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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기사

COLUM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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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nse&Sexibility

글 · 미소년

2015. 10. 12

섹스가 중요하지만, 애인이 혹은 남편이, 그걸 좀 못해도, 갈아치우고 싶지 않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충성심이 생긴다.

“어떤 시인 형이 사주를 봐줬는데, 나는 불이래. 사주에 물이 없대. 그래서 물이 많은 여자를 만나야 한대.”

전화기를 들고 내 말을 듣던 친한 누나가 대답했다. 그녀는 소설가다.

“어머, 야해.”

“뭐가 야해?”

“내 사주엔 물이 넘친다던데.”



누나는 말했다. 어차피 우리는 서로에게 관심이 없다. 다행이지, 저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여자랑은 못 살아. 이야기가 엉뚱하게 섹스로 튀었다. 아, 요즘 내가 달리기를 매일 하고 있다고 했구나.

“달리기를 하니까 허벅지에 근육이 생기고, 왠지 섹스도 더 잘할 것 같더라고. 힘이 생겨, 막, 막!”

“그래. 그렇지. 그럴 거야. 어휴. 역시 운동을 시켜야 하나?”

나는 직감으로 알아챘다. 누나가 왜 한숨을 쉬는지.

“누나, 남자친구 너무 기죽이지 마라.”

“그러니까. 나는 말을 너무 직접적으로 해. 뭐하는 거니? 벌써 했어? 이렇게 말해버린다니까.”

나도 저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물론 이 누나한테 들은 건 아니고, 예전에 만나던 여자들한테. 어쩌다가, 아주 피곤할 때.

“그런데 누나, 나는 그런 말 들었을 때, 막, 더 의욕이 생기던데. 담엔 너를 불살라주리라, 이런 생각도 하고. 그리고 여자가 먼저 말을 꺼내니까, 나도 말하기가 편해지더라고.”

“무슨 말?”

“내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움직일 때는, 제발 그때 너는, 가만있으라고. 그때 움직이면 사고 나니까.”

“그치, 그래야 대화가 되지. 아, 근데, 내 남자친구는 기가 죽어. 잘한다, 잘했다, 애썼다, 이렇게 말해줘야 돼.”

우리는 왜 이딴 얘기를 나누고 있는 것일까? 친한 사이긴 하지만. 역시 나는 불이고, 누나는 물이어서 이야기가 잘 통하는 걸까? 그럴 수도 있을 것 같네.

“몸에 좋은 것 좀 많이 먹여.”

“그래, 먹이면 효과는 바로 나타나. 워낙 몸 쓰는 걸 싫어하는 애라 늘 기운이 없어. 그래서 먹이는 족족 약발은 받는 거 같아.”

“누나, 내가 달리기를 하니까 허벅지에 근육이 붙더라고. 그런데 내가 요즘 깨달았는데 허벅지에 근육이 붙으면 그다음엔 거기에 근육이 생겨.”

“거기가 어딘데.”

“지금 누나가 생각하는 거지.”

“하하하하하하하. 야아, 야해.”

“지랄하네. 멍청아.”

누나는 내 욕을 듣고도 계속 웃었다. 나도 웃기긴 했다. 올 초만 해도 한 해 목표가 섹스 4번이라고 말했던 누나였다. 남자친구도 없었고, 당연히 섹스할 남자도 없었으며, 물론 아무나 만나서 ‘원 나이트’를 할 만한 문란함도 없는 누나였다. 말로는 수백 남자 만났을 것 같지만. 그래서 ‘물’인가? 난 ‘불’이고? 난 여자를 너무 많이 만났다.

“누나, 느닷없이 남자친구 생겨서 올해 목표 초과 달성한 것만으로 만족해.”

“야, 야. 안 하면 안 했지, 하면, 내가 만족을 모르는 여자다. 그런데 말이야… 아니다. 내가 별소릴 다 하네. 우리 지금 뭐하고 있냐?”

“멍청아, 뭔 말을 하다 말아. 말해봐.”

“만약 얘랑 헤어지고 다른 남자를 만나게 되면, 일단 노래방에 데리고 가보려고. 그러고 나서 사귈지 말지 판단해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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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스와 박자의 상관관계

오랜만에 듣는 흥미로운 얘기였다. 운전 중에 블루투스를 켜놓고 통화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머릿속엔 생각이 많아져서 좌회전 차선으로 못 들어갔다. 그래서 속절없이 직진을 해야 했다. 야하게 느껴졌다.

“왜지, 노래방엔 왜지? 아, 알 것도 같은데 모르겠어.”

“얘가 박치더라. 그리고 몸치야. 리듬이 없어.”

나는 핸들에서 두 손을 떼고 박수를 쳤다. 계속 박수를 쳤다. 굉장한 통찰력이었다. 최근에 했던 내 섹스가 떠올랐다. 아주 만족스럽진 않았지만, 그 애(물론 요즘 만나는 내 애인)가 많이 늘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역시 리듬 덕분이었다. 리듬이 아주 좋은 건 아니지만, 그 애가 연속해서 반복적으로 움직일 때, 내가 어느 정도 균형을 맞추면서 그 움직임을 끌고 가거나, 그 애가 끌고 갈 수 있을 정도는 됐다. 여기까지 오는 데 시간이 필요했는데, 시간이 언제나 해결해주는 건 아니었다.

“노래 박자 못 맞추는 애들 있잖아? 그런 애들은 연습을 해도 박자를 못 맞춘다니까. 그 박자를 못 맞추면 저 박자도 못 맞추지. 그 리듬을 못 맞추면 저 리듬도 못 맞추고.”

소설가라 그런가? 평범한 말 같은데 인식이 담겨 있는 것 같다. 섹스에 대해 이야기하는데도 격조가 있어 보인다고 할까?

“누나, 한 사람이 박자를 못 맞추면 다른 사람이 대신 그 이상한 박자에 맞춰주면 되잖아?”

내가 물으면서도 좀 이상했다. 아무래도 섹스를 할 때 움직임의 중심은 남자니까.

“에휴, 하하하하, 에휴, 하하하.”

누나는 한숨을 내쉬다가 웃다가 또 내쉬다가 웃다가, 그러다가 말이 없었다.

내 차는 강남 신사역에 못 미쳐서, 가로수길 들어가는 입구에서 신호 대기로 멈췄다. 유턴하는 곳을 찾다가 여기까지 내려왔다. 쓸데없는 말 하느라 정신을 놓았나보다. 그런데 횡단보도로 세상에, 예쁜 여자들이 우르르 지나갔다. 슬슬 가을인데 여자들은 아직 계절의 끝에 서서 멈추어 있는 것 같았다. 짧은 치마, 스키니한 팬츠, 걸을 때마다 가슴이 물결처럼 출렁이는 셔츠 같은 것들을 입고 여자들은 한낮의 도로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섹스는 영원히 충족되지 않는 욕망일 것이다. 그리고 나는 겨우 서른여섯인데 ‘하는’ 섹스만큼이나 ‘상상’하는 섹스가 좋아지기 시작했다. 아쉽기도 하고 안 아쉽기도 하고. 애인은 아쉬워하려나. 미래의 애인들도.

“누나, 그러면 남자친구랑 헤어져야겠다는 생각은 안 했어? 욕구가 충족이 안 되면 아쉽잖아. 더 강한 남자를 만나고 싶어?”

누나는 내 말이 끝나자마자 대답했다.

“아니.”

단호했다.

“정말?”

“어. 아쉬운 대로 만나는 거지.”

“섹스가 안 중요해?”

“중요하지. 하지만 뭐, 잘못한다고 해서 헤어지고 싶지는 않은데. 운동을 열심히 시키면 시켰지.”

신사역 앞에서 유턴을 하면서, 아, 무슨 대화가 이렇게 도로 상황이랑 어울릴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누나, 지금까지 해준 얘기 소설로 써봐. 특히 노래방 얘기 재밌을 거 같아.”

“야, 소설은 뭐 아무 얘기나 가져다 붙이면 되는 줄 아니. 섹스도 아무나랑 하면 기분 더럽잖아.”

“그럼 내가 쓸게. ‘여성동아’ 에세이에.”

“그래.”

나는 굳이 이 말을 적고 싶었다. 섹스가 중요하지만, 애인이 혹은 남편이, 그걸 좀 못해도, 갈아치우고 싶지 않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충성심이 생겼다는 말. 남자는 충성을 바치는 존재에게 모든 힘을 쏟아붓는다는 부질없는 깨달음 따위, 아무튼 뭐, 이런 말. 꺼져가는 불이, 다시 활활 타오를 것 같더라는 말. 나는 불이다. 불은 언제든 꺼진다. 꺼진 불이 다시 켜지면 큰불이 된다. 하지만 불은 결국 꺼진다. 소중하게 대해주세요, 애인, 그리고 미래의 애인들.

미소년

작업 본능과 심연을 알 수 없는 예민한 감수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으며, 남성들의 통속화된 성적 비열과 환상을 드러내는 글을 쓴다.

일러스트 · 곤드리

디자인 · 유내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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