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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모녀 해부학자 박경아 교수

팔방미인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끼’와 ‘능력’

글·구희언 기자 | 사진·조영철 기자

2013. 09. 13

지난 8월 세계여의사회 회장에 취임한 박경아 연세대 의대 해부학과 교수에겐 늘 따라다니는 꼬리표가 있다. 어머니와 같은 길을 걸은 ‘모녀 해부학자’라는 것. 하지만 그가 연극 ‘맹진사댁 경사’에서 이쁜이 역을 하고, 무대 위에서 부채춤까지 춘 끼 많은 아줌마라는 사실을 알고 나면 박 교수의 샘솟는 에너지가 어디에서 나오는지 궁금해진다.

모녀 해부학자 박경아 교수


학생들이 뽑는 ‘올해의 교수’ 상을 세 차례 수상한 박경아(63) 연세대 의과대학 해부학 교수의 별칭은 ‘학교 엄마’다. 평소 상담사를 자처해 학생들의 속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오랜 외국 생활로 한국식 수업 방식에 적응하지 못하는 학생에게는 멘토를 연결해주고, 학비와 생활비를 직접 벌어야 하는 형편이 어려운 학생에게는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 이처럼 교육자의 모범 같은 그에게 평생 따라다니는 꼬리표가 또 하나 있다. ‘모녀 해부학자’.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해부학자인 나복영(89) 고려대 명예교수가 그의 어머니다. 박 교수는 8월 초 한국에서 열린 제29차 세계여의사회 국제학술대회 폐막식에서 세계여의사회 회장으로 취임해 이젠 ‘의사 외교관’ 임무까지 맡게 됐다.
“처음 오는 사람은 해부학교실을 찾기 힘들어요. 장례식장 앞에 와서 전화주세요.”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 주차장 입구 옆 좁은 계단을 지나자 ‘해부학교실’이란 팻말이 보였다. 연구실 문에 ‘2006학년도 우수업적 교수상(교육 부문)’이라는 글씨가 쓰여 있었다. 문을 열자 잔뜩 쌓인 책더미 사이에서 박 교수가 얼굴을 내밀었다. “날씨가 더운데 시원한 것 좀 마시라”며 음료를 권하곤 활짝 웃었다. 그가 올해 회장에 취임한 세계여의사회는 여의사에 대한 편견과 차별이 심했던 1919년 여의사들이 함께 모여 영향력을 키우자는 취지로 설립한 단체다. 현재 90여 개국 여의사들이 가입해 있다. 여의사 간 교류 외에도 개발도상국에서의 의료 봉사와 구호 등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그는 2010년 독일에서 열린 세계여의사회 차기 회장 선거에서 만장일치로 당선돼 올해부터 활동하게 됐다. 임기는 3년이다.
“여의사들이 네트워크를 이룬다는 건 중요해요. 최근의 치료 동향은 이렇다, 이런 부분이 중요하다 같은 정보를 꾸준히 업데이트하는 건 모두에게 중요하니까요. 조손 가정의 아이들을 돕고 봉사 활동도 지속해서 하고 있어요. 성폭력 피해 지원 매뉴얼도 여의사회에서 만든 거예요.”
회장 임기 동안에는 가입국을 늘리고 지속적인 후원를 하는 게 목표라고.
“그동안 세계여의사회에 가입하지 못한 빈곤 국가를 돌아다니며 가입을 장려하는 트리거(trigger·방아쇠) 노릇을 할 거예요. 우리도 1956년 한국을 방문한 세계여의사회 회장이 가입을 권유한 덕분에 2년 후인 1958년 회원국이 될 수 있었거든요. 저는 회장이 되기 전부터 활동을 해왔는데, 동남아 국가들이 아직 가입하지 않았더라고요. 의료 취약 국가에서 진료 활동을 하고 백신을 나눠주는 등 의료 지원도 계속해야죠. 3년 전 한국여자의사회 회장을 맡고 있을 때 필리핀에 해외 봉사를 갔는데, 현지의 열악한 사정에 깜짝 놀라 설 연휴마다 찾아가기도 했죠.”

해부학자 모녀의 평행 이론

모녀 해부학자 박경아 교수

박경아 교수는 해부를 하다보면 인체의 신비와 오묘함에 놀란다고 했다.



박 교수의 남편 역시 의사(홍승길 고려대 명예교수)다. 명절 때마다 해외 봉사를 떠나는 아내를 어떻게 생각할까. 그는 “의사라 이해해주긴 하는데 같이 가는 회원들이 문제다. 제사 지내야 하는 회원들도 많고 해서 설 때는 피해야겠다 싶었다”며 “대신 회원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가 봉사의 즐거움을 맛볼 수 있도록 여름휴가를 이용할 생각”이라고 했다. 그는 “회장 임기 동안 가정 폭력과 성폭력 희생자를 도와주고 예방 교육을 하는 등 폭력과 싸울 것”임을 강조했다.
그의 인생은 어머니와 일정 부분 ‘평행 이론’처럼 닮았다. 어머니처럼 의사와 결혼했고, 어머니처럼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했다. 재학 기간 6년 내리 총장상을 받았을 만큼 공부에 재능이 있는 그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모녀 해부학자’ 앞에 ‘수석’이라는 수식어를 붙여야만 할 것 같았다. 또한 어머니는 한국여자의사회 3대 회장을, 딸인 박 교수는 25대 회장을 맡았다.
어머니 나 교수는 학창 시절 전쟁과 광복이라는 큰 사건을 모두 겪은 역사의 증인이다. 어린 시절부터 남을 가르치는 것을 좋아한 나 교수는 당시 여성이 갈 만한 학교가 그리 많지 않았기에 1942년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에 들어가 해부학에 입문했다. 1947년 서울여자의과대학(현 고려대 의대)을 수석으로 졸업함과 동시에 모교의 해부학교실 조교가 돼 1989년 정년퇴임 전까지 교수직을 역임했다. 나 교수가 재직 시절 해부학교실을 놀이터 삼아 드나들던 딸이 지금의 박 교수다. 박 교수에게 어떻게 어머니에 이어 해부학자가 될 생각을 했는지 묻자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재밌으니까요”라고 말했다.
“의대에 진학해서 공부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관심이 가더라고요. 당시 학교에 해부학 중에서도 신경해부학을 전공하는 사람이 없었어요. 앞으로 이 과목을 공부해 해부학 교수가 돼야겠다고 생각했죠. 적성이 맞으니까 결과도 그만큼 좋더라고요. 특별히 어머니께서 이 길을 강요하거나 만류하지는 않으셨어요. 순전히 재밌어서 제가 택했죠.”
‘해부학교실’은 굉장히 오랜 기간 공포물의 소재로 쓰였다. 시체를 다루기 때문이다. 해부하던 시신이 갑자기 벌떡 일어난다거나, 실습 중인 학생의 손을 붙잡고 늘어진다거나 하는 등의 괴담이 드라마나 소설에 심심찮게 등장했다. 지금은 해부학교실에서 실습할 일이 없지만 그는 “시신 해부가 무섭지 않느냐”는 물음에 “의대에 진학한 학생들은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를 하고 온다”며 담담한 표정이었다.
“해부학도 수업의 일부니까요. 물론 실습을 하다 보면 한 명 정도는 울면서 뛰어나가거나 기절하기도 해요. 저희 반에도 그런 학생이 있었죠. 그런 사람을 제외하면 다들 ‘죽은 자가 산 자를 가르친다’는 말처럼 경건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수업에 임하죠.”



모녀 해부학자 박경아 교수


결혼 후 우연한 기회에 어머니와 세례를 받고 천주교 신자가 된 그는 “해부학자 중 신을 부정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라고 했다. 해부하다 보면 인체의 신비와 오묘함에 놀라고, 조물주라는 존재가 없으면 불가능하겠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든다는 것이었다.
인터뷰하는 도중 연구실 벽에 걸린 드레스 차림의 박 교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2007년 의사협회 1백주년을 맞아 자선 패션쇼를 한 것”이라는 박 교수는 “여의사들도 여자라 그런지 무대에 선다니까 재밌어하더라”며 웃었다. 어머니인 나 교수도 ‘끼’가 많았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나 교수는 의학뿐 아니라 문학에도 뛰어난 자질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학생 연극이 활발했던 광복 직후에는 학내에서 연극의 주연 배우로 활약하기도 했다는 것. 박 교수에게 “어머니를 많이 닮았다”고 하자 그는 “저도 학내에서 연극 주연을 맡았다”고 말했다.
“연극 ‘맹진사댁 경사’에서 이쁜이 역을 했고 2001년 시드니에서 열린 세계여의사회 총회에서는 여의사 12명이 부채춤을 선보이기도 했죠. 그런 끼는 어머니에게 물려받았나 봐요(웃음).”
여의사들을 대상으로 강의할 때마다 그는 근무 시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다양한 노하우를 알려준다. 늦둥이 딸 하나를 둔 박 교수는 “야단치고 소리 지르는 것도 소용없더라”라며 “딸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조언을 많이 하는 편”이라고 했다. 워킹 맘에게는 “시간 날 때 아이와 드라이브를 가보라”고 조언했다.
“아이가 등·하교할 때 기꺼이 동행해보세요. 차 안에서 긴장이 풀어진 아이들이 부모에게 속 이야기를 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오가는 시간에 아이와 대화하며 유대감을 형성하는 게 중요하죠. 지금도 시간이 나면 대학생인 딸을 학교에 데려다주며 이야기를 나눠요.”
그렇다면 박 교수와 어머니의 관계는 어떨까. 어머니 나 교수는 결혼한 지 15개월 만에 6·25전쟁으로 남편이 납북된 뒤 홀로 딸을 키웠다. 그 경험이 나 교수를 강한 엄마로 만들었음은 물론이다. 원칙주의자에 ‘면도칼’이란 별명이 붙을 정도로 카리스마 넘치는 교수였던 나 교수는 딸이 자기 수업을 들을 때도 집에 수업 자료를 들고 가지 않을 정도로 공사 구분이 확실했다. 박 교수는 1985년 시아버지가 먼저 세상을 떠나고 홀로된 시어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친정어머니와 한집에 모시고 살았다.
“친정어머니와 시어머니를 함께 모시고 사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거든요. 그래서 갈등이 생기지 않도록 무조건 절대 복종했어요(웃음). 어떤 경우에도 두 어머니들께 대들지 않고 무조건 의사를 존중했죠. 그게 집안의 규칙이에요. 그 덕에 2006년 시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집에서 큰 소리 한번 난 적이 없었어요. 남편의 배려가 컸죠. 늘 고마움을 느껴요.”

워킹맘에게 필요한 건 긍정 에너지
시종일관 밝던 그는 지금도 배우고 싶은 게 많다고 했다. 플루트도 다시 제대로 배우고, 수영도 배울 거라고 했다. 영화와 드라마를 좋아하지만 영화관에 갈 시간이 없어 못 보기에 그는 은퇴 후 몰아서 볼 요량으로 영화 DVD를 꾸준히 모으고 있다. “매사 긍정적인 것 같다”고 하자 “주변에서 많이들 그러더라”고 답했다.
“어지간한 일에는 짜증을 내지 않아요. 어머니랑 TV를 보다 보면 광고가 나오잖아요. 어머니께서 ‘광고가 왜 이렇게 많이 나오냐’ 하면 저는 ‘광고도 하나하나 머리 써서 만든 거라 자세히 보면 재밌어요’ 하고 웃죠. 어머니께서 ‘넌 어떻게 그렇게 긍정적일 수가 있니?’라며 혀를 차시더라고요(웃음). 그런 식으로 사물과 현상을 받아들이니 생각보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지 않아요. 편안하게 사는 편이죠.”
그는 “모든 사람이 인생을 긍정적으로 봤으면 좋겠다”고 했다.
“무슨 일이 닥치면 절망하지 말고 묵묵히 받아들이다 보면 전화위복이 될 경우가 있어요. 이번에 세계여의사회 행사를 치르면서도 몇 차례나 느꼈죠. 한번은 임원들이 회의를 마친 뒤 저녁 식사를 해야 하는데 깜빡 잊고 예약을 해놓지 않았어요. 급하게 한 식당에 전화를 걸었더니 딱 그 인원이 들어갈 수 있는 방이 비어 있다는 거예요. 허겁지겁 그곳으로 갔는데 분위기도 좋고 음식도 맛있어서 모두 만족했어요. 정말 감사했죠. 어머니들에겐 여유가 된다면 아이와 봉사 활동을 하는 걸 추천하고 싶어요. 끊임없이 공부하고 봉사하는 걸 보여주면 아이가 저절로 배우게 돼 있어요. 공부하라고 옆에서 잔소리하는 것보다는 몸으로 보여주는 게 더 빨라요.”
여의사도 가운을 벗으면 어린이집에서 아이를 데려오고 밀린 집안일을 하는 평범한 엄마다. 박 교수가 그렇듯 말이다.
“여의사들의 삶을 들여다보면 해내야 할 역할이 너무 많아서 슈퍼 우먼이 아니면 불가능하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강의할 때도 ‘우리는 떨어뜨리면 깨져서 복구할 수 없는 다섯 개의 공을 저글링 하며 산다’고 말하는데, 삶에서 균형을 이루려면 스트레스를 관리하는 게 중요해요. 열심히 살되 쌓인 건 현명하게 풀어야죠. 힘들 때는 선배들에게 조언을 구하세요. 선배들은 먼저 그런 일을 겪은 사람들이니 해답을 가지고 있을 거예요.”
모녀 해부학자 박경아 교수

1 세계여의사회 제30대 회장에 취임한 박경아 교수. 2 2007년 의사협회 1백주년 기념 자선 패션쇼에 선 모습. 3 한국여자의사회 제55차 정기총회에서 어머니인 나복영 전 한국여자의사회 회장으로부터 창립발기인 공로장을 받는 박경아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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