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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인생 사용설명서 열네 번째 | 가슴 뛰는 선물

“꽃다발은 하루를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10분의 예술”

플로리스트 조은영이 보내온 크리스마스 선물

글 | 권이지 기자 사진 | 지호영 기자

2012. 12. 17

조은영 씨가 런던에서 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영화배우 조니 뎁에게 전해질 꽃다발을 만들게 됐다. 스타에게 자신이 만든 꽃다발을 보낸다는 사실만으로도 잔뜩 흥분한 그는 숍 매니저인 리사에게 물었다. “리사, 이 꽃다발 조니 뎁한테 배달되는 건데 꽃을 조금 더 넣어도 될까?” 리사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조조, 네 마음은 잘 알지만 예산 안에서 멋지게 만들어. 그게 플로리스트로서 너의 능력이야.”

“꽃다발은 하루를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10분의 예술”


손님이 두근대는 마음으로 꽃집에 들어선다. 받는 사람이 이 꽃을 좋아할까, 이런 향을 좋아할까 망설인다. 긴장감이 감돈다. 어떤 꽃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는 조용히 경청한 뒤 이 꽃 저 꽃을 한데 묶어 풍성한 향이 감도는 꽃다발을 만들어 손님에게 안긴다. 손님은 이 꽃다발을 받을 사람의 얼굴을 떠올리며 미소를 머금고 문을 나선다. 뒷모습을 바라보며 빙긋 웃는 그는 두 사람의 마음을 동시에 헤아려 전하는 사람, 즉 플로리스트다. 플로리스트는 꽃다발이나 꽃바구니를 만들고 윈도 디스플레이, 웨딩 등 이벤트 디스플레이까지 담당한다. 꽃을 재료로 한 아티스트, 이들을 플라워 아트 디자이너라고도 한다. 조은영(38) 씨, 영어 이름 ‘조조’로 더 알려진 그가 하는 일이 바로 플라워 아트다.
그는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했지만 책상에 앉아 일하는 것보다 손으로 이것저것 만들고 장식하는 데 더 끌렸다. 특수분장 메이크업 아티스트, 푸드 스타일리스트, 무대 디자이너, 인테리어 스타일리스트 등 그가 관심을 갖고 기웃거린 분야는 한결같이 창의력과 손의 감각을 필요로 했다. 하지만 정작 그의 첫 직장은 사무직이었다. 일단 돈을 벌면서 정말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다시 고민했고, 푸드 스타일리스트로 가닥을 잡는 순간 꽃과 사랑에 빠졌다.
“푸드 스타일리스트가 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아 꽃 공부를 시작했는데 플로리스트가 더 맞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무엇보다 결과가 빠르다는 점이 좋았죠. 꽃을 재료로 무언가를 만들어 선물하면 그것이 좋은지 아닌지, 상대방이 감동을 받는지, 그냥 그런지에 대한 피드백을 단 몇초 안에 얼굴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잖아요. 또 플로리스트란 직업은 장례식을 빼고는 대부분 사람들을 기쁘고 행복하게 해주는 일이라는 점도 좋았어요. 물론 런던에서 이런 환상은 무참히 깨졌지만요.”
플로리스트라는 직업에 꽂히자 그때부터 그는 악착같이 돈을 모아 2천만원을 손에 쥐고 영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4개월의 어학연수를 거쳐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플라워 스쿨인 콘스탄스 스프라이(Constance Spry)의 플로리스트리(floristry) 과정에 등록했다. 하지만 졸업 후에도 막막하기는 마찬가지. 더듬거리는 영어로 런던에서 유명하다는 꽃집은 다 찾아다니며 인턴십 자리를 구했고, 상대의 표정만 봐도 거절인지 알 정도가 됐을 즈음 영국에서 가장 오래된 왕실 보증 꽃집 모이세 스티븐스에서 일하게 됐다. 그로부터 8년, 플로리스트 ‘조조’는 영국 찰스 왕세자의 퍼스널 플라워, ‘배니티 페어’ 매거진의 파티 플라워, 요르단 왕비의 런던 하우스 플라워를 담당하는 실력자가 됐다. 2010년 영국 생활을 정리하고 귀국할 때 그의 최종 직함은 한국인 최초의 맥퀸즈(런던의 유명 플라워 숍) 총괄 매니저였다.

“꽃다발은 하루를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10분의 예술”

‘꽃 향기가 맴도는 전쟁터’. 완성품은 아름답지만 그 과정은 놀라울 정도로 치열하다.



돈으로 따질 수 없는 마음을 선물하는 행복
현재 그는 서울 신사동에 ‘인스파이어드 바이 조조(Inspired by JOJO)’라는 숍을 열고 작품 활동과 강의를 병행하고 있다. 얼마 전에는 영국에서 플로리스트로 활약한 10년 세월을 소개한 ‘런던의 플로리스트(시공사)’라는 책을 펴내기도 했다.
가로수길 골목 안쪽 지하에 위치한 그의 숍 안은 푸릇푸릇 촉촉한 풀 향기가 가득했다. 그가 영국에서 쌓은 커리어를 포기하고 한국으로 돌아온 이유가 궁금했다. 그는 자신의 책에서 “런던에서 플로리스트로서 나의 삶은 내가 땀 흘린 만큼 다른 이들의 행복한 순간을 더 빛낼 수 있음을 배우는 시간이었다”고 말했다. 이제 장소가 한국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맥퀸즈에서 파는 제일 작은 꽃다발의 가격이 45파운드(약 8만원)였어요. 그 돈이면 뮤지컬 한 편을 볼 수 있고, 영국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톱숍’에 가서 중저가 옷 한 벌을 살 수 있고, 고급 슈퍼마켓에 가서 일주일 치 음식을 것을 장만할 수도 있죠. 그런데도 그들은 입고 먹는 것 대신 꽃을 사요. 물론 맥퀸즈같이 비싼 꽃다발은 특별한 날에만 주문하고, 보통은 슈퍼마켓에서 꽃을 사죠. 특별한 날이 아닌, 하루하루가 특별한 날이 되도록 해주는 꽃 문화가 한국에도 꽃피면 좋겠어요. 집에 들어섰는데 예쁜 꽃이 나를 반기고 있으면 왠지 얼굴에 웃음이 피잖아요.”
많은 사람들이 비싼 선물에 감동하고, 당장 요긴한 선물에 감사한다. 하지만 꽃 선물은 애물단지다. 받는 순간은 반기지만 내심 실속 없는 물건으로 취급한다. ‘차라리 먹는 게 낫지’ 싶어 한다. 그래서 꽃과 캔디는 크리스마스 때마다 ‘받고 싶지 않은 선물’ 상위권에 오른다. 그러나 조은영 씨가 들려주는 꽃 선물의 의미를 듣고 나면 생각이 달라진다. 그는 꽃 선물이란 ‘주는 사람의 마음을 전하고, 받는 사람이 이를 기뻐하는 모습을 상상해 두 손으로 다양한 꽃과 식물을 이용해 형상화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가격대에 맞는 꽃다발을 구매하는 한국과 달리 영국에서는 꽃을 선물할 때 플로리스트가 가장 먼저 누구에게 줄 건지, 어떤 일로 선물하는지, 받는 이가 스타일리시한가 러블리한가, 어떤 색상을 좋아하는가 등등 취향을 꼼꼼히 체크해요. 그러면서 머릿속으로 받는 사람의 이미지를 그려나가죠. 그리고 마지막으로 예산을 물어봐요. 이제 마음에 쏙 드는 꽃을 선물하는 것은 오롯이 플로리스트에 달린 일이죠.”
이 꽃 저 꽃 돌아다니며 몸에 꽃가루를 묻혀 열매 맺게 돕는 벌처럼 다양한 의미가 담긴 꽃을 여러 사람에게 전하는 플로리스트. 남을 위한 선물을 만드는 사람인지라 그가 갖고 싶은 선물은 무엇인지 궁금했다. 그는 “받고 싶은 것은 많지만 그중에서도 자신을 위해 많은 고민을 해서 한 선물을 받고 싶고, 반전이 있고 재미까지 더해진다면 더욱 좋겠다”고.
“얼마 전 남자 고객이 여자 친구에게 줄 선물을 고르러 오셨어요. 그런데 여자 친구의 직업이 저랑 같대요. 플로리스트가 플로리스트를 위해 꽃을 준비하게 된 거죠(웃음). 생각해보면 제가 꽃 선물 받을 일이 없잖아요. 남자 고객도 고민 끝에 생각해낸 선물이라고 하더군요. 그를 위해 꽃다발을 만들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플로리스트인 내게 장미 한 송이라도 용감하게 줄 수 있는, 그처럼 반전 있는 선물을 받고 싶다’라고요. 아마 제가 만든 꽃다발을 받은 플로리스트도 저와 같은 마음으로 남자 친구의 선물을 받지 않았을까요?”

참고도서 | 런던의 플로리스트(시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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