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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Style SENSE&SEXBIL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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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미소년 | 일러스트 · 곤드리

입력 2015.08.05 10:16:00

공항 면세점을 둘러보고 있는데 함께 출장 간 형이 나를 붙들고 말했다.
“여자한테 줄 건데 선물 좀 같이 골라줘.” 내가 물었다. “형수님이요?” 부도덕한 그가 말했다. “아니, 여자친구.”
흔한 경우는 아니겠지만 부인 말고 여자친구를 두는 남자들이 있는 것 같다. 흔한 경우인가? 나와 함께 출장을 간 형은 올해 마흔 살이고 애인은 서른한 살이다. 애인은 미혼이다. 이 형의 어딜 보고 좋아하는지 모르겠다. 이름을 말하면 알 만한 회사의 부장이긴 하다. 돈이 많나? 음, 가난하진 않다. “형, 부인도 있고, 애인도 있으면 골치 아프지 않아요?” 묻고 싶었지만 묻지 않았다. “형, 부인이랑도 섹스하고, 애인이랑도 섹스해요? 아니, 해야 해요?”라고도 묻고 싶었지만 묻지 않았다. 형의 눈빛이 ‘헛소리 그만하고 선물 사러 가자’라는 메시지를 강력하게 보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궁금해하는 독자들이 있을 테니, 이 글 저 아래 그 형의 속마음을 적을 예정이다.

형은 지갑을 사겠다고 했다. 가방은 비싸기 때문이다. 화장품은 이미 부인을 위해 샀다고 했다. 부인에겐 화장품이 적당하지만 애인에겐… 아닌가? “그래도 명품을 사야겠지?” 형은 말했다. 그래서 나는 명품 매장에 가게 될 줄 알았다. 형은 나를 데리고 샤넬, 루이비통, 프라다 매장을 유유히 지나쳤다. 그리고 ‘T’로 시작하는, 절대 명품이라고는 할 수 없는 브랜드 매장 안으로 들어갔다. “여자들이 이 브랜드 좋아하지?” 나는 “아니요”라고 대답하려다가 말았다. 딱히 싫어하는 것 같진 않았기 때문이다. 이 브랜드를 좋아해서 좋아한다기보다는 명품 브랜드는 비싸니까, 눈높이를 약간 낮춰서 ‘준명품’이라고 불리는 브랜드를 좋아하는 게 아닐까, 라고 나는 생각하지만, 굳이 이런 얘기까지 할 만큼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그리고 그 형은 마치 특정 보수당의 열성 지지자처럼 옆에서 뭐라고 말해도 듣지 않는 성격이었다. 아무튼 이 브랜드를 좋아하는 여자들은 대체로 20대라고 나는 알고 있다.

형은 매장 안으로 들어가서 디자인이 제법 세련된 지갑을 몇 개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점원이 지갑을 꺼내 유리로 된 진열대 위에 올리자, 형은 지갑의 겉과 안을 낱낱이, 해부하듯이 보았다. “얼마예요?” 형은 가격을 듣고 흡족해했다. 하지만 이내 얼굴이 약간 초조한 빛을 띠기 시작했다. “너무 싼 가?” 이 형은 어쩌려는 것인가? 서른한 살의 여자는 이 형을 왜 만나는가?

그때부터 형과 함께 샤넬, 루이비통, 프라다 등 명품 매장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매장에 들어가서 형은 크고 멀쩡한 지갑을 보여달라고 말했다. 해부하듯이 볼 필요가 없었다. 그냥 딱 봐도 ‘T’ 브랜드에서 본 지갑보다 예뻤다. 일단 브랜드 로고만으로도 사람의 마음을 끌기에 충분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문제는 디자인이 아니고, 세부적인 마감의 차이도 물론 아니고, 오직 브랜드였다. “얼마예요?”라고 묻는 형의 목소리는 떨렸다. 형은 곧 실망이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약간 숙이더니, 진열대에 놓인 다른 지갑을 보고 고개를 치켜들었다. “저기, 저 작은 지갑은 얼마예요?” 형은 작은 지갑을 보여달라는 말 대신 가격을 물었다.

점원이 말했다. “60만원이요.” 형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안 되는데.” 나중에 얘기를 나눠보니 형이 설정한 금액은 50만원이었다. “그 정도가 적당한 것 같아. 와이프한테도 1백만원짜리는 안 사주니까.” 형수님한테 50만원짜리는 사주는지 모르겠다. 물론 안 사주는 것 같다. 비행기를 타고 돌아올 때 형이 꺼내 보여준 건 립글로스였다. “이거 디올 거야. 명품이잖아.” 이런 게 면세점에서 가격이 얼마나 하지? 5만원이면 살 수 있는 거 아닌가? 아무튼 그 형은 부인에게도 1백만원짜리는 안 사주기 때문에 애인에게 50만원이라는 금액을 설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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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프에겐 명품 립글로스, 애인에겐 명품 지갑

형과 나는 매장을 나와 다른 명품 브랜드 매장에 갔다. 또 다른 명품 브랜드 매장에도 갔다. 형은 찾아야 했다. 명품 지갑을 50만원에 파는 곳을. 그러던 와중에 우리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명품 브랜드마다 카드와 약간의 현금을 구겨서 넣을 수 있는 작은 지갑은 60만원 선에 판매를 한다는 사실이었다. 다 비슷했다. 심지어 디자인도 비슷하게 보였다. 얘들이 짜고 파는 건가?

잠깐 쉬려고 스타벅스에서 그린티라테를 더치페이해서 마셨다. 형은 고민이 많아 보였다. 나는 굳이 저렇게 고민하면서까지 서른한 살의 애인을 만나야 하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형이 비행기를 타고 가는 곳이 집, 즉 부인이 있는 곳이라는 생각을 하니 안쓰러웠다. 형은 애인을 더 보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밤마다 누우면 1분 만에 잠이 드는 나로서는 형이 섹스를 나보다 두 배 더 할지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어서 형이 엄청 걱정됐다. 40대 초반인 형이… 죽을지도 모른다…. 머리가 아팠다.

“형, 나는 이제 선글라스 사러 갈게요. 아까 보니 싸게 팔더라고. 갖고 싶었던 거 있었어.” 형은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리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한참을 들어도 쓸데없는 얘기뿐이었다. 형은 그냥 얘기가 하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애인을 만나는 건가? “형, 애인이랑 섹스할 때는 어디로 가?” 내가 물었다. “어디 안 가. 차에서 얘기해.” 형은 애인과 주로 이야기를 한다고 했다. 애인은 대체로 듣기만 한다고도 했다. “섹스도 차에서 해. 이야기를 하다가 섹스를 하게 될 것 같은 날은 동부이촌동 아래 한강 쪽으로 가고, 이야기만 하게 될 것 같은 날은 한강 잠원지구에 가. 애인이랑은 섹스도 더 잘돼.”

나는 차마 이렇게는 적고 싶지 않다. 내가 아는 형이 애인이랑은 섹스가 더 잘되는데, 그건 애인이 형을 편하게 대해주고 이야기도 잘 들어줘서 그런 것 같다고. 하지만 그 말은 사실인 것 같다. 비행기 타야 할 시간이 가까워져서 선글라스 사러 가야 하지만, 난 형의 부탁을 더 들어주기로 했다. “이제 지갑 사러 가자.” 형이 말했다. 형은 작심한 듯이 걸음을 옮겼다. 지갑 하나 사는 데 굳이 저렇게 굳게 결의를 해야 하는 건지 잘 모르겠지만.

형은 한 명품 매장으로 들어갔다. 작은 지갑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영수증을 보니 58만원이었다. 60만원 선, 그러니까 명품 브랜드 매장에서 파는 작은 지갑 중에선 가장 싼 거였다.

형은 기분이 좋아 보였다. 나에게 물었다. “괜찮지?” 서너 걸음 걷다가 또 물었다. “괜찮지?” 지갑은 괜찮았다. 20대 여자에게 줬다면 좋아했을 거다. 하지만 30대 초반 여자가 저 작은 명품 지갑을 좋아할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형 얘기를 잘 들어주는 성품의 소유자인 걸로 봐선, 굳이 명품 지갑이 아니더라도 좋아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형과 함께 보내는 시간 자체를 좋아하겠지? 아마도. 그녀는 형을 사랑하는 걸까? 집에 부인이 있는 형을?

형이 언제까지 저런 시간을 이어갈 수 있을까? 부인도 있고, 애인도 있으면 행복할까? ‘괜찮지?’라는 말은 마치 형 자신의 삶을 나에게 확인받으려는 물음 같았다.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아, 이렇게 슬픈 글은 오랜만에 써본다. 마음에 드는 선글라스가 면세점에서 30%나 할인 중이었는데, 못 사고 그냥 오다니.

미소년

작업 본능과 심연을 알 수 없는 예민한 감수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으며, 남성들의 통속화된 성적 비열과 환상을 드러내는 글을 쓴다.

디자인 · 김수미

여성동아 2015년 8월 62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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