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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4만 시간의 봉사 여정 우영순 씨 인터뷰

문영훈 기자

2022. 12. 02

연말이 되면 붉은색이 거리 곳곳에서 눈에 띄기 시작한다. 길에서는 구세군 자선냄비 종소리가 울려 퍼지고, 사랑의 온도탑이 차가운 겨울 공기를 덥힌다. 40년 넘게 타인을 위한 봉사를 해온 우영순 씨는 이번 겨울에도 추위에 아랑곳하지 않고 빨간 비닐로 된 앞치마를 둘러매고 불우이웃을 위한 반찬 봉사에 나선다.

대구 수성구 범물종합사회복지관에서 봉사원 우영순 씨가 활짝 웃고 있다.

대구 수성구 범물종합사회복지관에서 봉사원 우영순 씨가 활짝 웃고 있다.

11월 11일 오후 2시, 대구 수성구 범물종합사회복지관 3층 식당 문을 열자 왁자지껄한 웃음소리와 함께 정겨운 음식 냄새가 쏟아져 들어왔다. 식당 한쪽에서는 두부를 부치고, 다른 한쪽 붉은 플라스틱 바구니 속에는 떡볶이에 들어갈 어묵이 잔뜩 쌓여 있었다. 이곳에서 일하는 10여 명의 봉사원은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인근 독거노인, 장애인 가정, 소년소녀가장의 집에 배달될 저녁 도시락을 만든다.

인터뷰하러 왔다고 하자, 바로 ‘회장님’을 불렀다. 이곳의 대모 역할을 하는 우영순(74) 씨다. 그는 40년 넘는 세월 동안 어려운 이웃을 위한 반찬 나눔을 비롯해 무료 급식, 재난 구호 등 힘든 현장이라면 어디든지 달려가 봉사를 해왔다. 범물종합사회복지관이 생긴 1995년부터는 반찬 봉사뿐 아니라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을 씻기는 일에도 나섰다. 그 공로로 지난해 LG 의인상, 올해는 DGB대구은행 의인상을 받았다. 3만8933시간. 대한적십자사 대구지사 직원이 건넨 공적 조서에 적혀 있는 그의 봉사 시간이다. 일로 환산하면 4년 하고도 162일이 남는 숫자다. 하지만 우영순 씨는 “봉사는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코로나19로 봉사 못 하자 눈물이 졸졸졸 흘러”

그의 하루 일과는 봉사로 채워져 있다. 대구 수성시장 근처 집에서 출발해 지하철을 타고 일주일에 나흘, 범물노인복지관을 찾는다. 오후 2시부터 저녁 도시락 반찬 재료를 준비해 꼬박 4시간 동안 만들고, 포장하고, 배달한다. 한 달에 두 번 점심 급식이 있는 날에는 아침부터 반찬 준비를 해야 한다. 주말도 예외는 아니다. 지역에서 열리는 행사 등에 참여하기 때문이다. 우 씨는 “오늘은 점심 급식이 있는 날이라 오전 8시 30분에 나왔다. 한 달에 20일은 이곳에 나온다고 봐야 한다”며 웃었다. 일흔이 훌쩍 넘은 나이, 힘들지 않냐고 묻자 “나는 힘든 걸 잘 모르는 사람”이라며 “11년 전 무릎 수술한 게 최근 들어 아프기 시작하는데, 그게 유일한 걱정”이라고 말했다.

“그래도 지는 집에 가만히 있는 게 안 되는 모양이라예.”

일상 전체가 봉사활동으로 채워져 있다 보니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유행 시기에 복지관이 문을 닫자, 우 씨는 우울증을 호소하기도 했다. 그는 “평소에 봉사 말고 가진 취미는 뜨개질뿐인데, 집에만 있으니 잠도 안 오고 슬퍼졌다”며 “그냥 가만히 있어도 눈물이 졸졸졸 났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이내 봉사가 재개되자 우 씨의 우울 증세는 가셨다.



“30대 중반이었으니까, 1970년대지예. 새마을운동 할 땐데 통장 소개로 봉사를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는 여자가 바깥일 하면 집안 어른 허락을 받아야 할 때라, 통장이 집에 와서 시아버지 허락을 받았던 기억이 납니더.”

우 씨는 대한적십자사 봉사원으로 들어가기 전인 1970년대부터 대구 지역을 위한 봉사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하천 청소, 거리 청소, 우유 팩 씻기 등 지역에 필요한 일이 있으면 발 벗고 나섰다. 대한적십자사에 들어와서는 안 해본 일이 없다. 지역에 복지관조차 없던 시절, 대구에 있는 주요 종합병원을 돌아다니며 진료에 필요한 업무 보조는 물론, 가족이 환자를 보살필 여력이 되지 않을 경우 환자 돌봄에도 앞장섰다.

재난 구호 활동도 빼놓을 수 없다. 1995년 대구 상인동 지하철 공사 현장 가스 폭발 사고, 2003년 경북 합천시 헬기 추락 사고, 2005년 대구 서문시장 화재, 2007년 태안 기름 유출 사고 현장 등 국가적 재난이 닥칠 때마다 전국을 다녔다. 그럼에도 그의 기억에 가장 오래 남은 건 2003년 대구 지하철 화재 사고 현장이다.

“당시에 거기서 한 달 넘게 밥을 했어요. 가보면 할 일이 너무 많다 아입니까. 구조대원들이나 심리 상담해주는 분들이나 모두 먹을 밥이 필요했어요. 유가족들은 처음엔 가슴이 아파가 밥을 안 먹을라 카데예. 기가 막히니까 밥도 안 넘어가는 거지예. 한 술이라도 떠먹어야 산다고 보채니까 한 술 뜨고 그랍디다.”
그는 “올해 수해 현장에도 가고 싶었지만 이제 나이가 많다고 불러주지 않아 섭섭한 마음”이라고 덧붙였다. 그간의 노고로 우 씨는 2005년 보건복지부장관 표창, 2015년에는 사회봉사 부문 대통령 표창도 받았다. 대한적십자사 관계자는 “대구지사의 상징 같은 인물”이라고 그를 소개했다.

지난해에는 LG복지재단으로부터 LG 의인상을 받았다. 2000만 원의 상금도 뒤따랐다. 돈 한 푼 받지 않고 40년간 봉사한 노고로 주어진 상금을 가지고 좋은 옷 한 벌 지을 법하지만 우 씨는 이를 모두 기부했다.

“아들하고 신랑한테 그랬어요. 이건 우리 돈이 아니다. 그러니까 남들한테 돌려줘야 한다. 늦게 복이 터져서 그런가 모르겠지만, 그렇게 좋은 상들을 받을지 몰랐지예. 얼마 전에는 대구은행에서 상을 줘서 500만 원을 받았는데, 200만 원은 적십자 대구지사에서 찬조하고 100만 원은 복지관에 줬어요. 같이 일하는 회장님들(봉사원 동료) 치킨 사주고 돈이 남았는데 차츰차츰 기회가 될 때마다 좋은 데 쓸라 합니다.”

“몸만 안 아프면 아흔에도 봉사하고 싶어요”

우영순 씨(왼쪽)를 비롯한 봉사원들은 매일 이웃에게 배달할 저녁 도시락을 만든다.

우영순 씨(왼쪽)를 비롯한 봉사원들은 매일 이웃에게 배달할 저녁 도시락을 만든다.

우 씨의 따뜻한 마음은 주변 사람으로 이어지고 있다. 대표 사례가 올해 여든 살이 된 남편 강달수 씨다. 은행에서 기술직으로 일하던 강 씨가 정년퇴직하자, 우 씨는 “복지관에 남자들이 할 일이 많다”며 “한번 같이 가자”고 조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강 씨가 복지관을 찾아 쌀 포대도 들고, 도시락을 배달한 지도 이제 16년째가 됐다. 모전여전, 며느리 역시 대한적십자사 소속 봉사원으로 일하고 있다.

대한적십자사는 봉사원이 일흔일곱 살이 되면 감사패를 전달한다. 봉사원 은퇴식 격이다. 하지만 우 씨는 “그 이후에도 계속 봉사를 하고 싶다”고 했다. 그는 “아흔 살이 돼도 몸만 아프지 않으면 계속 남을 돕는 일을 하고 싶다”며 “봉사는 남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스스로를 위한 일”이라고 말했다.

“저는 봉사 중독이라예(웃음). 남들이 봉사에 미친 사람이라고 카데요. 아무렴 어때예. 건강도 찾고, 기분도 좋고. 여기(복지관) 오면 하루 종일 웃음꽃이 피거든요. 봉사 가자고 연락 오면 그것만큼 좋은 게 없어예. 요즘 젊은 사람들도 많이 동참했으면 좋겠습니더.”

우 씨는 인터뷰를 마치자 조리가 끝난 반찬을 도시락 통에 담기 위해 다시 장갑을 꼈다. 그는 “내 할 일을 하는 순간이 가장 행복하다”고 말했다. 그의 손을 잡은 남편 강 씨의 얼굴에도 미소가 번졌다.

#우영순 #대한적십자사 #LG의인상 #여성동아

사진 지호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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