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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리 할머니’ 윤여정의 새로운 도전

글 두경아 프리랜서 기자

2022. 03. 29

배우 윤여정이 전작 ‘미나리’에 이어 ‘파친코’로 또 한 번 이민자의 삶을 연기한다. 오스카상 수상 이후 세계인이 기억하는 배우가 된 윤여정이 1년 만에 선보이는 신작. 이번 작품은 파란만장한 한국 근현대사의 아픔을 짊어진 재일조선인의 삶을 그리는 내용이라 더욱 뜻깊다.

가식 없이 솔직하고 호쾌한 입담은 여전했다.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수상에 빛나는 배우 윤여정은 애플TV+ 시리즈 ‘파친코’ 공개를 앞두고 미국 로스앤젤레스(LA)에서 화상 기자간담회와 인터뷰를 통해 국내 취재진과 만났다.

‘파친코’는 7세에 한국을 떠난 재미동포 이민진 작가가 쓴 동명의 베스트셀러 도서를 원작으로 한 8부작 드라마다. 주인공 ‘선자’를 중심으로 191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4대에 걸친 재일조선인(자이니치·在日)의 일대기를 다룬다. 우리나라와 일본, 미국을 오가며 전쟁과 평화, 사랑과 이별, 승리와 심판에 대한 메시지를 담아냈다. 윤여정은 이 작품에서 남편과 함께 일본으로 이주한 지 50년이 지난 1989년을 살아가는 노인 선자를 연기했다.

“배우 가운데는 역할을 맡으면 사전 조사를 많이 하는 분도 있지만, 저는 그런 타입이 아니에요. 물론 원작 소설은 읽었죠. 작품을 할 때는 그 순간에 집중해요. 누구나 역경에 빠진 당시에는 그게 역경인지 모르고 헤쳐 나가는 데만 집중하게 되잖아요. 그 점을 표현하려고 노력했어요.”

공교롭게도 전작 ‘미나리’에 이어 또다시 이민자 역할, 이름도 ‘미나리’의 ‘순자’에 이어 ‘파친코’에서는 ‘선자’다. 이를 의식한 듯 윤여정은 “‘미나리’ 순자와 ‘파친코’ 선자는 이름이 비슷할 뿐 전혀 다른 눈으로 봐야 한다”고 했다. “두 배역이 같은 인물로 보인다면 배우 때려치워야지”라며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파친코’를 연출한 코고나다 감독은 한국계 미국인이다. 그는 “윤여정 배우의 얼굴은 한국 역사가 담긴 지도 같다”며 “그의 섬세한 표정과 연기에 매료됐다. 미스터리한 표정이 있어 더 많은 장면을 카메라에 담고 싶었다”고 감탄과 찬사를 보냈다. 이에 윤여정은 재치 있게 화답했다.



“제가 나이가 많아서 그래요. 오래 연기를 했잖아요. 저같이 늙은 사람은 경험이 몸속에 다 녹아 있지요. 자연스럽게 얼굴에 표현이 되는 거예요.”

드라마 통해 자이니치의 의미 알고 눈물 흘려

윤여정은 젊은 시절 미국 플로리다로 건너가 9년간 산 적이 있다. 이 작품의 배경과 시대 및 상황은 다르지만 그 또한 이민자로서의 경험이 있는 셈이다. 게다가 두 아들이 미국에 살고 있어 공감 가는 부분이 많았다고 한다.

“제가 플로리다에 살 때 친구들은 다 미국 사람이었어요. 그들이 저를 잘 도와줬고, 인종차별은 하나도 못 느꼈죠. 아마 직장에 다니지 않아서 그런 거 같아요. 우리 아들은 인종차별을 많이 느꼈다고 하더라고요. 한국계 미국인으로 자란 아들이나 진하(극 중 선자의 손자 역을 맡은 배우)를 보면 ‘국제 고아’ 같다는 느낌을 받곤 해요. 한국에서는 한국말을 못하니 미국 사람인 줄 알고, 미국에서는 또 외모가 다르다고 이방인으로 보니까요.”

일본 성인용 오락 게임을 뜻하는 ‘파친코’는 재일한국인들이 많이 종사하는 사업 분야다. 일본에서 일자리를 구하는 게 어렵다 보니 이쪽에 한국인이 몰린 것으로, 단어 자체에 자이니치에 대한 은유가 담겨 있다. 윤여정은 이 작품을 통해 자이니치의 아픈 역사를 알게 됐다고 했다.

“출연 전까지는 자이니치가 재일교포를 낮잡아 부르는 말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더라고요. 그 사람들이 살아온 세월을 듣는데 미안한 마음이 들었어요. 우리나라가 독립하자마자 바로 전쟁이 났잖아요. 그때 정부가 그 사람들을 돌보지 못했기 때문에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존재가 된 거죠. 그들이 산 세월에 대해 알게 된 후, 그걸 다 표현해야 한다는 부담감에 ‘큰일 났다’ 싶었습니다.”

윤여정은 극 중 자신의 아들로 출연한 재일동포 배우 아라이 소지에게 ‘자이니치’라는 단어에 대해 묻기도 했다고 한다. 소지는 “내가 바로 자이니치”라며 “우리에겐 언어와 성씨를 지키며 살아온 데 대한 자부심이 담긴 단어”라고 설명해줬다고 한다. 윤여정은 “자신이 한국인인 걸 자랑스러워하는 마음을 담아 ‘자이니치’라고 한다는 말을 듣고 정말 많이 울었다”며 “자식에게 한국말을 가르치려고 조총련 학교를 보냈는데 정작 한국은 이데올로기를 이유로 삼아 그들을 받아들여주지 않았다고 하지 않나. 정말 슬픈 이야기였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이 작품을 통해 역사에 대해 많이 배웠어요. 역사의 아픈 산물인 자이니치를 세계에 알릴 수 있는 작품에 출연하게 돼 감사합니다.”

오스카상 수상 이후 삶? 변한 건 없어

‘파친코’는 윤여정이 ‘미나리’로 지난해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받은 뒤 1년 만에 선보이는 신작이다. 수상 이후 그에게 어떤 변화가 있었을지 궁금했다.

“‘파친코’를 찍은 건 아카데미 시상식 전이었어요. 사람들이 제게 관심 없을 때죠. 이후 상을 받았지만 달라진 건 없어요. 같은 친구와 놀고, 같은 집에 살아요. 상을 받는 순간에는 기뻤어요. 하지만 그 상이 나를 변화시키진 않아요. 감사한 건 지금 나이에 상을 탔다는 거예요. 어린 나이에 받았으면 마음이 붕붕 떴겠죠.”

‘파친코’를 찍는 동안 있었던 에피소드도 공개했다. 그는 작품 출연 제안을 수락한 뒤 오디션을 보라는 요청을 거절했다고 한다.

“우연히 대본을 받게 됐는데 선자의 강인함과 생존 의지를 잘 표현할 수 있겠더라고요. 그런데 오디션을 보라네? 미국 시스템을 어느 정도 알지만 오디션을 봤다가 떨어지면 제 50년 연기 인생에 흠이 될 수 있으니 못 하겠다고 했어요. 그랬더니 감독님이 다시 불러주시더라고요(웃음).”

윤여정은 이후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태어나 일본으로 건너간 선자 역을 제대로 연기하고자 경상도 사투리는 물론 일본어 대사까지 수없이 연습해야 했다. 오래전 고향을 떠나온 인물인 만큼 사투리는 뉘앙스만 살리면 됐지만, 일본어는 현지인처럼 소화해야 했다.

“처음에는 제작진이 큐 카드를 만들어 한글로 쓴 일본어를 보여주곤 했어요. 그런데 제가 나이가 많아 못 읽겠더라고요(웃음). 아라이 소지 앞에서 대사를 연습하기도 하고, 혼자 베란다에 나가거나 술 마시면서 연습하기도 했어요. 별짓 다 했죠. 어느 날 좀 뭔가 된 것 같아서 다시 소지와 미나미 카호(일본인 배우)를 불러서 연기를 해봤어요. 그 자리에서 소지가 울더군요. 정확히 자기 할머니 억양이라면서요.”

윤여정은 오프닝 필름 제작 과정 뒷얘기도 들려줬다. 이 작품의 무거운 주제와 달리 오프닝 필름에서는 전 출연자가 흥겨운 춤을 추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총괄 프로듀서인 수 휴가 한국어를 못하거든요. 그 못하는 한국말로 ‘피곤해?’라고 물으며 춤을 추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나 진짜 너무너무 피곤해. 그리고 이 나이에 아무 자리에서나 춤을 추지는 않아’라고 하며 엄청나게 싸웠어요. 나중에 그 장면을 보니 정말 좋은 아이디어더라고요. 그래서 수 휴에게 잘못했다고 사과했어요. 나이 들면 편견이 많아지죠. 늘 젊은 사람 말을 잘 듣자고 맹세하지만 자꾸 잊어버려요.”

윤여정은 “‘파친코’는 시대적 배경이 자주 교차하는데 그 점만 잘 이해하면 더 흥미롭게 볼 수 있고 우리 역사에 대해 잘 알 수 있게 될 것”이라면서 봉준호 감독이 “1인칭 자막의 장벽만 넘으면 훨씬 더 많은 좋은 영화를 즐길 수 있다”고 한 말을 인용해 당부했다.

한편 ‘파친코’는 3월 25일 애플TV+를 통해 전 세계에 공개된다. 3개 에피소드를 시작으로, 매주 금요일마다 한 편씩 에피소드가 추가 방영될 예정이다.

#윤여정 #자이니치 #파친코 #여성동아

사진제공 애플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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