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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타고난 연기자 조재현

글·구희언 기자 | 사진·연극열전 제공

2013. 12. 17

연극의 메카 대학로에서 나고 자란 소년은 동네에 제 자신의 얼굴이 인쇄된 포스터가 붙는 날을 꿈꿨다. 꿈을 이룬 소년은 어느덧 중년이 됐고, 또 다른 꿈을 고향에 세웠다.

타고난 연기자 조재현
MBC 주말드라마 ‘스캔들: 매우 충격적이고 부도덕한 사건’(이하 ‘스캔들’)이 종영했다는 소식에 한동안 배우 조재현(48)의 모습을 보기 어려울 줄 알았다. 절절한 부성애를 보여주고 죽음을 맞은 마지막 장면을 보며 저 정도로 에너지를 소진했다면 재충전 시간이 필요하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쉬는 대신 서울 종로구 대학로로 돌아왔다. 배우 겸 제작사 대표로 말이다. 11월 29일부터 대학로문화공간 필링1관에서 올리는 연극 ‘그와 그녀의 목요일’(작·연출 황재헌) 앙코르 공연에 출연하는 조재현은 연습이 한창이라 목이 잠겨 있었다.

지난해 11월 ‘연극열전4’의 다섯 번째 작품으로 초연한 연극 ‘그와 그녀의 목요일’은 전국 13개 지역에서 6만여 명의 관객을 만났다. 친구와 연인 사이를 오가는 50대 남녀가 매주 목요일마다 나누는 대화 내용인 사랑과 이별, 애정과 증오, 갈등과 화해를 통해 남녀의 본질적 차이와 인생을 말하는 작품이다. 초연에 이은 이번 앙코르 공연에서 역사학자 정민 역을 맡은 그는 은퇴한 여기자 연옥을 만나면서 자신의 삶과 사랑을 무게감 있게 반추하는 중년을 연기한다.

여러 우물 파도 믿음직한 이유

얼마 전 결혼 25주년을 맞아 아내와 7박 8일간 미국 여행을 다녀온 게 휴식의 전부인 그는 KBS 드라마 ‘정도전’, 영화 ‘역린’ 촬영까지 병행하며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올 한 해 김기덕 감독의 영화 ‘뫼비우스’부터 드라마 ‘스캔들’까지 쉼 없이 연기해온 그는 “솔직히 무리한 일정이지만 이 공연은 다시 하고 싶었다”고 했다.

“한 우물만 깊이 파야 할 텐데 너무 여러 우물을 파고 있죠(웃음). 아시겠지만 창작극이 쉽게 만들어지지도 않고, 만들고 나서 대중에게 사랑받는 건 더 어려워요. 꾸준히 사랑받는 창작극은 5∼10년에 하나 나올까 말까죠. 지난해 이 작품을 만나고 정말 잘 만들어진 창작극이라고 생각했어요. 앞서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서 공연했는데, 극장 개관 사상 가장 많은 관객이 찾았다고 하더군요. 50대 남녀 이야기지만 작품을 쓴 작가도, 연기자도 그들보다 젊어서 오히려 20∼30대 정서에 맞는 작품이라 생각했어요.”



타고난 연기자 조재현
이번 시즌에는 박철민과 정은표가 정민 역으로 합류했다. 배우에 따라 극 전체의 인상이 바뀌는 게 연극의 묘미지만 조재현과 박철민, 정은표가 같은 역이라니 극의 장르가 너무 달라 보인다. “너무 조재현을 돋보이게 하려는 캐스팅 아니냐”고 하자 그는 “정확하게 찍으셨는데”라며 웃었다.

“지난해 재미와 감동이 있고 짜임새도 갖춘 극이라는 평을 받았지만 ‘냉정히 말해 조금 더 재밌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도 들었어요. ‘재미’는 여주인공 연옥보다는 정민에게 기댈 수밖에 없는 부분이라 박철민과 정은표 씨가 캐스팅됐죠. 처음 연출자가 정민에 가장 적합한 배우라고 생각한 사람이 정은표 씨였대요. 왜냐하면 콤플렉스가 있고, 누가 봐도 귀엽잖아요. 전 귀엽진 않잖아요, 멋있지(웃음). 세 명의 정민이 정말 큰 차이가 있을 것 같아 기대돼요.”

출연진 리스트를 찬찬히 살펴보는데 눈에 띄는 이름이 있었다. 조혜정. 연기자를 꿈꾼다던 그의 딸이었다. 조재현은 “아직 출연은 확정되지 않았고, 지금은 소품실에서 부지런히 배우는 중”이라고 했다.

“딸이 제게 감정을 잘 표현하는 편은 아닌데, 한번은 ‘공연장에 제일 먼저 출근했다 마지막에 퇴근한다’고 하기에 ‘네 역할이 그런 거다’라고 말해줬어요. 소품실에서 잘 보이면 아마 연출가가 연습할 기회를 주겠죠. 개인적으로, 배우의 자식이라 해서 그 후광을 업고 작품에 등장하는 건 반대예요. 만약 딸이 연기를 한다면 연극이나 독립영화부터 시작하면 좋겠어요. 저랑 같이 연기요? 아마 서로 어색해서 못할 것 같은데요.”

얼마 전에는 상무 빙상부 소속 쇼트트랙 선수인 아들 수훈 군이 쇼트트랙 전국대회에서 500m 은메달을 차지하기도 했다. “문경에 스케이트장이 없어 매일 대구까지 400km를 왕복하며 연습에 매진하는 아들과 팀원들이 안쓰럽다”는 그에게서 드라마 ‘스캔들’ 속 절절한 부성애를 보여주던 하명근이 보였다.

타고난 연기자 조재현

연극 ‘그와 그녀의 목요일’에서 정민 역을 맡은 조재현은 연옥 역의 유정아와 함께 중년의 삶과 사랑 이야기를 들려준다.

대학로는 드라마나 영화 제작자들이 ‘연기력이 보장된 신선한 마스크’ 발굴을 위해 즐겨 찾는 곳이다. 최근 ‘연기 좀 한다’는 소리 듣는 스타의 대부분이 대학로 소극장에서 걸음마를 뗐다. 수많은 아이를 품어 키운 대학로지만, 다 커서 엄마 품으로 돌아오는 배우는 많지 않다. 그래서 꾸준히 뚝심 있게 대학로를 찾는 조재현의 행보는 신선하다.

“연극을 두 달 공연한다고 치면 기획부터 연습까지 배우가 거의 5∼6개월 가까이 참여하지만, 금전적 대가는 드라마 한 회분 개런티 정도죠. 그것만 생각하면 답이 안 나오지만 저와의 약속 때문에 출연하게 됐어요. 연극은 영화나 드라마와 달리 벌거벗은 느낌을 줘요. 다시 나를 돌아보게 해주죠.”

그는 꾸준히 연극에 출연한 것은 물론이고 많은 스타를 대학로로 이끌기도 했다. 그는 “너무 많은 사람을 섭외해서인지 제 전화를 피하는 배우도 늘었다”며 웃었다.

“보통은 함께 작품을 했던 친구들을 섭외해요. ‘스캔들’에서 아들로 나온 김재원에게도 얼마전 술 한잔하면서 ‘연극 한번 하라’고 했더니, 자기도 기회 되면 해보고 싶다더라고요. 김규리, 조윤희 씨에게도 제안했죠. 강요하는 건 아니고요. 하하.”

한편 대학로의 흥행작이 저가의 코믹극에 국한되는 상황에 대해서는 우려를 표했다.

“물론 그런 극이 나쁘다는 건 아니에요. 그간 많은 스타가 연극에 출연했고, 그로 인해 연극 시장의 파이가 커지기를 기대했지만 쉽지 않더라고요. 대학로에는 재밌거나 진지한 작품, 저가부터 고가 작품까지 다양한 작품이 공존해야 하는데 이 역시도 쉽지 않아요. 보통 관객들이 대학교 1학년 때 저렴하고 웃긴 연극을 보고 ‘와, 재밌다. 연극은 이런 거구나’ 하고 정의 내려버리는데, 그게 무서운 거예요. 조금만 진지한 극을 보면 ‘저건 왜 비싸면서 재미도 없어’라고 생각하게 되죠. 그래서 다양한 극이 공존하지 못하고 있어요. 이게 대학로의 현실이죠.”

대학로서 나고 자라 공연장 세우기까지

흔히들 ‘마음의 고향’이라고 하지만 대학로는 실제 그의 고향이다. 어린 시절 동숭아트센터 뒤편에 산 조재현에게 동숭아트센터 앞길은 형과 뛰어놀던 놀이터였다. 연기를 시작하고 배우로서 대학로를 찾았을 때 ‘수많은 포스터 사이에서 내 얼굴을 보는 날이 올까’라고 기대를 품었던 청년은 기어이 그 꿈을 이루고야 만다. 어느덧 희끗희끗한 중년이 된 그는 최근 고향에서 또 하나의 꿈을 이뤘다. 오랫동안 원했던 공연장을 세운 것이다.

극장 운영과 연극 제작을 겸할 곳의 이름은 ‘수현재’. MBC 촬영감독이던 친형 고 조수현 씨와 자신의 이름을 합쳐서 지은 회사명이다. 어린 시절 형과 뛰놀던 자리에 세워진 6층짜리 건물에는 2백50∼4백 석 규모의 극장 3개가 들어서 내년 2월 개관을 앞두고 있다. 조재현은 이 극장에 대해 “옥상을 새롭게 꾸며 야외에서 맥주도 마시고 성인들이 와서 저렴하게 문화를 즐길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 것”이라며 “30∼50대 부부가 10만원으로 좋은 작품도 보고 식사도 즐기며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하루를 보낼 수 있는 문화 공간으로 만들고 싶다”고 했다.

“40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꿈이라기보다 실천하지 못한 작은 도전들을 놓치지 않으려고 해요. ‘하고 싶은데’라는 생각이 있어도 나이가 들면 ‘이 나이 먹어서 뭘 하나’ 단념하고 실천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죠. 큰 꿈은 없지만 작은 꿈을 실천하는 일이 저를 젊게 만들지 않나 싶어요.”

그는 매년 수현재에서 창작극을 올릴 생각이다. 김기덕 감독과 손을 잡고 예술영화 부흥에도 앞장서기로 했다.

“감독님이 국내에서는 작은 영화가 개봉관을 잡기 어려운 상황이니 공연장에서 영화를 상영하면 어떻겠냐고 하더라고요. 어차피 공연장은 낮에 비어 있으니까요. 그래서 3층을 수현재 시어터 겸 김기덕 시네마로 만들 생각이에요. 저녁 시간대에는 영화 상영이 어렵고, 의자가 영화관보다 불편하다는 단점이 있음에도 감독님이 해보고 싶다고 했죠. 수익은 별 기대 안 해요. 그저 장기적으로 관객이 예술영화를 찾을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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