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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아들과의 연애를 끝낼 수 있을까

세상에서 가장 진한 짝사랑

기획 · 김명희 기자 | 글 · 김지은 자유기고가 | 사진 · 한정수

2015. 07. 03

세상 모든 엄마들이 그렇다. 죽을 것처럼 힘이 들어도, 아니 내일 당장 죽는다 해도 오늘 아침에는 부산스럽게 아이의 아침밥을 준비할 것이다. 혹자는 그것을 부모 된 자의 숙명이라 하지만 사실은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 엄마라서 누릴 수 있는 ‘행복감’이다. 김수경 씨의 책 ‘아들과의 연애를 끝내기로 했다’는 아들(혹은 딸)을 향한 밑도 끝도 없는 짝사랑에 빠진 엄마들의 행복한 자기 고백이자 위로의 메시지다.

아들과의 연애를 끝낼 수 있을까
“인쇄에 들어가기 직전까지도 책을 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였어요. 제목에선 마치 아들을 완전히 놓은 것처럼 ‘끝내기로 했다’고 했지만 책을 쓰는 동안에도, 그리고 그 이후에도 끝을 내기는커녕 ‘아, 절대 못 끝내는 거구나’ 여실히 깨닫게 됐으니까요.”

김수경(51)은 ‘작가’보다는 ‘기자’라는 타이틀에 훨씬 익숙한 사람이다. 20년 넘는 세월을 잡지 기자로 일했고, 그 뒤로도 책 만드는 일을 손에서 놓지 못해 후배들과 출판기획사를 차렸다. 아이를 키우는 동안에도 일에 파묻혀 사느라 집에 들어가는 날보다 들어가지 못하는 날이 더 많았고, 야근을 밥 먹듯 하다 보니 아들(23)은 학창 시절 학교에서 엄마 없이 자라는 아이인 줄 오해받는 일까지 생겼다. 그녀의 기억으로 아들은 사춘기 열병조차 한번 앓은 적 없는 쿨한 녀석이었다. 그런데 아들이 다 자란 후에야 그렇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당황하게 됐다.

“문득 궁금해져 슬쩍 물어봤거든요. 너는 왜 방문 꽝 닫고 들어가고 그런 것도 한번 안 했냐고. 그랬더니 자긴 많이 했는데, 엄마가 집에 없어서 못 봤을 뿐이라더군요. 사실 아들을 키운 건 제가 아니라 시어머니였어요. 쭉 한집에 살긴 했지만 일이 바쁘단 이유로 여느 엄마들처럼 아들의 성적표를 들여다보면서 걱정하고 사춘기에 같이 눈물 흘리고 그런 걸 못해본 거예요.”

세상에서 제일 무관심하고 무성의한 엄마로 살아왔던 그녀에게도 다 큰 아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일은 마치 오랜 시간 달달한 연애에 빠져 있던 여자가 갑작스러운 이별 통보를 받은 것처럼 두렵고 먹먹한 일이었다. 세상의 그 어떤 엄마도 아들과 완벽하게 이별할 수 있는 법을 알지는 못한다. 그녀는 그 기막힌 사실을 인정하기 위해 책을 쓰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책은 나오자마자 큰 반향을 일으키며 2쇄 인쇄에 들어갔다. 자식을 향한 짝사랑에 고달픈 엄마들이 그만큼 많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결혼이 절실했던 건 그녀가 아닌 그녀의 부모님이었다. 사귀는 사이도 아니고, 요즘 말로 하면 밥 몇 번 같이 먹으며 겨우 썸 좀 탔을 뿐인 남자를 ‘결혼할 사람’이라며 집에 데려갈 수밖에 없었던 것은 ‘우리 집의 마지노 선은 스물다섯 살’이라는 부모님의 엄포 때문이었다. 죽고 못 살 만큼 뜨거운 연애를 하고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와는 쿵작이 참 잘 맞는 편이었다. 그래서 결혼했다. 결혼 전에도 그랬지만 결혼 후에도 그녀가 제일 잘하는 것은 책을 만드는 일뿐이었고, 사진기자로 일하던 남편은 그 누구보다 그녀의 일을 잘 이해해주었다.



혼자 어른이 된 아들

결혼하고 딱 1년이 지났을 때 남편이 일본으로 유학을 다녀오겠다고 했다. 한 1년쯤 후면 돌아오겠거니 생각했던 그녀는 쿨한 척, 잘 다녀오라 했다. 그리고 5년이 지났다. 그사이 그녀는 남편과 살던 방을 빼 시집으로 거주지를 옮겼고,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아들을 낳았고, 돈을 벌었고, 살림도 해야 했다. 물론 제대로 해내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남편 없는 집에 시어머니와 둘이 마주 앉아 시시콜콜 싸워댔다. 그러면서 무던히도 많이 주저앉아 울고 또다시 일어섰다.

5년 후, 학업을 마친 남편은 일본에 남아 교수가 되겠다며 그녀에게 일을 포기하고 일본으로 건너오라고 했다. 그런 남편을 억지로 한국으로 끌어다 앉히고 5년을 더 싸워댔다. 남편은 교수가 될 기회를 “당신 때문에 놓쳤다”며 두고두고 그녀를 원망했고, 그런 남편과 화해하는 데는 꼬박 10년의 세월이 걸렸다. 그렇게 좋은 엄마, 좋은 아내, 좋은 며느리 그 어느 쪽도 실현 불가능한 채로 발만 동동 구르며 살다 문득 돌아보니 아들은 ‘아이’가 아닌 남자가 돼 있었다.

좀처럼 뭘 해달라거나 무엇이 부족하다 요구하는 법이 없던 아들이 고등학교에 입학한 뒤 학교 밥이 맛이 없다며 도시락을 싸달라고 했을 때 그녀는 무조건 그러마 약속을 했다. 다른 수험생 엄마들이 들으면 코웃음을 칠 일이지만 그녀는 그 도시락 하나 싸는 일 때문에 3년을 전쟁처럼 보냈다. 회사에서 날밤을 새운 날에도 새벽 5시면 칼같이 퇴근을 해 아이를 깨우고 도시락을 쌌다. 도시락도 그냥 도시락이 아니었다. 마치 무슨 경연대회 출품작이라도 만드는 것처럼, 지지고 볶고 난리를 쳐댔다. 잡지 기자 일을 하면서 어깨너머로 배운 화려한 요리 비주얼들이 총출동됐고 그렇게 미친 여자처럼 도시락을 싸 아이를 학교까지 바래다주고 돌아서면 그제야 졸음이 기절할 듯 쏟아졌다. 일이 밀려 아예 한숨도 못 자는 날도 적지 않았다. 그래도 아이 도시락만은 절대 거르지 않았다. 출근을 해서도 틈틈이 내일 도시락은 뭘 싸줄까 고민했다. 지금껏 아들에게 못해주었던 죄스러운 마음을 한꺼번에 보상받는 듯한 기분에 한껏 들떴던 시절이었다.

아들과의 연애를 끝낼 수 있을까


내 아들이 전교 20등을 하다니!

아들과의 연애를 끝낼 수 있을까
그러다 어느 날 사건이 터졌다. 당연히 공부랑은 담을 쌓았겠거니 생각했던 아들이 고등학교에 입학하고서는 전교 20등을 해버린 거였다.

“학교에서 담임이 전화를 했더라고요. 아이 성적표를 보았냐고 하는데, 생각해보니 아이가 한 번도 저한테 성적표를 보여준 적이 없더라고요. 정신이 퍼뜩 들었죠. 더군다나 집안 식구 중 누구도 받아본 적 없는 우수한 성적을 아들이 받았으니 저도 어찌할 바를 모르겠더군요.”

아들에게 왜 지금껏 성적표를 보여준 적이 없느냐 물었더니 대답이 가관이었다. 보여달라는 말을 하지도 않는데 굳이 뭐 하러 보여주느냐는 거였다. “각자 바쁜데 알아서 사는 거지 뭐!” 속에서 뜨끔한 것이 올라왔다. 그제야 헐레벌떡 여동생의 도움을 받아 서울 목동의 어느 입시 학원에 등록을 했다. 딱 보름간, 학원에 데려다주고 다시 데리고 오는 생활을 했다. 뒤늦게나마 내 아들이 천재였다는 사실을 깨달은 엄마는 헉헉 소리를 낼 겨를도 없이 뒷바라지에 목을 맸다. 그런데 정작 나자빠진 건 졸지에 천재가 된 아들이었다.

“달랑 보름 공부하고선 이민 가고 싶다더라고요. 이런 상태론 도저히 한국에서 학교를 다닐 수가 없다면서요.”

자식을 키우다 보면 엄마 마음은 하루에 열두 번씩 천당과 지옥을 오간다. 그녀도 그랬다. 그 길로 학원을 그만둔 아들은 공부에 완전히 진력이 났는지 책은 거들떠보지 않았다. 성적은 곤두박질쳤고 담임의 말에 의하면 수업 태도도 엉망이었다. 그 뒤로 다시는 아들의 성적표를 보지 않았다. 자꾸만 떨어지는 성적을 확인하는 일이 두려워서였다. 아들은 결국 대학에 낙방했고, 부득부득 재수를 고집했다. 재수를 하는 동안에도 공부는 그다지 열심히 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하루 8시간 푹 자고 일어나는 건 물론이요, 독서실 같은 데도 다니지 않았다.

“남들은 결국 아들이 대학에 들어갔으니 이런 말을 한다 할 수도 있지만 저는 정말로 아들이 대학에 가지 않아도 괜찮은 인생을 살 수 있을 것만 같았어요. 아들한테도 그랬어요. 요즘엔 누구나 다 대학을 나오니까 차라리 고졸이 더 특이하지 않겠냐고. 고졸 출신 사업가, 고졸 출신 여행가…. 더 특이하고 멋지잖아요?”

삼수 끝에 아들이 대학에 합격했다. 아들은 모를 거다. 아들이 입시를 치르고, 재수에 삼수를 결심하는 동안 아무 걱정 안 하고 일만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던 엄마의 속이 얼마나 끌탕을 치고 있었는지를. 학원도 과외도 모두 마다한 채 혼자 재수를 해보겠다며 늦은 밤까지 환하게 불을 켜놓고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아들의 뒤통수를 바라볼 때면 ‘아이를 대학 보내려면 입시 정보쯤은 엄마가 줄줄이 꿰고 있어야 한다’는 어느 입시 전문가의 말이 울대를 콱콱 조여왔다. 다른 엄마들이 ‘아이가 1등급이면 엄마도 1등급 엄마, 아이가 5등급이면 엄마도 5등급 엄마’라는 말을 우스개처럼 할 때면 그녀는 스스로가 등급 안에도 낄 수 없는 한심하고 무능한 엄마란 생각에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그래도 아들과 헤어져야 한다

20년 넘게 시집 식구들과 한 지붕 아래 살면서도 시어머니 밥상, 남편 밥상을 아들 밥상 차리듯 그렇게 살뜰하게 차려본 적은 없었다. 시어머니는 까다롭고 철저한 사람이었다. 그런 시어머니의 마음에 쏙 들 정도로 무언가를 해내는 건 처음부터 불가능해 보였다. 그래서 그녀가 선택한 건 솔직해지는 쪽이었다. 시어머니가 혼자서 밥을 차려 드시건, 남편 밥상을 차리고 계시건 본인이 나서서 할 수 없을 때는 그냥 모른 척했다. 졸리면 그냥 잤다. 잠시라도 잠을 자지 않으면 일을 할 수 없는 상황인데 하루이틀도 아니고 매일을 그렇게 살 수는 없다고 속 편히 생각했다. 그런데도 아들 밥만은 포기할 수가 없었다.

다른 건 몰라도 먹는 거 하나만큼은 제대로 챙겨주려 했던 그녀의 욕심은 예상치 못한 결과를 낳았다. 매사에 쿨하고 합리적인 아들이 유독 밥상머리에서만큼은 감사할 줄 모르는 입맛 까다로운 남자가 돼버린 거다. 대충 차려줘도 맛있게 먹으면 좋으련만 아들은 차면 차다, 뜨거우면 뜨겁다, 소화가 된다 안 된다 음식에 대해서는 치사할 정도로 매정하게 타박을 해댔다.

책을 쓰기 시작할 때만 해도 ‘그래, 어디 두고 보자’ 하는 심정이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아들이 딱히 밥을 먹겠다고 한 것도 아닌데 혼자 바쁜 출근 시간을 쪼개고 쪼개 밥을 하고 조개탕을 끓인 게 화근이었다. 1인용 밥상을 차리고, 정작 자신의 입으로는 식어버린 커피 한 모금도 넘기지 못한 채 허둥지둥 아들을 깨웠다. 그런데 아들이 배신을 했다.

“엄마, 나 밥 안 먹고 조금 더 잘래.”

이쯤에서 멈췄다면 그저 혼자 잠시 울적해하고 금세 잊어버렸을 터였다. 이런 정도의 서운함은 어제도, 그제도 듣고 쉽게 잊어버릴 정도였으니까. 그런데 어떤 날은 유난히 고집스레 마음이 쓰일 때가 있다.

“그럼 빵 한 조각이라도 먹고 가.”

잠에서 덜 깬 아들을 억지로 끌어다 앉히며 바쁘게 썬 채소와 요구르트 소스를 내밀었을 때, 아들이 말했다.

“오이랑 당근은 안 먹을 거야. 그리고 엄마, 빵이 좀 덜 녹은 거 같은데?”

물론 빵의 온도는 적당했다. 엄마의 성의보다는 10분의 잠이 더 중요한 아들이 내뱉은 생각 없는 성토의 말이었을 뿐이다. 끝까지 빵 한 조각 씹어 넘기지 않고 빈속으로 집을 나서는 아들의 등짝에다 대고 그녀는 욕을 퍼부었다. 그러고선 씩씩거리며, 호기롭게 짐을 싸서 집을 나왔다. 어디 엄마 없이 한번 살아보라지!

집을 나온 그녀는 아들과 끝을 내는 대신 책을 썼다. 그리고 깨달았다. 이제는 아들이 아닌 자신과의 연애를 시작해야 할 때라는 것을.

“시어머니가 그런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아이를 낳았을 때는 잠 한번 푹 자보는 게 당신 소원이셨는데 그것도 다가 아니었고, 키우면서는 아들 장가보내면 끝이 날 줄 알았는데 그마저도 아니더라’고요. 어쩌면 이 책은 스스로를 위로하는 책일지도 모르겠어요. 저처럼, 아이한테 해준 게 없어서 미안한 엄마들에게 필요한 책? 입술을 깨물고 주먹을 불끈 쥐고 머리를 쿵쿵 찧으면서 죽어버릴까 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 아이를 키운다는 의무감과 책임감 때문에 앞이 보이지 않을 때 이 책을 읽으며 스스로의 마음을 쓰다듬고 위로받을 수 있으면 좋겠어요.”

물론, 그녀가 아들과의 연애를 끝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자식에게 단단히 묶어두었던 마음을 느슨하게 풀어헤치고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그 뒷모습을 덤덤하게 지켜보고 응원해주는 것은 결국 엄마의 몫이다. 그 마음의 근력을 키우기 위해 그녀는 이제야 겨우 스스로를 사랑하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디자인 · 최진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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