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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조흥은행 창업주 증손녀 뉴욕퀸이 말하는 故 진도희

글 · 김유림 기자 | 사진 제공 · 뉴욕퀸 | 디자인 · 최진이 기자

2015. 12. 21

6개월 전 원로 배우 진도희가 은퇴 후 40여 년 만에 화제의 인물로 떠올랐다. 췌장암으로 타계했다는 소식이 보도되면서다. 이 일로 ‘젖소부인’ 진도희가 아닌 또 다른 배우 진도희가 있었다는 사실이 새삼 알려졌다. 1970년대 초 인기 영화배우로 활동하다 재벌가 자제와의 열애로 홀연히 연예계를 떠난 진도희. 지금부터의 이야기는 그의 딸에게 들은 ‘오리지널’ 진도희에 관한 것이다.

조흥은행 창업주 증손녀 뉴욕퀸이 말하는 故 진도희
1970년대 초, 서구적인 외모와 글래머러스한 몸매로 ‘스크린의 요정’으로 군림한 배우 진도희. 오랜 세월 대중의 기억에서 잊혔던 그는 지난 6월 27일 66세를 일기로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다시금 화제의 인물로 떠올랐다. 진도희란 이름은 그가 영화배우로 활동할 당시 작명소에서 지은 것으로, 1990년대 ‘젖소부인’ 진도희가 등장하면서 두 사람의 존재를 헷갈려하는 이들이 많다.
1971년 MBC 공채 탤런트로 데뷔한 진도희는 1972년 배우 박노식의 연출 데뷔작인 ‘쟉크를 채워라’에 주연으로 캐스팅돼 영화계에 입문했고 이후 ‘체포령’(1972), ‘대추격’(1973), ‘늑대들’(1973), ‘일요일의 손님들’(1973), ‘원녀’(1973), ‘서울의 연인’(1973), ‘죽어서 말하는 여인’(1974)에서 잇따라 주연을 맡으며 배우로서의 입지를 굳혔다. 1973년 남궁원과 함께 테헤란 국제영화제에 한국 여배우 대표로 참석하기도 했고, 1974년 제10회 백상예술대상 신인여배우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얼마 안 가 재벌가 자제와의 열애로 온갖 무성한 소문을 남긴 채 홀연히 은막을 떠났다.
지난 10월 마주한, 진도희의 생전 육성 인터뷰가 담긴 녹음기를 들고 나타난 진도희의 딸은 음식 연구가이자 파워 블로거 ‘뉴욕퀸’이다. 그는 중학교 때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미 대통령 가문들이 나온 명문 콩코드아카데미를 졸업한 후 컬럼비아대에서 정치학을 전공하고 뉴욕 FCI에서 프랑스 음식을 공부했다고 한다. 뉴욕과 서울에서 다수의 기업을 거쳐 현재는 글로벌 언어와 인문 교양을 공부하는 주부들의 모임 대표로 활동 중이며, 7년째 백화점 문화센터에서 정통 뉴욕 브런치와 서양 음식을 가르치고 있다.

금융 대부 재벌가 아들과의 잘못된 만남

영화배우로 활동하던 진도희는 잡지 화보에도 자주 등장했다. 이것은 훗날 그가 영화계를 떠나게 한 재벌가 자제와의 만남의 계기가 됐다. 상대남은 우리나라 초창기 금융 재벌로 불린 조흥은행가 3세 정운익 씨로 진도희의 딸, 뉴욕퀸의 아버지다. 국내 상장 기업 1호인 조흥은행은 구한말 대구은행과 경상합동은행을 개척한 금융 대부 정재학이 말년에 구축한 은행으로 한반도의 경제를 대표하는 가문 중 하나였다. 정운익의 형 정운철씨는 국내 최연소 총영사 출신으로 박용성 전 두산그룹 회장과는 동서관계다. 경기고 아이스하키 선수 출신에 MBA 유학파였던 정운익 씨는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이력과 매너 덕분에 매력남으로 보였다고 한다. 정씨는 잡지 화보에 등장한 진도희를 보고 한눈에 반했고 열렬한 구애 끝에 그의 마음을 얻었다고. 하지만 정씨와의 만남은 이후 진도희에게 큰 고통을 가져다줬다.
“아버지는 어머니와 사귀는 단계에서 노골적으로 임신을 강요했대요. 영화 활동을 못하게 한 건 당연했죠. 막무가내로 어머니를 집 안에 숨겨두고 꼼짝 못하게 한 적도 있대요. 결국 어머니는 아버지 때문에 잠적설, 와병설, 결혼설 등 숱한 추측성 기사들을 남긴 채 은퇴를 하게 됐어요. 물론 그 과정에서 제가 생긴 게 결정적인 이유였죠.”  
조흥은행 창업주 증손녀 뉴욕퀸이 말하는 故 진도희

1 뉴욕퀸은 어린 시절 장충동에서 친조부모의 손에서 자랐다. 2 장충동 조흥은행 본가에서 갓 태어난 뉴욕퀸을 안고 있는 진도희. 3 딸 뉴욕퀸의 대학 졸업식에서 다 같이 모인 정운익 씨와 진도희. 4 음식연구가이자 글로벌 여성 교육 업체 대표인 뉴욕퀸. 5 뉴욕 MOMA 영화제에서 진도희와 뉴욕퀸.


스물여섯 살에 아이를 낳은 진도희는 이내 극복하기 힘든 현실에 부딪혔다고 한다. 총각인 줄 알았던 정씨는 이미 미국에 아이가 둘이나 있었고 풍운아적 폭군 기질까지 다분했다는 것. 진도희는 핏덩이 딸을 포함해 모든 것을 버리고 새 인생을 살기로 결심했고, 이는 딸에게는 평생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진도희의 딸은 어린 시절 어머니의 부재로 서울 중구 장충동 친가에서 조부모인 정종원 조흥은행 총재와 신양정 법시사(1957년 창립된 불교 단체) 이사장 부부의 손에 자랐다. 조부모는 손녀 교육에 있어 매우 엄격했다고 한다.
반면 그 시기 진도희는 보통 여자들과는 다른 삶을 살았다. 1970년대 말 서울 소공동에서 대규모 일식당을 운영했는데 평소 친분이 있던 정 · 재계 인사들을 비롯해 동시대에 활동했던 연예인, 문화계 인사들이 자주 식당에 들르면서 사업은 크게 번창했다고 한다. 자신이 투자한 금속 액세서리 수출입 무역회사 전무로도 일하며 미국과 일본을 오가던 진도희는 1987년부터는 한국 생활을 정리하고 미국 뉴욕 맨하튼의 부촌인 어퍼 이스트 사이드에 자리를 잡았다. 그 시절 그는 뉴욕에서 파리를 갈 때 초고속 비행기인 ‘콩코드’를 이용했고, 할리우드 베벌리힐스에 머무는 등 화려한 인생을 살았다고 한다. 미주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돼 오랜 기간 문인협회 회원으로도 활동했다고. 진도희의 딸은 “어머니는 부산에서 보낸 여고 시절부터 이화여대 백일장에 나가 당선하는 등 문학도였다”고 설명했다.
“어머니는 누구보다 화려하고 자기중심적인 삶을 사셨어요. 반면 엄마로서의 역할은 기대하기 힘들었어요. 그게 평생 저와 어머니가 앙숙처럼 지낸 이유이기도 해요. 제가 중학생 때부터 미국에서 어머니와 함께하는 시간이 많았는데, 대화가 5분 이상 넘어가면 늘 언성이 높아졌어요. 사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도 병원에서 몇 번 싸웠어요. 돌이켜보면 어머니는 저와 싸우면서 당신의 존재감을 확인하셨던 것 같아요. 저는 그게 굉장한 스트레스였어요.”
진도희 인생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예명 도용’이다. MBC 공채 탤런트로 활동할 때만 해도 김경아라는 예명을 사용했던 그는 영화배우로 전향하면서 진도희로 바꿨다. 그로부터 20여 년이 지난 1995년, 뉴욕에서 생활하던 진도희는 갑자기 한국 지인들로부터 수십 통의 전화를 받았다고 한다. 성인 영화 ‘젖소부인’이 히트하자 주인공을 그로 착각하고 연락한 것. 이 일과 관련해 진도희의 딸은 “어머니는 평생 퍼블리시티권을 침해당했고 그로 인해 큰 스트레스를 안고 사셨다”고 주장했다.
고인이 췌장암에 결렸다는 사실은 지난해 처음 알려졌다. 당초 진도희는 가족에게 췌장암 초기라고 말했지만 실제로 그가 병원에서 받은 판정은 췌장암 3기였다고 한다. 결국 그는 18개월간의 투병 끝에 지난 6월 사망했다. 진도희의 딸은 “천사가 출동하려는 꿈을 꾼 뒤 혼수상태의 어머니에게 그동안 고마웠다고, 제 걱정은 말고 편하게 가시라고 귓속말을 했는데 제 말을 다 알아들으셨는지 다음 날 모두가 모인 시간에 편안하게 돌아가셨다”며 “평생을 화려하게 살고 죽는 순간까지 자기 자신이고 싶어했던 어머니의 모습을 잊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조흥은행 창업주 증손녀 뉴욕퀸이 말하는 故 진도희

6 영화감독 신상옥 · 최은희 부부와 함께한 진도희 모녀. 7 김희라, 신성일과 함께 출연한 영화 ‘체포령’의 한 장면. 8 원로 배우 남궁원과 테헤란국제영화제에 참석한 진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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