진행하며, 필요에 따라 이혼 당사자들이 대면 진술을 하게 될 수도 있다. 이 사장과 임씨 측은 양육권과 재산분할을 두고 이견을 좁히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서현 사장은 그동안 코트, 부츠, 슬랙스 등을 활용해 카리스마 있는 스타일을 보여줬던 것과 달리, 이번 만찬에서는 한껏 여성스러운 모습으로 변화를 시도했다. 우선 기존 쇼트커트에 가깝던 헤어스타일을 굵은 웨이브의 단발로 바꾼 것이 눈에 띄었다. 의상은 허리 라인이 강조되고 스커트 부분이 풍성하게 퍼지는 원피스에 볼레로 스타일 재킷을 매치하고 기하학 무늬가 펀칭된 검정 가죽 가방을 들었다. 원피스와 가방 모두 아제딘 알라이아의 제품. 아제딘 알라이아는 튀니지 출신 디자이너로, 현존 디자이너 중 실루엣을 강조해 여성 신체의 아름다움을 가장 잘 표현하는 재단으로 유명하다. 국내에는 제일모직이 운영하는 편집숍 10꼬르소꼬모에서 판매되고 있다. 이서현 사장은 그동안에도 발렉스트라, 발망 등 자신이 들여온 브랜드를 공식석상에 직접 입고 등장해 브랜드에 대한 애정을 보여줬다. 이서현 사장은 연예기획사 YG엔터테인먼트와 네추럴나인이라는 합작 회사를 설립하고 고가 라인의 힙합 브랜드 노나곤을 론칭했으며 2011년 인수한 콜롬보에 대한 투자도 늘리는 등 한류를 이용한 하이엔드 패션 사업에 공을 들이고 있다.
■ 디자인 · 유내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