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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 behind atelier

34만 개 조각으로 쌓은 도예의 자존심, 배세진

이진수 기자 h2o@donga.com

입력 2023.01.02 10:00:01

배세진 작가는 스스로를 ‘노동자’라 부른다. ‘필동 작업실’을 운영하며 뷰티, 타일 등 다양한 브랜드와 부지런히 협업하고 전시회도 연다. 1월 초 세계적으로 유명한 프랑스 ‘파리 시테 레지던시’로 작업 여행을 앞두고 있는 그를 만났다.
“서울대학교 미술대 52-1동 건물에 있는 실기실이었어요. 높이가 50cm 정도 되는 도자기를 만들었는데, 크기가 너무 커서 실기실 앞 복도에서 작업해야 했죠. 복도에는 가마 하나가 있었고요.”

도예 작업을 시작한 계기에 대해 설명하는 배세진 작가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그는 “15년이 지난 지금까지 또렷이 기억하는 장면”이라며 자랑하고 싶은 게 많은 아이처럼 설레는 표정으로 당시의 기억을 쏟아냈다. 1999년 배 작가는 서울대 디자인학부에 입학했다. 처음부터 도예를 전공하려는 생각은 없었으나 성적에 맞춰 지원한 도예과에서 의외의 적성을 발견했다. 첫 실기 수업에서는 뭘 만들어야 할지 몰라 무작정 크게 도자기를 빚었는데, 선배들로부터 예상치 못한 칭찬을 받은 덕에 도예에 확신을 갖게 됐다. 현재 작가는 아일랜드 극작가 사뮈엘 베케트의 대표작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영감을 얻어 같은 이름의 주제로 연작을 펼치고 있다. 흙으로 만든 작은 판 조각을 이어 붙여 입체물을 만들기도 하고, 판 조각을 한 면에 붙여 그림처럼 평평하게 만들기도 한다. 배 작가는 해당 작품으로 2017년 제1회 스페인 ‘로에베 재단 공예상’ 파이널리스트에 이름을 올렸다. 2022년 12월 8일 서울 중구 필동에 위치한 그의 작업실에서 새해맞이로 분주한 작가를 만났다.

작업만큼 중요한 공방 수업

고도를 기다리며, Ceramic, ink on paper, 73×93cm, 2021

고도를 기다리며, Ceramic, ink on paper, 73×93cm, 2021

배 작가의 작업실은 남산 1호 터널에서 굽은 언덕을 두어 번 오르면 보이는 2층짜리 붉은 벽돌집이다. 이곳은 작가의 개인 작업실과 도예 공방으로 사용 중이며 ‘필동 작업실’이라 불린다. 공방 운영은 부업이 아닌 본업이다. 수업은 작가에게 작품 활동만큼이나 중요한 일. 시간 할애도 공평하게 하고 있다. 그가 수업에 진심을 다하는 이유는 제대로 만든 공예품의 가치를 많은 사람에게 알리기 위해서다. 배 작가는 “생활용품점에서 파는 1만 원짜리 도자기와는 차원이 다르다”고 말한다.

이곳 작업실을 사용한 지 얼마나 됐나요.

7년째 사용하고 있어요. 지하 1층부터 지상 2층까지 있는데, 지하층은 주차장과 창고로 사용해요. 공간이 꽤 커서 흙과 작품을 그곳에 보관하고 있어요. 1층에서는 공방 수업을 주로 하고요. 2층에는 방 3개가 있는데 입체 작업을 하는 방, 컴퓨터·평면 작업을 하는 방, 공방 수업 도와주시는 선생님 두 분의 공간으로 구분해서 사용하고 있어요.

고도를 기다리며, Ceramic, ink on paper, 73×93cm, 2021

고도를 기다리며, Ceramic, ink on paper, 73×93cm, 2021

공방 운영도 열심히 하시네요.

공예의 저변을 넓히기 위해서예요. 사람들이 도예품을 보는 안목이 좀 생기면 작품도 더 나은 대우를 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2년 전쯤 제 작업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으면서 교육자로서 잘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어요. 공예 시장 자체가 너무 작아요. 미지의 세계와 같죠. 작가들이 좋은 작품을 만들어도 시장 자체가 그 작가를 끌어주지 못하는 상황이라 성장할 길이 없어요. 최근에는 사람들이 미술을 돈 되는 시장으로 여기고 작가와 작품에 관심을 기울이며 공부도 하잖아요. 공예와 다르게 기존에도 컸던 시장이 더욱 커지고 있죠. 안타깝게도 공예에서는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고 있어요.



보통 공방 운영을 부업으로 삼는 경우가 많은데요.

저도 그렇게 시작했어요. 개인 작업이 주였고 공방 수업은 사이드 직업으로 여겼던 때가 있었죠. 20대 중후반에 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작품을 팔기가 쉽지 않잖아요. 그래서 일종의 보험으로 공방에서 취미생들을 가르치거나, 학원 혹은 학교로 출강을 나가죠. 저도 아직까지 모교에서 강의하고 있는데, 작가 대부분이 교육을 언제든 놔버려도 되는 부업쯤으로 여기는 게 안타까워요.

보통의 작가 입장에서는 피할 수 없는 현실이기도 한데요.

처음부터 이런 생각을 한 건 아니에요. 공예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니 전공생 사이에서도 이탈자가 많이 생겨요. 근사한 걸 기대하고 왔다가, 하면 할수록 촌스럽고 고리타분하다는 생각이 드는 거죠.

그래도 전공생들은 어느 정도 공예에 대해 알고 과에 들어오지 않나요.

우리가 흔히 아는 공예는 한국사 시간에 배운 빗살무늬 토기, 고려청자, 조선시대의 백자 달 항아리 정도예요. 여기서 공부를 좀 더 하면 분청사기의 ‘이도다완’ 정도를 알죠. 도예과 전공생도 입학할 때는 이 정도밖에 몰라요(웃음). 현대 공예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으니까요. 몇 년 전까지 공예 트렌드 페어를 열면 초대권이 항상 남았어요. 일반 관객 유입이 매우 부족한 거죠. 원인이 뭘까 분석해봤는데 거기엔 교육이 있었어요. 많은 사람이 공예품에 대해 잘 모르는 거죠. 교육을 해야 사람들 사이에서 익숙해지고 공예 시장도 커지죠. 해외 유명 브랜드 도자기는 비싼 돈을 주고도 잘 사면서 정작 그것보다 훌륭한 국내 작가들의 작품은 시장에서 대우를 못 받는 현실이 안타까워요.

필동 작업실 외에 ‘필동 실험실’이라 부르는 ‘lab_1341’ SNS 계정이 있는데요.

필동 실험실을 물어본 사람은 처음이에요. 너무 좋다(웃음). 본격적으로 사용하고 있진 않은데, 작업실 후배들과 도구나 기법을 연구하고 기록하려고 만든 계정이에요. 공방 수업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하려고요. 예전에 중국의 전통 다기 ‘자사호’ 제작 영상을 한번 봤는데 물레를 사용하지 않고 다 손으로 만들더라고요. 물론 재료의 특성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물레로 만든 것보다 더 동그랗고 정교해서 어떻게 제작되는지 궁금했어요. 사용한 도구와 기법을 보니 우리도 비슷하게 할 수 있을 것 같아 실험해봤죠. 프라모델처럼 반구 모양이나 실린더 같은 기본 틀로 조립하면 되겠더라고요.

회사 생활 덕분에 도예를 만나다

중구 필동에 위치한 작업실 전경.

중구 필동에 위치한 작업실 전경.

99학번인 배 작가는 대학 입학 후 8년 만인 2006년 처음 도예를 접했다. 경제적인 이유로 오랫동안 휴학을 한 탓이다. 그 전까지 그는 대학 선배가 운영하던 디자인 회사에 다니며 돈을 벌었다. 매일같이 하던 야근과 주말 근무를 그만두고, 학교로 돌아가 도예 작업에만 몰두하면서 그는 새삼 자유를 만끽하게 됐다. 흙으로 만든 판 조각을 이어 붙이는 작업은 그때부터 시작됐다. 조각마다 번호를 매기고 있는데, 최근 판 조각의 숫자가 34만을 넘었다.

얼떨결에 시작한 전공인데 적응을 잘했나 봐요.

도자기를 잘 모르니까 무조건 큰 게 좋은 줄 알고 큰 작품을 만들었어요. 학교 선배들이 지나가면서 “야, 너 되게 잘했다”고 하는 거예요. 직장 생활할 때는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말이었죠(웃음). 온전히 나에게 해주는 칭찬 같았어요. 일종의 격려였을 테지만 그 말이 무척 감동적이더라고요. 그때 ‘해볼 만하겠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죠.

판 조각들을 이어 붙이는 이유가 있나요.

도자기는 완성까지 시간이 오래 걸려요. 초벌을 해서 가마에 넣고, 유약을 발라 다시 굽기까지 기다림의 연속이죠. 내가 아닌 시간이 작품을 만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면서 ‘그럼 이 오랜 시간을 티가 나게 표현해야겠다. 조각에 번호를 매겨서 하나씩 붙여볼까?’로까지 사고가 확장됐어요. 그래야 보는 사람이 ‘공을 들여 탄생시킨 작품’이라는 걸 알아줄 것 같았어요. 실제로 컵 하나를 만든다 치면, 도예가의 손길이 닿는 순간은 10분 이내예요. 이후 컵이 완성되는 데는 일주일, 길게는 한 달이 걸리죠. 가마에 들어가면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알 수 없고요. 회사 일과 다르게 도자기는 나를 아무리 조져도(웃음) 안 되는 영역이더라고요.

흙도 직접 만들어서 사용하고 계시죠.

네. 페이퍼 클레이요. 흙에 종이를 섞은 시판 재료인데 저는 종이 함량을 조절해야 해서 직접 만들고 있어요. 휴지를 불려 종이죽을 만들고, 알루미나라는 분말 재료를 일정량 넣죠. 흙이 마를 때 수축이 덜하게끔 하는 거예요. 종이 흙은 장단점이 확실해요. 흙이 갈라지는 걸 막아주는 대신 가마에서 구울 때 타는 냄새가 많이 나요. 또 오래 보관하면 썩기도 하고 곰팡내도 나죠.

반려견 대박이와 함께.

반려견 대박이와 함께.

작가가 직접 만든 종이 흙의 질감을 실제 느껴보았다. 어릴 적 장난으로 휴지에 물을 적셔 물기를 다 짜냈을 때의 퍽퍽함이 말랑한 흙에서 느껴졌다. 종이 함량이 2%밖에 안 되는데도 손에서 느껴지는 종이 질감은 꽤 리얼했다. 작가는 작업에 따라 종이의 양을 조절해서 쓰고 있다. 그가 운영하는 공방 수업에서도 마찬가지다. 5mm와 7mm 두께의 흙, 딱딱한 흙, 말랑한 흙 4가지를 항상 준비한다. 그는 학교 강의에서도 도예 전공생들에게 “시판 흙을 그냥 쓰지 말고, 어떻게 개선해서 사용할 건지 궁리하라”는 주문을 자주 한다. 흙을 제작하는 비용이 많이 들지만 다양한 흙을 사용할 수 있으니 이렇게 좋은 작업 환경이 또 있나 하는 생각에 항상 욕심을 낸다고.

2010년 즈음 입체 작업에서 평면 작업이 새롭게 등장합니다.

입체 작업은 딱 봐도 (비싸서) 안 팔리겠다, 굶어 죽겠다 싶더라고요(웃음). 가난한 작업자였기 때문에 지속 가능한 작업을 위해서 금전적인 문제를 무시할 수 없었어요. ‘평면 작업은 어떻게든 판매할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시작했죠. 그리고 입체 작업은 흙이 굳어서 한번 시작하면 멈추기가 어려워요. 아무리 흙에 물을 뿌려도 수분이 자연 증발되거든요. 힘들어서 쉬고 싶어도 쉬지 못할 때가 많아요. 그에 비해 평면 작품은 작업 과정이 좀 더 수월해요.

“같은 작업을 부지런히 해나갈 것”

배세진 작가의 입체 도자 작업.

배세진 작가의 입체 도자 작업.

2022년 9월 PBG갤러리에서 열린 개인전 ‘지속, 반복, 변화, 순환’에서 배세진 작가는 작품을 통해 한 가지 선언을 했다. “언제나 똑같은 작업을 해나가는 데 주저하지 않을 것”이라고. 이 전시에서 그는 같은 구성의 입체 작업 12개를 나란히 선보였다.

배 작가는 기술과 기법이라는 재료 없이 작업은 이루어질 수 없다고 설명한다. 창의성보다 부단함과 부지런함이 더 중요하다는 의미다. 입체 작업은 15년째. 그는 다양한 협업을 통해 창의성을 환기시킨다. 2021년 12월 작가는 코즈메틱 브랜드 ‘탬버린즈’와 입체 작업 형태의 외관으로 만든 오브젝트 컬렉션, 도자기 캔들을 선보였다. 2023년에는 뷰티 브랜드 ‘알보우’와 손잡고 향 제품을 출시할 예정이다.

힙한 브랜드와 첫 협업을 진행하셨더라고요.

사실 전 탬버린즈 브랜드를 전혀 모르고 있었어요. 제가 생각하는 큰 회사는 아모레퍼시픽이나 LG생활건강 정도(웃음). 핸드크림을 만든다기에 작은 회사가 열심히 하는구나 여겼죠. 입체 작업으로 협업하고 싶다고 해서 비용에 상관없이 무조건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샘플부터 제작하고, 금액적인 부분은 한참 뒤에 의논했어요. 기존 작업의 본질적인 걸 해치는 게 아니라면 조율은 얼마든지 가능해서 협업에 거부감은 없어요. 봄부터 가을까지 샘플 작업하고, 본 작업을 9~10월 두 달 바짝 했죠. 완제품이 나오기까지 1년 걸렸어요.

작품을 모티프로 만들다 보니 제품 가격 측정할 때 고민스러웠겠어요.

맞아요. 저는 수익이 나지 않더라도, 제품 판매가는 높았으면 했어요. 제 작품 가격과 제품 판매가 사이의 갭이 너무 크면 작품을 사신 분들에게 누가 될 수 있잖아요. 어쩔 수 없이 15만 원에 오케이했는데, 그나마 브랜드 이미지가 있었기에 그 가격이 가능했죠. 컬렉터분들이 ‘와 저 작가가 왜 저 (낮은) 가격에 팔아?’ 하고 의아해하면 안 되잖아요. 다행히 탬버린즈가 굉장히 멋지고 힙한 브랜드였더라고요. 캔들 오픈하고, 여기저기 지인들한테서 DM이 왔어요. “네가 뭔데 탬버린즈랑 일하냐”고요(웃음). 제 작품을 사신 분들도 캔들을 하나 더 샀다고 말씀해주시고, 결과적으로 탬버린즈와 일하길 잘했죠.

뷰티 브랜드와 두 번째 협업 제품을 출시할 예정이신데요.

알보우라는 브랜드인데요. 아로마 오일을 뿌려서 발향하는 툴을 판 조각으로 만들고 싶다는 제안을 받았어요. 1월 출시 예정이에요. 알보우는 수량을 최소한으로 해서 200개 정도 만들려고요. 제가 직접 다 작업하고, 조각에 번호까지 찍을 예정이에요.

2023년에는 프랑스 파리 시테 레지던시에 가신다고요.

1월 3일부터 3월 21일까지 프랑스 시테 레지던시에 가게 됐어요. 학교 강의 때문에 그곳에 오래는 못 있어요. 어디 돌아다니면서 영감받는 스타일이 아니라서 가봤자 박물관이랑 미술관 몇 군데겠지만, 이곳과 단절된 곳이 필요해서 가요. 익숙한 작업 환경과 관계없는 곳으로요.

흙이나 가마 등 평소 쓰던 재료가 필요한 건 아닌가요.

다행히 도자기 가마 하나가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럼 됐다 싶어요(웃음). 그곳에 재료나 도구는 아무것도 안 가져갈 거예요. 현지 숍에서 구할 수 있는 흙으로 돌이나 만들다 오려고요(웃음). 조약돌 같은 거 만들어서 번호 하나씩 찍으면 하루에 100~200개는 거뜬할 거 같으니, 3개월이면 수천 개는 완성하겠는데요(웃음). 복잡한 걸 만들면 한국으로 보내기도 힘들어요. 1월 초에 타일 브랜드 ‘윤현상재’에서 그룹전이 열려요. 그것도 준비해놓고 가야 해서 일정에 쫓기고 있죠. 파리에서 생각할 시간과 여유를 가질 기회가 생긴 것 같아 내심 기대돼요.

#배세진 #도예작가 #PBG #여성동아

이진수 기자의 비하인드 아틀리에
美에 사는 기자. 예술 작품의 아름다움으로 가득 찬 공간이 좋아서 갤러리에 간다. 참을성이 없지만 근성은 있다. 데이비드 호크니 선생님을 만나는 그날까지 세계 곳곳 아틀리에 탐험을 계속할 참이다.

사진 김도균 
사진제공 PBG



여성동아 2023년 1월 70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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