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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YLE

column

이니스프리의 미국 도전이 남긴 것

#K-beauty in New York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조엘 킴벡

2021. 02. 26

코로나19가 만연하기 전 뉴욕 맨해튼 첼시에 갈 때면 티제이맥스(TJ Maxx)라는 아웃렛 매장에 들르곤 했다. 티제이맥스는 시간을 잘 맞춰서 가면, 백화점에서 초고가로 판매되고 있는 상품도 상상 이상의 엄청난 할인율로 득템이 가능하기에, 뷰티 제품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숨은 보물 창고로 통하는 곳이다. 필자 역시 몇 차례 횡재를 경험한 적이 있기에 티제이맥스 근처를 지날 때는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한번은 티제이맥스에서 쇼핑을 하고 있는데 한 무리의 여성들이 뷰티 섹션으로 돌진해 왔다. 30대 후반~40대 초반으로 보이는 그녀들의 관심사는 한국산 마스크팩. 그녀들은 ABC 방송 ‘굿모닝 아메리카(Good Morning America)’라는 프로그램에서 한국산 마스크팩을 특집으로 다루었다는 이야기부터 한국산 시트 마스크 경험담, 골든글로브 시상식 전날 내로라하는 여배우들이 SNS에 한국산 마스크를 한 사진을 올렸더란 얘기까지, 한국산 마스크팩을 소재로 다양한 소식들을 쏟아냈다. 하지만 정작 어떤 브랜드가 좋은지에 대해선 아무도 답을 내놓지 못했다. 

“K뷰티는 유명하지만, 그중 무슨 브랜드가 좋은지는 잘 모르겠어.” 

그녀들은 결국 브랜드 선택을 포기하고 할인율이 높은 제품을 골라 계산대로 향했다. K뷰티가 미국에서 유명해졌다고는 하지만, 아직 일반 소비자들이 확실하게 인지하는 브랜드가 없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물론 몇 명의 뉴요커들로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주변 사람들만 봐도 한국 화장품 브랜드명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미국 시장에는 분명 K뷰티의 존재감이 확실하게 있다. 한국에도 진출한 LVMH 그룹 계열의 세계 1위 뷰티 편집숍인 세포라(Sephora)나 미국 최대 뷰티 유통업체인 얼타(Ulta) 매장만 둘러봐도 K뷰티 섹션이 따로 있을 정도이다. BB크림부터 쿠션 파운데이션, 붙이는 마스크팩, 바르는 슬리핑 팩까지 단순했던 스킨케어 단계를 좀 더 세분화시키고 전문적으로 구성해 뷰티 제품의 카테고리를 확장시키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것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이러한 공헌에도 불구하고, 아직 대표적인 K뷰티 브랜드는 ‘이것’이라고 할 정도로 두각을 드러내는 브랜드는 없다. K뷰티의 코어 소비자층을 제외한 일반 소비자들에게 아직 각각의 브랜드에 대한 인지도가 아주 낮은 수준인 것이다. 여기에 온라인 숍들이 K뷰티를 하나의 카테고리로 만들어 여러 브랜드의 제품을 함께 판매하는 경우가 많다 보니, 아예 K뷰티를 하나의 브랜드로 인식하는 이들도 많다. 

백화점이 브랜드의 세계관을 보여주는 모델하우스 같은 역할을 하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세계 유수의 백화점에 K뷰티 제품들이 입점하지 않은 점 또한 인지도가 낮은 이유 중의 하나다. 몇몇 브랜드가 뉴욕, 파리, 런던, 밀라노 등 해외 유명 백화점 진출 소식을 전할 때가 있어 그 백화점에 방문해보면, 브랜드의 세계관을 표현할 수 있을 정도의 공간이 확보된 경우는 드물고, 여러 회사 제품이 혼재돼 있는 매대나 부스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니스프리는 2017년 7월 
뉴욕 플래그십 스토어를 열고 미국 시장에 첫발을 내디뎠다.
오른쪽은 뉴욕 유니언스퀘어 매장 내부.

이니스프리는 2017년 7월 뉴욕 플래그십 스토어를 열고 미국 시장에 첫발을 내디뎠다. 오른쪽은 뉴욕 유니언스퀘어 매장 내부.

그렇다고, K뷰티 브랜드가 세계 유수의 백화점 진출 실적이 전무한 것은 아니다. 아모레퍼시픽의 최상위 브랜드인 ‘아모레퍼시픽(AmorePacific)’은 뉴욕의 고급 백화점 ‘버그도프 굿맨’ 매장을 필두로 ‘블루밍데일즈’ 단독 매장을 비롯해 미국 전역의 40개 넘는 백화점에 입점해 있고, ‘설화수’ 또한 매장 면적이 작아서 단독 구성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오랜 시간 럭셔리 화장품의 대격전지인 버그도프 굿맨에 자리하고 있다. 

이커머스도 아니고 백화점도 아닌, 어쩌면 가장 강력하게 브랜드의 콘셉트와 세계관을 표현할 수 있는 곳이 있다면 바로 단독 매장일 것이다. K뷰티 브랜드 중에서 백화점 입점이 아닌, 유명 인터넷 뷰티 웹 스토어 독점 판매가 아닌, 대리점주에게 맡겨 매장을 열게 한 것이 아닌, 본사가 직접 매장을 오픈하고 운영하는 단독 매장으로 미국 시장 진출을 시도한 브랜드가 있다. 바로 ‘이니스프리’다. 이니스프리의 경우는 미국 진출 전략을 한국에서와 동일하게 백화점이 아닌 단독 매장을 내는 것으로 잡았다. 2017년 뉴욕의 유니언 스퀘어(Union Square)에 대망의 미국 1호점을 오픈했다. 14번가의 유니언 스퀘어는 주말마다 파머스 마켓이 열리고, 브로드웨이 주변에는 프레쉬(Fresh)를 비롯한 자연주의 화장품 브랜드들의 매장과 ABC 카펫 앤드 홈스(ABC Carpet & Homes) 같은 인테리어 매장이 이어지는 곳이라, 라이프스타일에 기반을 둔 이니스프리가 첫 매장을 열기에 적합한 자리로 보였다. 유니언 스퀘어 매장과는 달리, 렉싱턴 애비뉴의 블루밍데일즈 백화점 건너편에 오픈한 매장은 제주도의 자연에서 얻은 영감을 표현하며 실내를 식물들로 가득 채운 초대형 공간이었다. 이니스프리는 대리점이 아닌 직영 매장으로 미국 진출에 박차를 가했고, 2020년까지 미국 내 6개의 매장을 포함해 북미 전역에 10개의 매장을 여는 과감한 전략을 펼쳤다. 이때는 자연과 과학이 적절히 혼합된, 이른바 착한 화학물질이라 불리는 성분들만 사용하는 자연주의 화장품들이 인기의 영역을 넓혀가고 있는 추세였다. 고가의 백화점 화장품보다 사용자들을 통해 효과가 검증된 합리적인 가격대의 화장품들이 대세가 되고 있는 시점이었기에, 이니스프리의 미국 시장 진출은 적절한 타이밍이었음이 분명했다. 여기에 미국 내 K뷰티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는 분위기까지 더해져, 미래가 밝아 보이기도 했다. 실제로 이니스프리의 자연주의 전략은 뉴욕의 트렌드에 맞아떨어져 K뷰티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던 사람들도 매장을 방문해서 체험해보고 싶어 하는 경우가 있었다. 

하지만 누구도 예상치 못한 코로나19라는 악재 탓에 이니스프리 단독 매장은 개점휴업 상태를 맞이하게 되었고, 큰 아쉬움을 남긴 채 미국 시장 철수를 결정했다. 코로나19만 아니었더라면 미국 내 스트리트 뷰티 브랜드의 판도를 바꿀 만한 큰 활약은 물론, K뷰티의 대표 브랜드로 자리매김할 가능성이 충분했기에 철수가 더욱 뼈아픈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아모레퍼시픽의 미국 시장 도전은 박수를 받아 마땅하다. 많은 한국 기업들이, 특히 그동안 미국 시장에 야심 차게 출사표를 던졌던 패션과 뷰티 브랜드 모두가 언제 진출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로 조용히 자취를 감춘 이유 중의 하나가 끈기 부족이었기에, 이렇게 지속적으로 투자를 아끼지 않으며 판로를 개척해나가는 기업을 보는 것만으로도 뿌듯했다. 지금은 상황상 물러설지 모르지만, 분명 기회는 다시 올 것이니까. 

아직은 아모레퍼시픽의 어떤 브랜드보다 K뷰티라는 명칭이 더 유명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끊임없는 노력들이 1년, 2년 계속 쌓여가다 보면 어느 순간 K뷰티라는 카테고리는 희미해지고, 그때까지 살아남은 브랜드의 이름으로 불리게 되는 날이 올 것이다. 지금 아무도 ‘랑콤’이나 ‘디올’ 혹은 ‘겔랑’ 같은 프랑스 화장품을 두고 ‘F뷰티’라고 부르지 않는 것처럼.


뉴욕에서 활동하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기네스 팰트로, 미란다 커 등 세기의 뮤즈들과 작업해왔다. 현재 브랜드 컨설팅 및 광고 에이전시 ‘STUDIO HANDSOME’을 이끌고 있다.


사진 동아DB 게티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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