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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진양혜의 그 여자 그 남자

드라마 ‘밀회’의 음악 교수 피아니스트 박·종·훈

음악으로 다채로운 영역을 넘나들다

글·진양혜 아나운서|사진·지호영 기자

2014. 12. 17

2009년 11월, 한국인 피아니스트로는 최초로 리스트의 ‘초절기교 연습곡’ 전곡을 완주한 박종훈. 그의 폭넓은 활동 반경을 들여다보면 피아니스트라는 수식어가 부족한 느낌이 든다. 클래식, 재즈, 탱고, 뉴에이지 등 여러 장르를 넘나드는 연주는 물론이고 작곡과 편곡, 음반 프로듀싱과 녹음, 공연기획에 라디오 진행까지 다방면에 걸쳐 그의 재능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어서다.

드라마 ‘밀회’의 음악 교수 피아니스트 박·종·훈
여성은 청각에 민감하고 남성은 시각에 예민하다. 남자들이 예쁘다고 느끼는 여자에게 무조건적으로 호감도가 상승하는 정도에 비길 바는 아니지만 대부분의 여성이 목소리가 좋다고 느끼는 상대에게 호감을 갖는다고 한다. 더군다나 나는 오랜 시간 말하는 방법을 고민하고 소리의 세계에 있다 보니 말씨에 민감하고 목소리에는 더욱 예민하다.

피아니스트 박종훈(45)을 특별하게 기억하게 된 건 몇 년 전 한 지방자치단체 음악 공연의 진행자와 연주자로 만난 무대에서였다. 편안한 스타일로 구성된 무대였고, 그가 말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공연 기획자의 귀띔이 있었기에 사전 미팅 없이 ‘그의 음악 세계와 함께 연주하는 아티스트에 대한 이야기’만 나누기로 하고 막을 올렸다.

무대에서 청중들을 대상으로, 음악을 소재로 이야기를 나누기란 쉽지 않다. 형식에 얽매이면 지나치게 학구적이거나 딱딱해지기 쉽고, 청중의 재미를 유발하려고 하다 보면 가벼운 이야기로만 채워지기 쉽다. 그런데 그는 군더더기 없는 알찬 내용을 내가 좋아하는 차분하고 담백한 목소리로, 건조하지 않으면서도 친절하게 유머까지 곁들여 전달하는 재기 넘치는 말솜씨의 소유자였다. 그에게 호감도가 급상승하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기억에 새겨진 그가 어느 날 클래식 음악을 소재로 한, 유아인·김희애 주연의 화제의 드라마 ‘밀회’에서 음악 교수 역으로 등장했다. 극 중에서는 본업이 배우인지 교수인지 헷갈릴 정도로 궁금증을 유발하는 인상적인 연기자의 모습을 보여주더니 9월부터는 서울 예술의전당 빅 히트 프로그램인 ‘11시 콘서트’의 해설자로 청중을 직접 만나기 시작했다. 클래식 음악가로서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는 그를 만나러 ‘11시 콘서트’가 열리는 햇살 좋은 어느 목요일 예술의전당을 찾았다.

연주자로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교감



드라마 ‘밀회’의 음악 교수 피아니스트 박·종·훈
▼ 음악회가 끝나자 흡족한 얼굴로 연주회장을 빠져나오는 분들의 찬사와 사인 공세가 이어졌어요. 음악회 반응이 아주 좋네요.

청중의 분위기가 (저녁 연주회 때와는) 달라요. 자유롭고요. 낮 시간대 연주회라서 그런지 밝은 분위기예요. 대부분의 음악회는 긴장감이 있기 마련인데 ‘11시 콘서트’는 편안한 분위기에서 진행돼요. 저는 해설을 하니까 소통이 돼야 하는데, 반응이 아주 좋아요. 청중이 차가운 느낌이 들 때가 있는데 그러면 더 떨리죠. 매달 둘째 주 목요일 11시에 열리는데 프로그램에서 해설할 내용들을 모두 직접 준비해요. 음악사적인 이야기뿐만이 아니라 음악과 작곡가들의 삶까지 다양한 자료를 근거로 쉽고 재미있게 전달하고자 합니다.

▼ 말하는 거 별로 안 좋아한다고 들었어요.

맞아요. 같은 사무실에 있는 사람과 문자로 소통하기도 해요. 사실 말하는 것을 안 좋아한다기보다는 말이 안 되는 말을 하기가 싫어요. 무슨 말이든지 내용이 있어야 하고 뒷받침할 근거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무대에서는 말이 많아지고, 평소에는 그런 걸 다 말해야 하니 귀찮아서 잘 안 하게 되죠.

▼ 연주자로서 서는 무대는 어때요? 관객과의 교감에 신경 쓰는 편인가요.

제가 갖고 있는 걸 다 보여드리고 싶어요. 음악을 듣고 뭔가를 느끼고 갔으면 좋겠어요. 음악은 혼자 느끼는 것이 아니라 보고 듣는 사람에게 전달돼야 의미가 있거든요. 늘 그런 고민을 해요. 연주하려는데 분위기가 차가운 느낌이다 싶으면 더 떨리고 잘못되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도 되고. 저는 제가 작곡한 곡을 연주하는 경우가 많아서 청중의 반응이 늘 궁금했어요. 박수가 커도 차가운 느낌이 있고, 작아도 따뜻한 느낌이 있어요. 그런 걸 다 느끼기 싫은데 어쩔 수 없이 느껴져요. 제가 작곡한 곡이 아니라 기존 곡을 연주해도, 심사위원 앞에서 하는 경연이 아니라 음악을 들으러 온 청중 앞에서 연주하는 것이니 교감이 중요하죠.

▼ 원래 피아니스트가 꿈이었나요.

세 살 때 바이올린을 먼저 시작했는데 진짜 재미없었어요. 그런데 피아노에는 빠졌어요. 누르면 소리가 나고, 안을 들여다보면 많은 것들이 막 움직이는 게 신기해서 분해도 하고 다시 조립도 하고 그랬어요. 부모님은 모르셨죠. 하하. 그렇게 피아노를 잘 알게 되니까 곡을 만들고 싶어져서 곡을 만들고 ,오랫동안 피아노에 앉아 있었어요. 연습이라기보다는 피아노 앞에서 노는 시간이 많아졌어요. 피아노와 함께하는 시간이 재밌었죠. 사춘기 즈음 피아노를 전공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쇼팽이나 리스트처럼 자기가 작곡한 곡을 무대에서 연주하는 아티스트가 되고 싶었어요.

▼ 피아노를 분해하다니 호기심이 충만한 분이군요.

좋아하는 걸 못하면 못 참는 편이에요. 해야 하는 것보다 하고 싶은 것을 먼저 하는 성격이거든요. 어릴 때부터 기계를 무척 좋아했어요. 오디오나 컴퓨터는 무조건 다 분해하고 부품도 바꿔봤어요. 컴퓨터는 당연히 다 직접 제가 조립해서 사용했어요. 네댓 살 때 기억인데, 스테이플러를 처음 보고 참 신기했어요. 추론했죠. 누르는 게 분명하다. 누르면 어떤 기능을 하는 걸 텐데 이게 무엇일까. 궁금증에 그걸 손바닥에 놓고 눌렀어요. 그 후에 막 피가 나서 당황했던 기억이 나요. 좋아하는 것들이 있으면 속속들이 알고 싶어져요. 알고 나면 내 것을 만들고 싶어요. 새로운 곡을 연습해서 이 곡이 정말 좋다 느끼면 나도 이런 곡을 만들고 싶다, 피아노를 분해했다가 다시 조립하면 나면 나도 악기를 만들고 싶다, 이런 마음요(웃음).

▼ 창의적이기도 하군요. 그래서 악기도 만들어보셨나요.

하하. 피아노는 못 만들죠. 그런데, 머리 빗는 빗 있죠? 빗살을 긁으면 소리가 나는데, 어릴 때 다양한 빗을 모아 연주해본 적은 있어요. 일종의 악기를 만들어본 거죠. 기계를 좋아하고 컴퓨터도 좋아해서 독학으로 컴퓨터 언어를 깨우치기도 했어요. 별에 흥미가 많아서 엔지니어나 물리학자, 천문학자를 업으로 해도 괜찮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는데 결정적으로 그런 작업들은 감정이 없어요. 그래서 안 했죠.

아내와 듀오 콘서트 준비하며 조화 이루는 법 배워

▼ 곡 작업은 어떤 방식으로 하나요.

의뢰인의 요청에 따라 곡을 써요. 돈 버는 일이니까요. 듣는 사람이 어떻게 들을까를 생각하고 거기에 맞추죠. 반면 제 곡들은 ‘떠오르는 것’들을 옮기는 작업이에요. 구조적인 것을 항상 중요하게 생각하고 완성하는 과정에서 만족을 얻기 때문에 간단한 곡도 형식적으로 흐트러지는 것을 참지 못하죠. 그러다 보면 곡이 어려워져서 대중적이지 않게 되기도 하고요.

▼ 좋아하는 작곡가가 있나요.

어릴 땐 슈베르트를 좋아했는데 지금은 딱히 꼽기 어려워요.

▼ 일반적으로 슈베르트의 음악을 구조적이라고 평가하지는 않잖아요.

슈베르트는 가곡, 특히 선율이 예쁜 곡들을 많이 만들어 그에 대한 선입견이 생기기 쉬운데 그의 피아노곡들을 보면 본능적으로 썼지만 아주 잘 짜여 있어요. 곡이 진행되다가 갑자기 이상한 쪽으로 빠져버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이유 없이 하고 싶은 걸 다 한 건데, 나중에 보면 이유가 있어요. 슈베르트나 쇼팽의 곡은 본능적으로 만들었는데도 불구하고 참 잘 짜여 있죠.

▼ 연애 스타일은 어떤가요.

쏟아붓는 스타일이에요. 좋아하는 대상에 빠지면 정신이 없어서 처음에는 잘 못하지만 나중에는 혼자 생각을 많이 하는 스타일이에요. 아내(피아니스트 치하루 아이자와)는 처음에 봤을 때 예뻐서 좋아했어요. 점점 알아가니 독특한 매력이 있었어요. 내게 없는 것을 갖고 있더라고요.

▼ 음악에도 마음을 쏟아붓는 스타일인가요.

10대에는 그랬어요. 음악에 대한 순수한 열정이 있었는데 점점 시들해지는 것 같아요. 아주 자신만만한 20대 초반을 보낸 후 30대 초반이 될 때까지 더 성공하고 싶고 더 유명해지고 싶었는데 안되는 것이 많아지더라고요. 시간만 자꾸 가는 것 같은 조급함에 무대 공포증도 생기고. 강박관념도 있었어요. 예를 들면 이렇게 연주하면 관객이 박수를 얼마큼 칠까? 심사위원이 점수를 얼마나 줄까? 아주 힘들게 음악을 하는 어려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을 때 아내를 만났어요. 그런데 그녀는 순수하고 솔직하더라고요. 가슴으로 느끼는 걸 끄집어내서 표현하는 것을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것밖에 없더라고요. 그런 점이 정말 좋았어요. 그런 그녀를 보고 편안해졌죠. 그 덕분에 음악적으로 다양한 시도를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드라마 ‘밀회’의 음악 교수 피아니스트 박·종·훈


▼ 아내와 피아노 듀오 ‘듀오 비비드’를 결성해 그동안 두 장의 앨범을 내고 듀오 콘서트도 열고 있는데, 콘서트 준비 과정에서 어려움은 없었나요.

처음에는 둘이 자주 부딪쳤어요. 같은 무대에 서려고 몇 번 시도했는데 잘 안됐어요. 연주 스타일은 다르지만, 취향이 다른 것도 아닌데 음악적 자존심을 포기하지 못하겠더라고요. 져주면 되는데 지기 싫더라고요. 그냥 음악 이야기를 하면 참 좋은데 연주자로서 무대에 같이 서기 위해 연습하면 여러모로 부딪쳤어요.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각자의 스타일에 서로 익숙해지고 포기할 것은 포기하다 보니 어느 순간 편해지더라고요. 그러면서 듀오 활동을 하게 됐죠. 결혼한 지 10년이 좀 넘었는데 관계가 편해진 지는 몇 년 안 돼요. 좋게 말하면 편해진 거고 나쁘게 말하면 포기한 거죠. 집착하지 않고. 하하.

둘이 같이 연습을 많이 하면 안 좋더라고요. 각자 개인 연습하다가 짧은 시간 집중해서 호흡을 맞추죠. 이제는 아내와는 특별히 말을 안 해도 서로 통하는 수준에 이르렀어요. 네 손을 위한 연주곡이 많은데 무대에 많이 올려지지 않는 것도 두 피아니스트가 호흡 맞추는 게 쉽지 않아서일 거예요. 앞으로 다양한 레퍼토리를 발굴해서 음악적 다양성을 만든다는 의미로 계속 함께 무대에 설 생각이에요.

여러 장르 경험하며 클래식 본능 되살아나

▼ 2000년대 초반에 뉴에이지 음반을 내셨더라고요. 그땐 제 기억에 우리 사회가 전반적으로 보수적이던 때라 클래식 음악을 하는 분들을 인터뷰하면 ‘크로스오버’란 말 자체에 대한 약간의 반감이 느껴졌어요. 정통 클래식을 공부하고 국제 콩쿠르에서 입상해 화려하게 데뷔한 이력을 알고 있었기에 용기가 대단하거나 클래식 장르에 대한 미련이 없는 분이 아닐까 생각했어요.

뉴에이지 음반을 낸다니까 주위에서 많은 분들이 펄쩍 뛰더라고요. 지금은 돌아가신, 저를 상당히 아끼던 음악 평론가 한상우 선생님이 완강히 반대하셨는데 제 음반 발매 기념 음악회에 오셔서 연주만 듣고 절 보지도 않고 가시면서 그러셨대요. ‘쟤는 저런 음악을 왜 하니?’

▼ 그때 기분이 썩 좋진 않았겠네요.

기분은 나빴지만 나중에 ‘그때 그냥 할걸’ 하고 후회하기 싫었고, 하고 싶은 것을 해야 했으니까 할 수 없는 거죠. 스승이신 이경숙 선생님도 반대하시진 않았지만 많이 걱정하셨어요. 젊었을 때는 하고 싶은 것은 다 하자는 주의였어요. 그때와 달리 지금은 크로스오버에 대한 인식도 좋아지고 저에 대한 대중의 관심도 높아졌는데 도리어 클래식 음악을 하고 싶어져요. 다양한 장르를 하다 보니 오히려 클래식 음악을 넓은 시각으로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나이를 먹어서 그런가? 하하.

▼ 청개구리 성향이 있나 봐요.

그런 경향이 있긴 해요. 그러다 보니 단점도 있어요. 여러 장르의 음악을 하다 보니 클래식 음악계를 떠난 사람이라 생각하기도 하고, 어떤 곳에 있든지 이방인 같은 느낌이 있어요. 음악적으로 외로움을 느낄 때도 있고요.

▼ 부인이 음악적 동반자로서 위로가 되지 않나요.

제 음악에 대해서 신경도 안 써요. 하하. 이탈리아에 있는데 결혼 초부터 지금까지 3개월 이상 같이 지낸 적이 별로 없어요. 각자 스케줄에 따라 움직이다 보니 그렇게 됐어요. 그래서인지 어느 한 곳에 3주 이상 있으면 불편해지기 시작해요. 방랑자 같다고 할까?

▼ 앞으로 꿈꾸는 삶은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네요.

궁극적으로 피아노곡을 작곡하고 제 곡을 연주하는 피아니스트로 살고 싶어요. 이젠 정말 클래식 음악을 하고 싶어요. 당분간 클래식 음악에 빠져 지낼 것 같아요. 이것저것 많이 해서 클래식 장르를 더 잘 알고 새롭게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얼마 전에 열었던 ‘슈퍼 슈베르트’라는 독주회가 그 시작이에요. 이탈리아를 오가는 생활은 앞으로도 계속될 겁니다.

Epilogue

드라마 ‘밀회’의 음악 교수 피아니스트 박·종·훈

한 지방자치단체 음악 공연의 진행자와 연주자로 처음 만났던 방송인 진양혜와 피아니스트 박종훈이 11월 13일 예술의전당에서 재회했다.

연주자, 작곡가, 기획자, DJ, 그리고 배우까지.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다양한 장르의 일들을 망설임 없이 저질러온 박종훈 씨는 당분간 피아니스트로서의 삶을 충분히 즐길 것 같다. 리스트나 쇼팽처럼 자신의 곡을 직접 연주하는 피아니스트가 꿈이라는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의 ‘예쁜 딸’이 앞으로 아빠가 작곡한 음악의 저작권료로 큰 수혜를 받기를 소망했다. 문화 융성의 시대에 살면서 클래식 장르에서도 대중의 사랑을 오래도록 받는 곡들이 우리나라 음악가를 통해 많이 생산되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이미지와는 다른 대답, 특히 ‘재미있다’ 는 표현을 많이 하는 박종훈 씨와의 인터뷰는 즐거웠지만 좀 미진한 기분도 들었다. 이 사람, 분명 할 말이 더 있을 것 같다 싶었다. 아니 듣고 싶은 이야기, 궁금한 점이 더 많아졌다는 것이 맞는 표현일 게다.

그는 얼마 전 피아노곡을 들으면 떠오르는 사랑 이야기들을 단편소설과 에세이 형식으로 엮은 ‘새드 피아노’를 출간했다. 일단 그 책부터 먼저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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