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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STYLE

coaching

언어학자 신지영 교수, 프로 불편러의 행복한 말하기 연습

글 김지은

2021. 11. 12

말을 잘하는 것만으로도 행복 지수를 높일 수 있을까. 화려한 언변 없이도 좋은 관계 맺기가 가능할까. 신지영 교수의 대답은 ‘그렇다’였다. 너무나도 익숙한, 하지만 여전히 두렵고 미숙한 어른들의 말하기. 2% 부족한 언어의 감수성을 채우기 위해 그의 연구실을 찾았다. 

대화를 하다 보면 같은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는데도 ‘어쩜 이리 말이 통하지 않을까’ 싶거나, 내 말의 의도를 전혀 다른 의미로 받아들이는 상대로 인해 울화통이 터질 때가 있다. 태어나서 자연스레 배워 평생을 써온 우리말인데 어째서 이렇게 서로 다른 세상에 살고 있는 듯 온도차가 크게 느껴지는 것일까. 고려대학교 국문과 신지영 교수는 이를 ‘언어 감수성’의 차이로 설명했다.

“언어 감수성의 핵심은 내 말이 상대에게 어떻게 들릴까 고민해보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말을 잘하고 싶어하죠. 말은 관계 맺기의 시작이고, 사람들은 그 관계 안에서 행복해지기를 원하니까요. 그런데 말이란 건 상대를 끌어들이는 자석이 되기도 하지만 튕겨내는 용수철이 되어버리기도 합니다. 그럴 때 ‘나는 그런 의도로 한 말이 아닌데 왜 사람들은 자꾸만 내 말을 오해할까’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듣는 사람이 불편해한다면 내 말이 상대에게 어떻게 들릴까부터 고민해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당신은 선량한 연령차별주의자

그는 ‘며느리 삼았으면 좋겠다’는 말을 예로 들었다. 나이가 지긋한 쪽에서 젊은 여성에게 호의를 전할 때 쓰는 이 말은,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굉장한 칭찬이지만 듣는 사람은 부담스럽기 짝이 없는 표현이다.

“물론 그런 말이 칭찬으로 들리던 시대도 있었죠. 하지만 지금은 아니라는 데서 간극이 벌어집니다. 50대 이상의 세대가 2030세대와 소통이 잘 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죠. 나는 호의에서 한 말일지라도 상대가 ‘저 사람은 꼰대 같은 말만 해’라고 생각한다면 내 말하기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지 점검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50대 이상의 사람들이야말로 ‘말하기’에 대해 제대로 배워본 적이 없는 세대니까요. 하지만 그런 상황을 그저 ‘요즘 젊은 사람들은 싸가지가 없어서’라고 치부해버린다면 내내 평행선을 달릴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나라 정서상 어른 앞에서 ‘당신 왜 그런 말을 하세요’라고 되묻지는 못하니까요.”

한국에서 ‘나이’는 말하는 방식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다. 우리는 당연하게 자신보다 나이가 어린 사람에게는 반말을 건네고, 존댓말을 들을 것이라 기대한다. 또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상대에게는 존댓말을 하고, 반말을 들어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높임법’이 발달되어 있는 것이 한국어의 특징이고, 그 순기능으로 상대를 존중하는 태도가 드러난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는 ‘높임’에만 방점을 찍은 해석이다. 우리말의 높임법은 ‘낮춤’을 표현하는 기능도 갖고 있다. 말의 위계는 권력의 위계로 이어지고, 결국 이로 인해 관계의 위계가 확고해진다는 사실을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언어의 높이뛰기(신지영 저, 인플루엔셜) 중

그는 우리 스스로 언어의 프레임에 갇혀 ‘선량한 차별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신분제가 지배하던 1백여 년 전의 가치관에서 찾았다. 어딜 가나 처음 보는 상대에게 으레 나이를 묻고, 그 나이를 기준으로 말을 높일지 낮출지 결정하며 서열과 사람의 우위를 판단하는 습관 역시 오랜 역사를 통해 굳어져온 불평등의 관계를 자연스레 인정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런 사례가 우리말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회장, 의장을 의미하는 ‘Chairman’이나 남자와 여자를 특정하는 ‘He’와 ‘She’가 차별적 단어라는 인식은 이미 서구 사회에 널리 퍼져 있다. 사회를 보는 사람이 남성이 아닐 수도 있으니 ‘Man’이 아닌 ‘Person’이 되어야 한다는 지적이나 3인칭 대명사를 ‘Ze’로 받아야 한다는 주장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상황이다.

우리 역시 법률용어나 의학용어처럼 일반인들의 접근이 어려운 말을 집단적으로 사용하는 것으로 권력을 과시하던 시대가 있었다. 일제강점기를 거쳐 급격한 사회 변화가 이뤄지면서 전에 없던 언어를 사용해야 할 일이 한꺼번에 쏟아진 탓에 불가피한 선택이었던 것이 사실이나, 이제는 그러한 것들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가 우리 사회를 변화시키고 있다. 어려운 법률용어가 쉬워지고, 신조어에도 유연해지는 사회 분위기가 그렇다.

“언어는 문화와 함께 옵니다. 올해 한국어 기원 단어 26개가 옥스퍼드 영어사전에 새로 등재되었죠. 치맥, 피시방, 언니, 오빠, 삼겹살, 잡채 등등 그 전에 등재된 것보다 훨씬 많은 숫자의 단어가 올해 채택되었는데요. 이는 그만큼 한국 문화의 영향력이 커졌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도 언어에 대한 생각을 입체적으로 바꿔볼 필요가 있습니다. 일제강점기를 거쳤으니 일본어는 절대 사용하면 안 된다? 이제 그런 단계는 지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어른이 어른스러워져야 사회가 바뀐다

그는 결혼한 여성이 겪게 되는 전통적인 호칭 문제에 대해서도 날카로운 비판의 칼날을 들이댔다. 결혼한 여자가 남편의 동생들을 ‘아가씨’와 ‘도련님’으로 높여 부르는 구조는 옛날 신분제가 존재하던 시절 신분이 낮은 사람들이 나이 어린 양반을 높여 부르던 풍습이 굳어진 것에 다름아니며, 그런 구조는 자연스레 높임말을 쓰는 위계를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남편이 아내의 동생을 ‘처제’와 ‘처남’으로 부르며 자연스레 말을 낮출 수 있는 것과는 사뭇 대조적이다. 남성이 아내의 부모를 남자 어른과 여자 어른을 의미하는 ‘장인어른’과 ‘장모님’으로 부르는 것도 여성이 남편의 부모를 ‘아버님’과 ‘어머님’으로 호칭하는 것과 대조된다. 며느리는 시부모가 ‘새아가’라 불러 시댁에서 새로 태어난 듯 그 문화를 배우는 것이 자연스럽고 당연하지만 사위는 ‘O서방’이라 불리며 손님 대접을 받기 때문이다.

언어는 가변적이라는 그의 설명에 한편으로 고개가 끄덕여지면서도 나이가 많은 사람은 어린 사람에게 반말을, 나이가 어린 사람은 많은 사람에게 존대하는 것이 지극히 도덕적인 예의라 교육받아온 우리에게 신 교수의 주장은 애써 지켜온 동방예의지국의 문화유산마저 앗아갈 듯 낯설고 충격적인 것이 사실이다. 문득 현실에서 그의 가족 호칭 정리가 궁금해졌다.

“호칭이란 게 처음의 관계가 중요한 거더라고요. 저는 벌써 결혼한 지 30년이 지나서, 그 당시에 부르던 호칭을 지금까지 그냥 쭉 쓰고 있어요. 하지만 제 동생들의 아내를 올케라 부르는 건 바꿔보려 합니다. 갑자기 이름을 부르면 불편해할 수도 있겠지만 동생들이라 생각하고 시도해보려고요. 저희 대에는 이런 노력이 많이 필요하겠지만 조카들에게는 분명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겠죠?”

오히려 변화가 먼저 시작된 건 신 교수의 부모님 쪽이다. 그가 불평등한 호칭의 비대칭성에 대해 설명드리자 “여태껏 몰랐다”며 바로 올케들의 호칭을 이름으로 바꿔 부르기로 결정하셨단다. 부모님의 그런 수용적 태도는 ‘어른이 더 어른다워야 사회가 바뀐다’는 그의 생각에 더욱 힘을 실어주었다.


실수를 인정하면 말하기의 ‘달인’이 된다

사실 그는 대학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는 일 외에도 학내 비교과 프로그램인 ‘고다운 스피치 아카데미’를 비롯해 문화체육관광부의 ‘중학생 꿈나무 말하기 축제’, 서울시의 ‘다다다 발표대회’ 등 크고 작은 언어 감수성 향상 프로젝트를 기획·진행해왔다. 안타까운 것은 정작 언어 감수성에 대해 더 깊이 고민하고 공부해야 할 어른들이 이런 프로젝트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다는 점이다. ‘언어의 높이뛰기’를 출간하며 정작 책을 읽고 고민해주었으면 했던 중장년층보다 젊은 세대들의 반응이 더 뜨거웠던 것을 보면 그가 가야 할 길은 여전히 멀다.

그의 저서 첫장에 사인을 부탁하며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독자나 지인 중에 교수님 앞에서는 말하기가 어렵다는 분이 있지 않던가요?”

사실 그의 책에는 나이나 높임말이 규정하는 권력구조나 가족 간의 불편한 호칭 문제뿐 아니라 ‘민낯’이라는 단어에 숨겨진 여성의 화장에 대한 사회적 시선, ‘여사’라는 호칭에 담긴 불편한 권위주의, ‘외국인’이라는 단어에 내재된 편견, 저속한 신조어의 등장에 따른 우려 등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쓰는 단어에 감춰진 불평등 구조나 비뚤어진 관점에 대해 신랄하게 꼬집는 내용이 가득하다. 평생을 언어 연구에 몰두해왔으니, 책에 담아내지 못한 내용은 또 얼마나 많을까 생각하면 그의 주변인들에게는 말 못 할 고충이 있을 법도 했다.

“어휴, 그러니 저는 어떻겠어요?”

동그란 눈이 더 동그래지는가 싶더니 목소리에 금세 장난기가 어렸다. 대한민국의 내로라하는 언어학자라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의 언어 습관에 미주알고주알 훈수를 두는 책까지 펴냈으니 행여나 말 실수, 글 실수라도 하게 될까 더 조바심 내게 된 것은 당연했다.

“어릴 때부터 남 눈치를 잘 보지 않는 편이어서인지 내가 옳다고 생각하면 그냥 하고, 하고 싶은 이야기도 곧잘 하는 편이었어요. 그런 것들로 인해 누가 나를 소위 ‘찍었다’ 해도 그다지 찍혔다고 생각하지 않으니 마음이 편했죠. 그런데 돌이켜보니 그런 것도 나의 미성숙한 모습이었더라고요.”

신 교수 또한 상대에게 화를 냄으로써 불편한 상황을 만들었으니 성숙한 말하기를 한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내가 상대에게 불편한 기색을 화가 들어간 말로 표현했다면, 상대는 자신이 한 말이 어째서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하는지 배울 기회를 잃어버린 셈이기도 하다. 관계가 불편해진 상황이라면, 내가 상대를 불편하게 했음을 먼저 인정해보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그는 ‘내가 찍힐 만한 행동을 했구나’를 인정하고, ‘어떤 점이 그 사람을 불편하게 했을까?’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보곤 한다.

그는 ‘달인’이란 말을 참 좋아한다 했다. 달인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경험을 통해 만들어가는 거다. ‘생활의 달인’이라는 TV 프로그램에 출연한 달인들도 아마 지금의 경지에 오르기까지 수많은 실수를 반복하고 그 실수를 복기하면서 어떤 문제점이 있었는지, 개선점은 없는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을 것이다.

“말하기를 잘하는 데도 용기가 필요해요. 내 자신의 실수를 인정할 성숙한 용기요. 강의를 듣거나 책을 읽는다고 좋은 말하기를 할 수 있게 되는 건 아니거든요. 저도 아마 오늘 인터뷰가 끝나고 나면 인터뷰하는 동안 상대를 불편하게 한 점은 없었을까, 무엇은 잘하고 무엇은 부족했을까 스스로 성찰하고 보완하려 할 거예요. 이런 과정이 습관이 되면 지금보다 좀 더 좋은 어른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해봅니다.”

상대가 나를 존대한다고 ‘내가 어른이구나’ 생각해버리고 상대를 아랫사람 취급한다면 소위 그가 말하는 ‘좋은 어른’의 축에 끼지 못한다. ‘아, 상대가 나를 존중해주고 있는데 나는 지금 그런 대접을 받을 만큼 어른스럽게 행동하고 있나?’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 성찰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요즘 젊은 사람들’을 이야기하기보다 ‘요즘 기성세대’가 젊은 세대의 그 감수성을 따라가고 있는지 질문을 던져볼 것, 그가 기성세대에게 권하는 성숙한 어른의 모습이다.

스스로를 프로 불편러라 쿨하게 인정해버린 그 역시 나이가 들고 지위가 높아질수록 사람들이 자신을 어렵고 불편해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고 고백했다. 가령 책을 펴낸 후 무언가 신랄한 비판을 기대했던 그에게 사람들은 “책을 잘 보았다”거나 “너무 재미있고 좋았다”는 등 칭찬 일색의 피드백을 전할 뿐 감히 부족한 점이나 잘못된 부분을 지적하지는 못했다. 교수가 되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어릴 적 보았던 TV 드라마 ‘하버드 대학의 공부벌레들’처럼 교수와 학생이 열띤 토론과 질문을 이어가는 강의실 모습을 상상하며 강단에 선 그는 열린 마음으로 학생들을 대했지만, 질문이나 토론에 참여하는 분위기를 조성하기 어려운 현실과 마주해야 했다.

“우리나라 학생들이 유독 수업 시간에 위축되고 질문이나 토론을 꺼려 하는 건 어릴 때부터 평가받기에 급급한 생활을 해왔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자신을 평가하는 사람을 앞에 두고 문제 제기나 비판을 하기는 쉽지 않거든요. 평가하는 사람이 정말로 어른스럽고 공정하다면 용기를 낼 수 있겠지만요. 발언이 안전한 사회면 좋겠어요.”


발언이 안전한 사회를 꿈꾸며

2015~2019년 문체부의 ‘중학생 꿈나무 말하기 축제’나 2019년과 2020년에 진행한 서울시 ‘다다다 발표대회’ 역시 그가 말한 ‘발언이 안전한 사회’를 위한 준비 과정이다.

‘중학생 꿈나무 말하기 축제’를 진행하면서 가장 좋았던 건 사람들이 중학생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게 되었다는 거예요. 아이들은 우리가 짐작하는 것보다 훨씬 어른스러운 생각을 하고 있더라고요. 정말 다양한 주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고, 그 과정에 보호자들이 참여해 아이들의 생각을 듣기도 했는데, 심사위원들을 비롯한 대회 관계자들은 물론 아이들을 지켜본 보호자들도 ‘중학생들에게 배울 점이 정말 많구나’ 느꼈다고 하시더군요. 아이들에게 자기표현의 기회를 더 많이 주어야겠다는 깨달음도 얻게 되었죠. 대회의 참가 주체는 아이들이었지만 결국 더 많이 배운 건 어른들이었어요.”

누가 1등 하느냐를 겨루는 장이 아닌, 상대의 이야기를 듣고 자신의 생각을 잘 정리해서 말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는 교육의 기회가 된 것은 ‘다다다 발표대회’도 마찬가지였다. ‘중학생 꿈나무 말하기 축제’와 달리 초등학생부터 60대 이상 노년까지 폭넓은 연령층이 참가했던 ‘다다다 발표대회’는 서로 대화를 나눌 일조차 없던 다양한 세대가 한자리에서 소통할 수 있는 멋진 토론의 장이 되었다.

“70대 이상 분들에게도 이런 교육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봅니다. 가령 중학생들이 멘토가 되고, 어르신들이 멘티가 되어 말하기를 배워보는 건 어떨까요. 그분들이야말로 ‘내 말이 상대에게 어떻게 들릴 것’이라는 걸 전혀 생각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거든요. 그러다 보니 방어적인 태도로 용수철처럼 상대를 밀어내는 화법을 많이 쓰시게 되죠. 그렇다고 그분들에게 자녀나 주변 사람들이 말하기를 가르치는 건 어려우니 새로운 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접근해본다면 또 다르게 받아들여지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사람들은 행복해지기 위해 말을 한다. 그러나 원하는 행복을 얻기 위해서는 말을 잘해야 한다는 점을 간과하는 경우가 많다. 말을 잘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잘 경청해야 한다는 사실은 더더욱 잊어버리기 쉽다. 말을 잘 듣는다는 건 스스로 다른 사람의 말을 존중할 줄 아는 자세를 가지는 것이다.

“흔히 부모들은 내 아이가 말을 잘 듣기를 기대하죠. 그런데 내 말만 잘 듣는 아이는 나같은 사람밖에 될 수 없을지도 몰라요. 아이를 나보다 훌륭한 사람으로 키우고 싶다면 부모의 말을 잘 듣기보다 아이 스스로 다른 사람의 의견을 존중하고, 자기 생각을 잘 표현할 수 있도록 가르치는 것이 중요합니다. 상호작용을 통해 자신이 생각지 못한 것을 다른 사람을 통해 배우고, 또 내 생각을 다른 사람이 배울 수 있다면 행복한 아이로 자랄 수 있지 않을까요.”

사진 지호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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