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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

‘색층’ 굽는 단색화 작가 윤종주

이진수 기자

2022. 07. 04

작가의 작업 과정은 베이킹과 닮았다. 먹음직스러운 빵을 만들려면 재료 비율과 오븐 온도를 정확하게 맞춰야 하지 않나. 또 빵은 오븐에서 꺼내기 전까지는 어떻게 완성될지 예측할 수 없다. 윤종주 작가는 다양한 색을 반죽해, 일상의 온도와 습도로 자신이 가장 자신 있는 그림을 구워내고 있다.



2021년 2월 17일, 윤종주(51) 작가를 처음 알았다. 그리고 1년여가 흐른 지난 6월 7일, 서울 강남구 청담동에 위치한 ‘조은숙 갤러리’에서 작가를 처음 만났다. 작가는 무척 궁금했다는 듯이 “절 어떻게 알고 섭외하셨어요?”라고 묻는다. 구체적인 계기가 바로 떠오르지 않아 “제가 꽤 오래전부터…” 하며 어물쩍 말을 흐렸다. 집에 돌아와 며칠 동안 옛 기억을 더듬다 문득 발견한 사진 한 장! 지난해 2월 SNS에서 우연히 만났던 ‘윤종주 개인전’ 관련 이미지였다. 그 무렵 작가는 유명 가구 편집 숍 ‘에이치픽스 도산’에서 전시회를 열었다. 그 준비 과정을 담은 사진을 SNS에서 보는 순간 눈이 번쩍 뜨였다. ‘완전 내 스타일인데, 이 작가 누구지?’ 하며 그에 대한 정보를 찾아다니던 생각이 난다.

윤종주는 캔버스에 여러 색채를 층층이 쌓아 올리는 독특한 작업으로 주목받고 있는 작가다. ‘이 거대한 작품들을 어디서 완성하는 걸까’ 궁금했는데 작업실이 대구라고 한다. ‘비하인드 아틀리에’ 사상 처음으로 지방 출장을 떠나기로 했다. 6월 13일 오전, KTX를 타고 찾아간 그의 작업실은 평화롭고 따뜻했다. 작가가 내준 붉은색 나무 트레이 위 따뜻한 드립 커피와 딸기 맛 다쿠아즈는 곧이어 나눌 향긋한 대화를 암시하는 듯했다.

돌고 돌아 결국엔 대구

윤종주는 대구 계명대 대학원 회화과 출신이다. 그는 학생 시절 학교 앞에 처음 작업실을 마련했고, 이후 대구 서구에 있는 집 창고, 미국 뉴욕, 다시 계명대 앞, 경기 파주를 거쳐 2011년 대구 서구로 돌아왔다. 지금 그의 아틀리에가 있는 곳은 작가가 20대 초반, 미술을 시작하기 전부터 가족과 함께 거주했던 건물 2층이다. 4층짜리 건물 3층은 그의 집이며, 4층에는 작가의 어머니가 살고 있다.

아틀리에에 들어선 순간 ‘복잡한 도시 가운데 있는 순수하고 깨끗한 곳’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기자님 마음이 순수해서 그렇게 보이는 게 아닐까요(웃음). 얼마 전까지는 이 주변이 아주 조용했는데 (지난 3월) 서대구역이 생기면서 좀 복잡해졌어요. 그래도 다른 지역에 비하면 고즈넉한 편이라 작업하기 좋다고 생각해요.



바로 위층이 집이라고요.

네. 아주 편해요. 작업하며 틈틈이 어머니를 케어할 수 있고, 밥 먹기도 좋고요. 여러 가지로 유익하죠.

서울에서 전시회를 여실 때가 많은데 왔다 갔다 하는 게 번거롭진 않으세요.

KTX를 타면 서울까지 가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아요. 1시간 30분 정도면 도착하죠. 서울 안에서도 좀 먼 곳에 가려면 1시간은 걸리잖아요. 물리적 거리는 별로 중요한 요소가 아닌 것 같아요. 저는 제가 가고 싶은 곳이면 어디든 부담 없이 기꺼이 갑니다. 전시하기 좋은 장소, 만나고 싶은 사람, 대구에 있다고 해서 놓치지 않아요.

첫 작업실은 학교 앞이셨다고요.

네, 대구 계명대 근처요. 대학원 다니며 거기서 3년 정도 작업했어요. 그러다 이 집 창고를 두 번째 작업실로 썼죠. 그때 아버지 한의원이 이 건물 1층, 제 작업실이 2층에 있었어요. 3층이 집이었고요. 한창 그림을 그리고 있으면 아버지가 오셔서 뭘 어떻게 하고 있나 쳐다보고 가시곤 했죠. 하루는 술을 거나하게 드시고 오셨어요. “내가 주변에 알아보니까 그림 그리고 예술 하면 힘들고 고독하다더라. 괜찮겠느냐” 물어보시더군요. 제가 “힘들어도 한번 해보겠다”고 한 뒤로는 한 번도 반대나 (싫은) 말씀 안 하시고 저를 믿어주셨어요. 그 덕에 지금까지 작업할 수 있는 것 같아요.

2007년 뉴욕 생활 당시 작가의 모습(왼쪽). 재료 연구를 하러 떠난 파주 하제스튜디오.

2007년 뉴욕 생활 당시 작가의 모습(왼쪽). 재료 연구를 하러 떠난 파주 하제스튜디오.

뉴욕에도 다녀오셨더라고요.

2007년에 1년 정도요. 당시 제가 방황을 좀 하고 있었어요. 세계 미술의 중심지에 꼭 한번 가보고 싶었죠. 다행히 작품이 몇 점 팔려서 여비는 마련된 상태였어요. 부모님이 반대하실 것 같아 혼자 준비를 다 끝내놓고 출국 2주 전 말씀드렸죠.

순순히 허락하시던가요.

그럴 리가요. 곧장 여권 빼앗기고, “머리 깎겠다” “앞으로 작업을 절대 못 하게 하겠다”는 말씀도 듣고 그랬죠(웃음). 저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어요. 여권을 다시 대차게 빼앗아서 “나는 내가 꿈꾸는 곳에 꼭 가야겠다”면서 미국으로 날아갔거든요. 그때는 ‘조금이라도 더 젊을 때 다녀와야지’ 하는 마음이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참 어렸구나’ 싶어요.

뉴욕 가서 작업하신 건가요.

처음엔 아는 언니랑 한두 달 정도 브루클린에 머물렀어요. 그다음에 맨해튼 어퍼 이스트 쪽 헌터 칼리지에서 어학을 배우며 그림 작업도 조금씩 시작했죠. 작업에 열중하기보다는 궁금했던 갤러리나 뮤지엄 등을 둘러보면서 뉴욕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를 공부하는 데 집중한 것 같아요. 그러다가 ‘파라핀’이라는 따뜻하고 포근한 감성을 내는 재료를 발견했어요. 온도 변화에 민감해 겨울에는 깨지기 쉽고 여름에는 흘러내리기 쉬운데 (저는) 그 물성이 좋더라고요. 거기 반해서 ‘이제 고향에 돌아가 파라핀을 갖고 본격적으로 작업을 해봐야겠다’는 마음이 들었어요. 그래서 다시 대구에 작업실을 꾸린 거죠(웃음).

파라핀은 어떤 재료인가요.

원래는 양초나 화장품을 부드럽게 하는 물질이에요. 그 안에 크레용 같은 걸 넣고 같이 끓이면 고운 색이 나죠. 캔버스에 부으면 약간 두껍게 마르면서 반투명하고 따뜻한 느낌을 내고요.

파라핀을 만나며 그의 작업에 대한 열망이 커진 건 분명하다. 하지만 파라핀은 작가에게 큰 좌절을 안기기도 한 재료다. 파라핀을 소재로 약 1년간 작업에 몰두한 뒤의 어느 겨울날, 아침 일찍 작업실 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애써 제작한 그림들이 다 산산이 깨져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파라핀이 추위에 약한 건 알았지만, 막상 망가진 그림을 보니 마음이 무너졌다. 그 작업실에 더는 발을 들여놓을 수 없을 것 같아, 그는 아틀리에를 파주 하제스튜디오로 옮겨버렸다고 한다. 그때부터 작업실에 먹고 잘 수 있는 텐트를 쳐놓고 서울 곳곳의 화방을 돌아다니며 파라핀을 대체할 만한 재료를 찾았다. 약 6개월 만에 발견한 ‘매트 미디엄’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윤종주 작업의 주된 재료다. 매트 미디엄은 파라핀 계열 화합물로, 굳었을 때 파라핀과 비슷한 분위기를 내지만 온도나 습도에는 좀 더 강하다. 작가는 현재 매트 미디엄과 아크릴물감, 잉크를 혼용해 캔버스에 덧칠하며 독특한 분위기의 작품을 만들어내고 있다.

파주에서 작업의 새로운 길을 찾으셨는데, 왜 다시 대구로 내려오신 건가요.

처음엔 서울에서 작업을 해야겠다 싶어 여기저기 공간을 보러 다녔어요. 그런데 임차료가 적어도 한 달에 60만~70만원이더라고요. 그때는 제 작품이 거의 팔리지 않을 때라 작업 재료도 넉넉히 사지 못하던 때예요. ‘어떻게 하며 좋을까’ 망설이던 차에 부모님이 “고향으로 내려오면 어떻겠느냐”고 하셨어요. 당시 아버지가 좀 편찮으셨거든요. 지금 이 작업실에 세 들어 살던 분이 때마침 나가기도 했고요. 서울에서 억지로 버티는 것보다 부모님 곁이 나을 수도 있겠다고 판단해 다시 온 지 벌써 11년이 됐네요.

돌아오니 예상만큼 만족스럽던가요.

작업 환경이 제 생각보다 훨씬 더 안정적이에요. 또 요즘은 어느 곳에 있든 저를 알릴 수 있는 도구가 많잖아요. SNS에 작품을 올리면 여기저기서 연락이 오죠. 2019년 주홍콩문화원에서 한 전시는 페이스북으로 소통하며 준비했어요. 에이치픽스 전시를 하자는 연락도 SNS를 통해 받은 거고요. 예전에는 작업을 아무리 잘해도 세상에 알릴 방법이 없어 힘든 사람이 많았는데, 요즘은 달라요. 서울에 있든, 대구에 있든, 훨씬 더 시골에 있어도 자신을 알리려고 노력하면 전파를 타고 세상 곳곳에 날아갈 수 있어요. 얼마나 밀도 있고, 진정성 있는 작업을 하느냐가 중요해졌죠.

작가님과 말씀을 나누다 보니 조용하고 내향적인 성격이실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외부와 SNS 등으로 소통하는 게 어렵지는 않으세요.

저는 어릴 때부터 말이 별로 없었어요. 선생님이 “넌 하루에 몇 마디나 하니?” 하실 정도로요. 그렇게 말주변이 없어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생각이나 제 안의 기쁨, 분노 같은 걸 그림으로 표현하다 이 자리까지 온 거죠.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제 작업에 자신감이 생긴 것 같아요. ‘내가 혼자 단련한 시간을 사람들과 공유해 그들의 감정을 치유해줄 수 있게 되면 좋겠다. 그러자면 내 작업을 더 널리 알려야겠구나’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제가 작가로서 잘되고 싶은 이유는 전시 등 여러 기회를 접하면서 계속 배우고 진화해나갈 수 있어서예요. 자신을 잘 표현하는 사람에게 새로운 기회가 계속 생기잖아요. 거기서 또 다른 작업을 할 수 있는 원동력을 얻기 때문에 어떤 형태로든 홍보를 하고자 노력하는 것 같아요.

일상의 온도로 작품을 굽다

윤종주 작가의 그림은 손을 아무리 길게 뻗어도 닿기 어려운 태양 같은 느낌이다. 다른 화가 전시를 볼 때면 가끔 ‘아, 캔버스를 한 번만 만져보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곤 하는데, 윤종주의 그림은 색이 정말 오묘하고도 고귀해 감히 손대고 싶다는 마음조차 생기지 않는다.

이런 작품을 만들어내는 과정을 보면 윤종주가 얼마나 열정 넘치는 사람인지 알 수 있다. 먼저 캔버스에 칠을 해 표면을 균질하게 만들고, 샌드페이퍼를 이용해 곱게 문지른 다음 캔버스를 눕혀 가장자리에 테이핑을 한다. 그 위에 매트 미디엄과 아크릴물감, 잉크를 섞어 만든 물감을 붓고 캔버스를 기울인 뒤 말린다. 그 위에 또 물감을 붓고 말리는 과정을 20~30번 반복한다. 작가는 이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캔버스 위에서 색이 살아 숨 쉰다고 말한다. 그의 작품이 가진 특유의 깊이와 공간감, 그림 속 빛과 선이 한 화면에서 어우러지는 것이다.

2021년 에이치픽스 도산에서 열린 윤종주 작가 개인전.

2021년 에이치픽스 도산에서 열린 윤종주 작가 개인전.

색층을 보통 얼마나 쌓으시는 건가요.

일반적으로 20~30번인데 비슷한 계열 색을 반복해 쓸 때도 있어서 그 수를 일일이 세지는 못해요. 작업할 때마다 ‘이 정도에서 멈춰야겠다’ ‘이걸 좀 더 해야겠다’ 이렇게 생각하죠.

하나의 색을 올린 뒤 또 어떤 색을 올릴지는 즉흥적으로 정하시나요.

네. 이 색을 보강하면 작품이 더 깊어지겠다, 더 아름다워지겠다, 그렇게 직관적으로 떠오르는 색을 만들어 올리죠. 때로는 보색이, 때로는 비슷한 색이 올라갈 수 있어요. 작업하다 얼룩이 생겼을 때는 같은 색을 올려야 커버가 돼요. 반면 너무 같은 색만 하면 그림 안의 공간, 선, 빛이 보이지 않거든요. 그럴 때는 다른 색을 사용해 공간과 그러데이션을 만들고 생명력을 부여하죠.

작업 방식을 보니 매트 미디엄과 아크릴물감, 잉크를 섞어 직접 물감을 만든 뒤 거름망에 다시 거르시더라고요.

입자를 균질하게 만들려고 그래요. 물감에 이물질이 들어가면 안 되거든요. 저는 여름철이 되면 캔버스에 일일이 모기장을 씌워줘요. 물감이 다 마르기 전에 벌레가 붙으면 큰일 나니까요. 저야 모기에 뜯겨도 괜찮지만, 수십 일 걸려 완성한 작품을 망치는 건 절대 안 될 일이잖아요(웃음). 제가 원래 그리 깔끔한 편이 아니었는데 이 작업을 하며 성격이 많이 변했어요. 작품에 혹여 먼지라도 들어갈까 싶어 작업실 바닥을 항상 닦고, 음식물 때문에 벌레가 들어오지 않게 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러고 보니 작가님 작품의 색은 참 화려한데 정작 작가님은 무채색 옷을 즐겨 입으시더라고요.

무채색 계열이 사람 얼굴을 분명하게 표현해준다고 느껴요. 너무 컬러풀하거나 화려한 옷은 사람보다 먼저 눈에 들어오잖아요. 작가는 작업으로 이야기해야 하고, 사람은 진실된 얼굴로 이야기해야 한다고 보기 때문에 옷은 수수한 걸 택해요. 무채색을 고집하는 건 아니지만, 입다 보니 조금 무난해도 저 자신을 드러낼 수 있고 제 작업을 드러낼 수 있는 걸 선택한 거죠.

요즘 작품은 거의 선으로 이뤄져 있지만, 2011년 작품을 보니 형상이 있더라고요. 스타일을 바꾼 계기가 있으세요.

매트 미디엄 재료를 발견한 거요. 그때부터 지금의 미니멀한 패턴이 정착됐어요. 형상 작업을 계속하면 그 안에 갇히거든요. 저는 작가 활동 초기엔 ‘테라코타’라는 건축 재료를 썼어요. 그림에 모래알 같은 입체감을 주기 위해서였죠. 파라핀을 쓸 때도 형태가 있었어요. 파라핀을 끓여서 캔버스에 부으면 약간 기포 같은 게 생기는데 그게 마치 유기체처럼 아름다웠죠. 그 형상을 더 확대해 표현하곤 했어요. 처음에는 자연스럽게 생긴 기포를 활용하다 나중에는 점점 인위적으로 형태를 만들기도 했어요.

지금은 상하좌우가 없는 올오버(all over) 단색화를 하죠. 기하학적인 구조를 만들어내고, 구조를 모듈화하는 작업도 할 수 있어서 좋아요. 할 수 있는 게 무궁무진한 것 같아요. 수시로 ‘매일매일 빨리 작업하고 싶다’ ‘하고 싶은 게 정말 많다’는 생각을 합니다. 비로소 제자리에 돌아와 ‘윤종주 작업’의 색깔을 찾은 듯한 느낌이에요.

눈치채지 못했던 작가의 꿈

2021년 에이치픽스 도산에서 열린 윤종주 작가 개인전.

2021년 에이치픽스 도산에서 열린 윤종주 작가 개인전.

어릴 적부터 그림을 좋아했던 작가는 실력도 남달랐다. 중학생 때 그가 완성한 ‘사람 발’ 그림을 보고 미술 선생님이 “정말 살아 있는 발 같다”고 칭찬했을 정도라고 한다. 그러나 자신이 화가가 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소녀는 남들처럼 평범하게 학교를 다녔고, 대학에서 공중보건학을 전공했다.
그가 ‘그림을 제대로 공부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처음 한 건 대학 졸업 후 취업까지 한 뒤였다고. 취미로 미술학원에 다니던 때다. 마침 학원 선생님이 “대학원에 가보는 게 어떠냐”는 제안을 해왔다. 처음엔 ‘미대도 안 나온 내가 대학원 시험을 잘 치를 수 있을까’ 생각했는데, 도전 결과는 합격, 그것도 전체 신입생 가운데 1등이었다. 윤종주는 그렇게 1995년, 24세 때 계명대 대학원 회화과에 입학한다.

와, 운명적인 스토리네요.

어릴 때는 그저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하는 아이, 딱 거기까지였던 것 같아요. 유일하게 하고 싶은 게 그림이었고, 계속해야겠다는 생각은 했지만 대학에서 그림을 전공하겠다는 얘기는 누구한테도 못 했어요. (어쨌든 늦게나마) 장학금 받고 자신만만하게 대학원에 들어갔는데 그 세계 안에 텃세라는 게 있잖아요. 아무리 해도 (미술 전공자들이 그림을 배운) 4년이라는 시간이 뛰어넘을 수 없는 벽처럼 느껴졌어요. 그때 참 열심히 했고, 울기도 많이 울었죠.

부모님도 딸이 갑자기 미대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접하고 깜짝 놀라셨겠는걸요.

네. 회사를 다니고 있었는데 바로 그만두고 대학원에 갔으니까요(웃음).

화가들은 작품이 처음 팔린 날을 잊지 못한다고 하던데, 작가님은 어떠신가요.

저도 기억납니다. 대구에 ‘스페이스 129’라는 대안공간이 있어요. 대학원 졸업하고 거기서 전시를 했는데 반응이 좋았어요. 제가 아는 신부님이 오셔서 “이건 내가 갖고 싶다”며 한 작품을 구입해 가셨어요. 제가 참 아끼던 그림이죠. 한때는 그 그림을 기준으로 계속 작업해봐야겠다는 마음을 가졌는데, 이제 와 생각하면 말이 안 되죠. 아무리 노력해도 똑같은 그림은 만들 수 없거든요. 오히려 더 좌절만 하게 되고요. 아예 그 그림을 없애고, 저만의 그림을 새로 그리니까 다른 작업을 계속 이어나갈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작가로서의 인생에 전환점이 된 것이, 제가 작가님을 처음 알게 된 에이치픽스 전시라고 들었어요.

네. 정말 감사한 일이죠. 그 전시 이후 SNS 팔로어가 1000명 넘게 늘었어요. 화랑 수십 군데서 계속 연락이 오고요. 그 전에는 지방에 머물며 서울에 몇몇 연결고리만 갖고 작업하는 작가였는데 에이치픽스 덕분에 관련 분야 종사자들을 많이 만나게 됐어요. 저를 대중적으로 알리는 계기도 됐고요. 그때부터 조금씩 안정적으로 작업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돼 부모님도 “지금까지 고생한 보람이 있다”며 좋아하셨어요. 특히 엄마한테 자랑스러운 딸이 됐죠.

윤종주는 2005년 대구문화예술회관의 ‘올해의 청년작가’ 리스트에 이름을 올렸고, 2020년 같은 기관에서 ‘올해의 중견작가’로 선정했다. 지난해에는 아트부산, 한국국제아트페어(KIAF) 등 유명 아트페어에 작품을 선보였으며, 올해는 인천 파라다이스시티 호텔, 롯데백화점 잠실 에비뉴엘 아트홀 등 굵직한 공간에서 그룹전을 가졌다. 매년 대구와 서울을 오가며 개인전도 꾸준하게 열고 있다. 2019년에는 그가 존경하는 단색화 거장 최병소 작가와 2인전을 열었다. 그 전까지 최 작가가 후배와 2인전을 연 적이 없었기에 윤종주에게는 남다른 의미가 있는 전시였다.

요즘 전성기가 왔다고 생각하세요.

첫 번째 기회는 왔다고 생각하는데, 아직 나아갈 길이 멀어요. 작가의 삶은 마라톤 코스 같아요. 멀고 험하죠. 지금 누리는 기쁨은 그동안 고생한 저에게 돌아온 작은 보상과 빛이라고 봐요. 앞으로 초심을 잃지 않으면서 계속 영역을 넓혀가야죠.

아직 전속 화랑이 없는 걸로 압니다. 제안은 많이 받으실 것 같은데요.

몇 군데서 제안이 오긴 했는데, 전속 계약을 맺는 게 쉽지 않아요. 일단 화랑과 제가 추구하는 방향이 같아야 하고, 또 관계자와 신뢰도 깊어야 하죠. 전속 계약을 한 뒤 고생하는 작가들을 많이 봐서 저는 다소 시간이 걸리더라도 저와 잘 맞고 서로에게 시너지를 줄 수 있는 화랑과 작업을 이어나가고 싶어요.

최근 국내 미술시장에서 단색화에 대한 관심이 정말 높아지고 있어요. 한국 단색화가들에 대한 해외 관심도 크고요. 작가님도 느끼시죠.

우리 주위를 둘러싼 광고나 간판들이 하나같이 복잡하잖아요. 잠시도 눈을 쉬기 어렵죠. 그래서 사람들이 단색화를 찾는지도 몰라요. 작품을 통해서나마 평화와 온화함을 느끼는 여유를 가질 수 있으니까요. 단색화 작업은 현재 한국뿐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많이 이뤄지고 있는데, 저는 비슷한 작업을 하는 작가들은 국가에 관계없이 다 연결돼 있다고 생각해요. 알게 모르게 관심을 갖고 지켜보고요. 언젠가는 저와 감성을 교류할 수 있는 세계 각국의 작가들과 함께 국제 무대에서 전시할 기회가 생기면 좋겠네요.

작가님처럼 서울 밖에서 열심히 작업하고 있는 신진 작가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세요.

아무래도 작업 환경이나 주어지는 기회의 양이 서울에 비해 열악하겠지만, 어디서든 기회는 스스로 만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 쉽게 얻어지는 건 없지만 열정과 의지를 갖고 끊임없이 모색하고 노력하면 또 안 되는 것도 없죠. 사람에 따라 기회가 일찍 올 수도, 늦게 올 수도 있어요. 쉽게 유명해지고 인기를 얻는 작가가 되려 하기보다 자신이 앞으로 걸어갈 길에서 마지막에 웃을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잘 견뎌내길 바라요. 노력은 절대 배신하지 않습니다.

그에 따르면 20대의 윤종주는 꿈이 많아서 힘들었다. ‘언제쯤엔 결혼해 아이를 낳고, 화가로서는 어떻게 성공하고, 더 나이 들면 이런 사람이 돼야지’ 하며 욕심을 많이 부렸다. 30~40대의 윤종주는 조급했다. 늦게 몸담은 미술계에서 빨리 동료들을 따라잡고 싶다는 생각, 잘하고 싶은 욕심 때문에 마음고생이 많았다. 가방에는 항상 포트폴리오를 넣고 다녔다. 새로 만난 작가나 화랑 관계자가 보여달라고 하면 언제든 꺼내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50대의 윤종주는 달라졌다. 지금은 주어진 하루하루를 열심히 사는 게 좋다고 한다. ‘인고의 세월을 보내야 작가가 된다’는 걸 깨달았다고. 이제 그는 시선을 외부에 두기보다 작업에 집중한다. 그러자 그림이 삶 가운데로 들어오고, 무르익으며 깊어졌다고 한다. 그제야 비로소 사람들이 윤종주의 작업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작가의 마지막 바람은 지방에서 작업에 몰두하는 화가들이 더 많이 세상에 알려졌으면 하는 것이다. 그는 오는 7월 9일까지 조은숙 갤러리에서 그룹전 ‘Off the Boundary’를 연다.

#윤종주 #단색화 #여성동아

영감 전시
Inspirations Of Nature

“일상의 모든 색으로부터 영감과 영향을 받는다. 일출과 일몰, 계절의 변화, 도시의 온도를 감싸는 공기, 촉촉함을 머금은 생명체로부터 말이다. 자연은 단 한순간도 게으른 적이 없다. 특히 하루를 열고 닫는 일출과 일몰은 세상을 뒤덮은 가장 큰 자연 색채 그러데이션이다. 그 안에서 자연의 웅장함과 거대한 에너지를 느끼곤 한다.” @sara-yoonjongju

2021년 3월, 부산 기장의 새벽과 사하라 핑크 cherish the time-voyage,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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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0월, 해뜨기 전 부산의 새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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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3월, 대구 달성습지의 해 질 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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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erish the time-flow(blue),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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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erish the time-flow,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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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1월, 안개 낀 경기도 양평의 오후 cherish the time-voyage,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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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5월, 부산 기장의 아침 cherish the time_voyage,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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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수 기자의 비하인드 아틀리에
美에 사는 기자. 예술 작품의 아름다움으로 가득 찬 공간이 좋아서 갤러리에 간다. 참을성이 없지만 근성은 있다. 데이비드 호크니 선생님을 만나는 그날까지 세계 곳곳 아틀리에 탐험을 계속할 참이다.

사진 김도균 
사진제공 윤종주 사진출처 인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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