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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

heroine

파친코, 세 명의 ‘선자’에게 바치는 헌사

김윤정 프리랜서 기자

2022. 05. 16

애플TV+ 오리지널 ‘파친코’가 공개된 후 국내외 평단과 대중의 찬사가 이어지고 있다. ‘파친코’는 1900년대 격동의 한국사를 배경으로 재일 한국인 가족 4대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주인공은 시대와 사랑이 주는 시련 앞에 무너지지 않는 강인한 여성 ‘선자’. 그의 일생을 중심으로 과거와 현재, 한국과 일본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스케일의 서사가 돋보인다.

배우 전유나, 김민하, 윤여정은 ‘파친코’에서 각각 소녀, 청년, 노년 선자를 연기했다(왼쪽부터).

배우 전유나, 김민하, 윤여정은 ‘파친코’에서 각각 소녀, 청년, 노년 선자를 연기했다(왼쪽부터).

*이 기사에는 ‘파친코’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아버지의 지극한 사랑 속에 자라는 똑 부러진 소녀 선자(전유나), 금지된 사랑에 빠져 한국을 떠나게 되는 청년 선자(김민하), 그리고 역사의 소용돌이를 견뎌내며 낯선 땅에 뿌리내린 노년의 선자(윤여정)까지. 애플TV+ ‘파친코’ 이야기가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데는 세 명의 선자가 압도적인 열연으로 표현한 정(情)과 한(恨)이라는 정서가 큰 구실을 했다.

1915년 일제강점기 부산. 하숙집을 운영하는 부부는 어렵게 얻은 딸 선자를 애지중지 기른다. 선자는 총명하다. 하숙하는 아저씨의 흥정을 거들기도 하고, 홀로 바닷속에 들어가 제 얼굴만 한 전복을 캐오기도 한다. 어머니는 행여 어린 딸의 총명함이 아이 인생을 고달프게 만들지 않을까 걱정하지만, 아버지는 영특한 선자가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 살 수 있기를 기대하고 바란다.

딸이 훨훨 날아가길 바라는 아버지, 곁에서 뿌리내리고 살길 바라는 어머니. 방향은 다르지만 아이가 그저 행복하길 바라는 마음은 다르지 않다. 이렇게 지극한 부모의 사랑 속에 선자는 어디서든 당당하고 씩씩한 아이로 자란다.

선자의 어린 시절을 연기한 배우 전유나는 소녀다운 순수함과 총명함을 완벽하게 그려낸다. 깊은 바닷속을 유영하며 전복을 캐는 모습, 가정의 안위를 위협하는 하숙 아재에게 “떠나라”고 경고하는 모습, 아버지의 죽음에 허망함을 감추지 못하는 모습 등 장면 하나하나 눈에 띄지 않는 게 없다. 작품 전체로 보면 어린 선자가 등장하는 분량은 길지 않지만 전유나는 다양한 모습을 선보이며 시청자를 끌어당겼다.



전유나, 김민하, 윤여정이 그린 3색 선자

김민하가 연기한 청년 선자는 당돌하다. 일제강점기 조선 시장에 총칼로 무장한 일본 순사들이 나타나도 고개를 조아리지 않는다. 그저 가만히 서서 눈을 내리깔고, 그들에게 거슬리지 않을 정도의 태도만을 유지한다. 이런 선자의 당돌한 모습은 성공을 위해 일본인에게 부역해온 한수(이민호)의 눈길을 붙든다.

한수는 선자 주위를 맴돌며 더 넓은 세상이 있음을 알려주고,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사랑에 빠진다. 한수의 아이를 임신한 뒤에야 그가 유부남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선자. 그리고 목사가 되기 위해 일본 오사카로 가려는 이삭(노상현)의 등장. 선자의 금지된 사랑은 선자를 역사의 소용돌이 속으로 밀어 넣는다.

김민하는 선자의 순수하면서도 당찬 면모와 더불어 갑작스럽게 겪게 되는 변화 속 혼란스러운 감정을 섬세하게 그려내며 극의 몰입도를 끌어올린다. 선자는 말을 많이 하는 캐릭터가 아니다. 김민하는 절제된 표정과 목소리에 딱 필요한 만큼의 감정을 담아, 시대와 사랑이 선사한 시련 앞에 무너지지 않는 선자의 강인함을 표현한다.

김민하의 연기력에 대해 미국 ‘뉴욕 타임스’는 “오스카 수상자 윤여정과 견줘도 손색이 없다”고 평했다. 1995년생, 데뷔 6년 차 배우에게 더할 나위 없는 극찬이다. 오디션을 통해 김민하를 발탁한 코고나다 ‘파친코’ 감독도 “우리 모두 감탄했다. 오디션 영상을 보면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며 “김민하의 연기는 정말이지 진짜 같았다. 탄탄한 경력을 지닌 동료 배우들 마음을 움직이기에 충분했다”고 거듭 놀라움을 표시했다.

김민하는 ‘파친코’를 통해 신인답지 않은 연기력과 신선하고 매력적인 외모를 대중에게 알리며 엄청난 존재감을 갖게 됐다. 특히 말간 얼굴에 주근깨가 돋보이는 유니크한 외모, 몽환적이고 신비로운 분위기는 독보적이라 할 만하다. 또 하나 눈에 띄는 것은 뛰어난 영어 실력. 김민하는 ‘파친코’ 방영 후 각종 외신 인터뷰를 통역 없이 소화하며 유창한 영어 솜씨를 뽐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오징어 게임’의 글로벌 히트 이후 주인공 정호연이 할리우드 진출을 본격화한 사례를 볼 때 김민하 또한 머잖아 세계 무대에서 더 크게 활약할 전망이다.

시련에 좌절하지 않은 우리네 어머니, 할머니들

‘파친코’에서 전유나가 씨를 뿌리고, 김민하가 싹을 틔운 선자는 윤여정을 만나 비로소 만개한 꽃이 된다. 한국 배우 최초로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조연상을 받고, 대중문화예술인 최초로 금관문화훈장을 수훈한 윤여정의 연기력은 따로 설명하는 것이 무의미하다. 하지만, 윤여정이 아니었다면 낯선 땅에 단단하게 뿌리내린 선자의 회한을 그 누가 이토록 마음 울리게 표현할 수 있었을까 묻지 않을 수 없다. 특히 50년 만에 돌아온 고향에서 바닷물에 발을 담그고 헤아릴 수 없는 감정을 쏟아내는 4화 장면은 ‘파친코’ 최고의 명장면으로 꼽기에 손색이 없다.

윤여정은 “자이니치는 독립 이후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정부가 잘 돌보지 못했던,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사람들”이라면서 “이들의 세월을 잘 표현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역사에 대해 많이 공부했다”고 말했다. 윤여정은 실제 재일 교포 3세인 극 중 아들 모자수 역의 배우 박소희에게 수시로 발음을 배우고, 재일 교포의 삶에 대해 물었다고 한다. 박소희는 “윤여정 선생님의 대사를 들을 때마다 어린 시절 할머니가 어설프게 하던 일본어가 생각나 눈물이 날 것 같았다”고 말했다. 윤여정이 연기한 선자가 재일 교포들의 마음속에 있는 어머니, 할머니의 향수 그 자체였다는 뜻이다.

윤여정뿐 아니다. 어린 선자와 젊은 선자, 그리고 나이 든 선자는 각각 그 시대를 살아간 수많은 선자를 대표한다. 꼭 한국과 일본이 아니더라도, 고국을 떠나 새로운 나라에 뿌리를 내린 여러 이민자들의 초상이기도 하다.

8부작으로 제작된 ‘파친코’는 4월 중순 기준, 아직 시즌1도 다 공개되지 않았다. 제작사가 원작의 방대한 스토리를 4개 시즌으로 담아낸다고 하니, ‘파친코’의 진짜 이야기는 이제 시작인 셈이다.

도입부에 불과한 이야기에 이토록 많은 이가 열광하는 것은 각자의 마음속에 강인한 정신력과 생존력을 간직한 채 가족을 지키고자 헌신한 수많은 선자의 모습이 남아 있기 때문 아닐까. ‘파친코’ 속 선자의 일생을 통해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또 다른 선자의 삶을 기록하고 기억하는 것. ‘파친코’는 이 세상 모든 선자들에게 바치는 헌사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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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 애플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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