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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안 탱크 최경주의 인생 레슨

“장갑을 벗을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마지막까지 알 수 없는 것이 인생이다”

글 | 김명희 기자 사진 | 현일수 기자 동아일보 사진DB파트, 연합뉴스 제공

입력 2012.11.16 10:52:00

“신이 타이거 우즈를 선택했다면 최경주는 신을 감동시켰다”는 말이 있다. 골프의 ‘골’자도 모르던 완도 섬 소년 최경주는 성실과 끈기로 미국 PGA투어 한국인 1호 골퍼가 됐고 그 이후 8승이라는 대기록을 달성했다. 그가 처음으로 털어놓는 드라마 같은 인생 이야기, 아내와 2남1녀를 둔 가장으로서의 면모는 탱크라는 별명이 무색할 정도로 구수하고 정겨웠다.
코리안 탱크 최경주의 인생 레슨


최경주(42)는 1년 내내 필드를 누비는 사람답게 피부가 까맣고 눈빛이 매서웠다. 다부진 체격 때문인지 생각보다 키(172cm)가 작아 보였다. ‘작은 고추가 맵다’지만 한때 그 문제는 최경주에게 적지 않은 콤플렉스였다. PGA 진출 초반에는 비제이 싱, 타이거 우즈, 어니 엘스처럼 2m에 가까운 장신 선수들이 호쾌한 샷을 날리는 걸 보고 ‘큰 키에서 힘이 나오는구나’ 싶어 키를 늘리는 수술을 받으려고 상담까지 받은 적이 있다고 고백했다.
“키가 작다 보니 러프에 들어간 공을 쳐내는 것도 훨씬 불리했고, 그들이 긴 다리로 한 걸음 성큼 걷는 동안 저는 최소한 반 걸음 더 걸어야 했기 때문에 체력 소모가 그만큼 컸죠. 키를 늘릴 수 있는 방법을 알아보다가 독일의 한 전문 병원에서 상담까지 받았어요. 다리뼈를 자른 다음에 핀을 여러 개 박은 뒤 외부에서 고정한 채 하루에 1mm씩 서서히 늘리면 된다고 하더군요. 10cm 정도 늘리려면 3년 동안 골프도 못하고 꼼짝없이 누워 있어야 한다는 계산이 나오더라고요. 결국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골프를 잘할 수 있다면 뭐든 하고 싶었어요.”
무쇠처럼 단단할 것만 같은 최경주에게도 그런 인간적인 고민이 있었나 싶다. 하지만 알고 보면 최경주의 인생은 끝없이 콤플렉스를 극복해가는 과정이었다. 그의 라이벌 타이거 우즈는 두 살 때부터 골프채를 휘두른 신동이었고, 최경주는 열여섯 살에 ‘골프’라는 말을 처음 들어본 늦깎이였다. 우즈는 운동선수 출신인 아버지로부터 체계적인 훈련을 받았지만 그는 농부이자 어부였던 아버지를 도와 산과 바다를 뛰어다녔다. 우즈는 골프를 즐기는 문화 속에서 찬사와 격려를 받으며 운동을 했지만 최경주는 골프가 대중화되지 않은 환경에서 가난, 무명의 설움과 싸우며 운동을 해야 했다. 그가 가진 오직 한 가지 재능은 노력이었다. ‘이 정도면 됐어’ 하고 스스로 안주하지 않는 것, 모자란 것을 알면서도 자신과 타협하지 않는 것, 이것이 바로 그를 세계적인 프로 골퍼로 만든 힘이다.

완도 촌놈 7번 아이언 잡고 140m 날리다
최경주의 부모는 전남 완도에서 미역 양식과 농사를 지었다. “경주야, 물 보러 가거라이.” 어린 시절 최경주는 학교가 끝나면 고무 대야를 허리에 매고 갯벌에 나가 그물에 걸린 물고기를 걷어오는 게 일이었다. 밀물이 들어오면 갯벌이 금방 잠기기 때문에 물때가 오기 전에 서둘러 나오지 않으면 위험했다. 물고기를 가득 담아 50kg이 넘는 대야를 허리에 동여맨 채 1km 정도 거리를 재빨리 빠져나와야 했다. 안 그러면 미끈미끈한 뻘이 대야 바닥에 착 달라붙어 옴짝달싹 못하게 된다. “밭에 거둬놓은 콩도 챙겨오니라.” “소여물도 베와야 한다~.” 물고기를 걷어 온 뒤에도 아버지의 주문은 쉴 새 없이 이어졌다. 가난한 집 장남은 할 일이 많았다. “아따 숨 좀 쉽시다~” 하면서도 어느 새 그의 발은 대문을 향하고 있었다.
“그렇게 갯벌과 들판을 누비다 보면 허벅지와 종아리가 뻐근해졌죠. 골퍼는 하체가 중요한데 그때 허벅지와 장딴지가 많이 단련되지 않았나 싶어요.”
중학교에 입학해서는 등록금을 면제받을 수 있는 역도부에 들어갔다. 일단 역도를 시작한 만큼 큰 대회에 나가서 메달을 따고 싶은 욕심은 굴뚝같았지만 다리가 짧고 팔이 긴 체형이라 연습을 많이 해도 생각만큼 실력이 늘지 않았다. 점차 후배들에게 밀리기 시작하더니 나중에는 후보 선수가 됐다. 결국 3학년 때 역도를 그만뒀다.
“운동을 그만두고 처음으로 영어 수업에 들어갔는데, 교과서를 펴는 순간 앞이 캄캄하더라고요(웃음). ‘역시 공부는 내 길이 아니다. 뭘 하든 운동으로 승부를 걸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기회는 뜻밖의 곳에서 찾아왔다. 1988년 완도수산고에 입학한 첫날 선생님은 ‘역도를 해봤거나 하고 싶은 사람은 앞으로 나오라’고 했다. 선생님은 앞으로 나온 아이들을 두 그룹으로 나누더니 한 그룹의 아이들에게는 역도를, 다른 한 그룹의 아이들에게는 골프를 하라고 했다. 최경주가 처음으로 ‘골프’라는 단어를 접한 순간이다. 이날부터 ‘꿩 사육장’처럼 생긴 연습장에서 연습을 시작했다. 그물망까지 볼을 치는 사람은 ‘볼 정리 열외’라는 말에 귀가 번쩍 뜨인 그는 야구 방망이를 휘두르듯 생애 첫 티샷을 날렸다. 볼은 그물망을 훌쩍 넘었다.
“홈런을 쳤을 때보다 열 배 더 좋았어요. 파란 하늘 위로 하얀 공이 포물선처럼 날아가는 모습이 눈에 사진처럼 찍히더군요. 뭐라 설명할 수 없을 만큼 가슴이 벅차오르더니 곧 불붙듯이 뜨거워졌죠.”
공은 그물망을 넘어 멀리 공동묘지까지 날아갔고, 최경주 혼자 연습에서 열외를 받았다. 최경주는 나중에야 자신이 그날 처음 쥔 골프채가 7번 아이언이었으며 공이 날아간 거리가 140m 정도 된다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코리안 탱크 최경주의 인생 레슨


하지만 재능에 비해 환경이 뒷받침되지 않았다. 그는 제대로 된 레슨도 받지 못한 채 폐타이어를 땅에 파묻어놓고 쇠파이프로 때리며 스윙 연습을 했다. 완도 옆 신지도에 있는 명사십리해수욕장에서 연습하며 바람과 벙커에 익숙해졌다. 완도에 단 하나 있던 골프 연습장의 사장은 최경주의 재능을 알아보고 지역 유지들이 라운딩을 나갈 때 그를 데리고 가게끔 설득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그린피를 벌기 위해 연습장 손님 차를 세차하고 잔심부름을 했다. 그러다 한서고등학교 김재천 이사장에게 발탁돼 서울로 골프 유학을 오게 됐다.
“유학 올 때 완도수산고에서 허락을 해주지 않는 바람에 우여곡절이 많았죠. 제가 뜻을 굽히지 않자 어느 날 아버지께서 장롱에서 뭔가 꺼내더니 밖으로 나가시더라고요. 나중에 들으니 소 판 돈으로 선생님들께 양복을 선물했다고 하시는데, 정작 아버지께서는 지금까지 그 일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안 하셨어요.”



코리안 탱크 최경주의 인생 레슨

1 2007년 최경주 선수가 체육훈장 청룡장을 받기 위해 가족과 함께 청와대 본관으로 들어가는 모습. 왼쪽부터 아내 김현정 씨. 막내 강준, 둘째 신영, 첫째 호준, 최 선수. 2 2008년 오거스타GC에서 열린 마스터스 대회 파3 콘테스트에서 첫째 호준이와 함께한 모습.



함께 고속버스를 타고 서울로 올라온 아버지는 아들이 지내게 될 숙소를 둘러본 뒤 ‘밥 잘 챙겨 먹고 아프지 말라’는 말 외에는 아무런 당부도 하지 않았다.
“장남이 가업을 잇지 않고 골프 한다고 난리를 치는 게 괘씸했을 법도 하셨을 텐데, 섭섭하다는 말씀 한마디 안 하시니까 더 짠하더라고요. 아버지의 크고 넓은 어깨가 그날따라 더 좁아 보이기도 하고…, 그 모습을 보면서 앞으로 1분 1초도 허투루 살지 않겠다고 다짐했죠.”
서울 생활은 생각만큼 녹록지 않았다. 금방 할 수 있을 것 같던 우승의 기회는 좀처럼 찾아오지 않았다. 그렇게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완도 촌놈 최경주는 서울에 온 뒤 “63빌딩을 10층까지 보는 것은 무료지만 그 이상은 돈을 내야 한다”는 친구들의 놀림에 9층까지만 보고 눈을 내리깔았을 정도로 순진했다. 군 복무를 마치고 연습생으로 있던 시절 알고 지내던 목사가 서울 문화를 익히는 데 도움을 받으라며 단국대 법대에 다니던 여대생을 소개시켜줬다. 지금의 아내인 김현정 씨다.
“아담한 키에 웃는 모습이 마음에 들었죠. 몇 번 만나보니 결혼해도 좋을 여자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나보다 공부를 많이 한 착한 서울 여자’를 만나면 결혼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내조의 여왕’ 아내와의 운명적 만남
결혼 결심은 1993년 프로 입단 테스트를 받던 마지막 날에 했다. 3홀인가 남았을 때 언덕 위에 꽃다발을 안고 서 있는 김씨가 보였다. 대학 졸업을 앞둔 김씨는 이날 중요한 시험도 포기하고 최경주를 응원하러 왔다.
“‘그러다 졸업 못하는 거 아니냐’고 했더니 ‘이것도 중요하다’고 하더군요. 놀랍고 고마워서 정식으로 교제하자고 했더니 ‘교회에 같이 다니면’이라는 단서를 달더라고요(웃음). 우물쭈물하니까 ‘그럼 안 만나겠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일단 ‘그러마’ 약속부터 했죠.”
그렇게 1996년 아내와 결혼했다. 하지만 교회에 적응하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교회에 나가기는 하지만 독실한 신자는 아닌, 어정쩡한 시간이 계속됐다.
“어느 날 제가 자고 있는데 인기척이 느껴져서 깼더니 아내가 제 발을 잡고 기도를 하고 있라고요. ‘내가 뭔데 이 사람이 이렇게 나를 위해 진심으로 기도하나’ 싶은 게 좀 이상한 기분이 들더군요. 누워서 기도를 받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아 그다음부턴 앉았어요. 또 그다음엔 발보다 손이 낫겠다 싶어 손을 잡고 기도를 했죠. 그러면서 마음의 문이 열렸고, 본격적으로 공부를 해 세례를 받았죠.”
차범근, 선동렬 등 성공한 운동선수 가운데는 애처가가 많다. 이들의 공통점은 아내의 조언을 귀담아듣는다는 점. 최경주 역시 그렇다. 모든 일을 아내와 상의해서 결정한다. 아내는 그가 잘할 때는 겸손을, 경기가 잘 안 풀릴 때는 ‘잘할 수 있다’는 용기를 불어넣어준다. 최경주는 운동선수 중에서도 달변가로 소문이 났는데, 그는 “아내가 방송이나 신문 인터뷰도 모니터링해주는데 그 덕분에 말솜씨도 느는 것 같다”고 자랑을 했다. “내 인생에서 아내는 로또 같은 사람”이라고도 했다.
아내를 만나서 그의 골프 인생도 꽃을 피웠다. 1996년과 1997년 2년 연속 상금왕과 MVP를 차지한 데 이어 일본 무대에 진출해 1999년 기린 오픈, 우베코산 오픈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아내가 자신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는 걸 생각하면 힘이 난다고 했다.
“기린 오픈 연습 라운드 첫날 오전 좁은 침대에서 아들 호준이를 품에 안고 웅크린 채 잠든 아내를 보자 가슴이 뻐근해지면서 저도 모르게 기도가 나오더군요. 그 덕분인지 경기가 굉장히 잘 풀렸어요. 마지막 홀에서는 공에서 홀까지 마치 호미로 파놓은 것처럼 퍼팅 라인이 선명하게 보여서 그대로 치기만 하면 됐죠. 그때가 첫 해외 우승이었는데, 인터뷰를 하고 왔더니 아내가 큼직한 쇼핑백에 우승 상금을 현금으로 받아왔더라고요. 1억4천만원이나 되는 큰돈이었죠. 너무 좋으면 입이 안 다물어진다던데, 정말 그렇더라고요(웃음).”
일본에서 승승장구한 그는 그해 Q스쿨(Qualifying School : PGA에서 뛸 수 있는 자격을 획득하는 방법 중 하나로 2011년까지 시행됐다)에 합격, 한국인 최초로 PGA에 데뷔했다. 이후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2002년 컴팩클래식 우승을 시작으로, 2011년 메이저 대회인 플레이어스 챔피언십까지 8승을 올리며 한국을 대표하는 골프 선수로 활약하고 있다.
최경주는 슬하에 호준(14), 신영(10), 강준(8) 3남매를 두고 있다. 평소에는 아이들이 언론에 노출되는 걸 꺼리지만 1년에 단 한 번 오거스타 GC에서 열리는 마스터스 대회에는 항상 아이들을 대동한다. 이 대회 전날에는 파3 콘테스트라는 특별 이벤트가 있는데, 선수는 원하는 사람 누구든 인원 제한 없이 캐디로 동반할 수 있다. 보통 가족이나 애인을 초청하는데 최경주는 늘 아이들과 함께 그린에 오른다. 이날만큼은 아빠보다 아이들이 더 많은 플래시 세례를 받는다.

코리안 탱크 최경주의 인생 레슨

3 지난해 같은 대회에서 최경주가 딸 신영 양에게 퍼팅 지도를 하고 있다. 4 5 최경주가 마스터스 대회에 첫 출전했던 2003년에는 큰아들 호준이가 가족 대표로 파3 콘테스트에서 캐디백을 맸다. 지금은 아이들이 서로 가방을 매려고 경쟁을 벌인다고 한다. 6 강준이는 야구에도 관심이 많다. 지난 7월 SK와 LG 경기에서는 배트보이로 그라운드를 누비기도 했다.



“아이들과 그린 위를 걷는 기분도 좋지만, 아이들에게도 돈 주고 살 수 없는 소중한 경험이 될 것 같아서 항상 아이들과 함께하죠. 2003년 첫해에는 호준이 혼자 캐디를 맡았는데, 클럽에서 흰색 캐디 옷을 빌려 입혔더니 너무 커서 아이가 옷에 파묻히더라고요. 그래도 아빠와 골프를 치는 게 좋은지 마냥 싱글벙글 웃던 기억이 나네요. 이젠 둘째, 셋째도 제법 자라 서로 캐디를 하겠다며 다투기도 하는데, 그러면 나이순으로 호준이가 가방을 메고, 신영이가 타월을 들고, 막내 강준이는 물병을 들죠.”
아이들과 함께하는 ‘파3 콘테스트’만 생각하면 그 역시 운동회에 나가는 아이처럼 마음이 들뜬다. 사랑하는 가족 앞이기에 좋은 성적을 내고 싶은 욕심도 크다. 하지만 올해는 그만 컷 탈락을 해서 콘테스트에 참석하지 못했다. 학교에 결석계까지 냈던 호준이가 실망할 걸 생각하니 목덜미가 뻐근해졌다고 한다.
“그런데 오히려 아이들이 ‘아빠 괜찮아. 다음에 잘 하면 돼’ 하고 위로를 해주더라고요. 경기가 없을 땐 아이들과 스키와 낚시를 다니면서 확실하게 놀아주고, 연습이나 경기가 있을 땐 ‘아빠 직업은 골프 선수다. 좋은 성적을 내기 위해선 열심히 훈련해야 한다’고 알려줍니다. 그래서인지 아이들도 아빠의 일에 대한 이해도가 높고, 특히 큰 녀석은 요즘 골프가 얼마나 압박감이 많은 운동인지, 아빠가 얼마나 힘들지 헤아리고 공감해주는 것 같습니다.”

아이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가장 행복한 평범한 아빠
최경주는 최근 가족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 집에 머무는 동안은 오후 훈련을 접었다. 아이들이 학교에 갔다 돌아오면 함께 운동하고 저녁을 먹는다.
“부모와 자식은 얼굴 표정만으로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될 수 있으면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려고 노력하죠. 저 혼자 서울에 두고 내려가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짠했지만, 솔직히 그땐 아버지의 심정을 알지 못했습니다. 내 속도 모를 때인데 부모 마음을 어떻게 알았겠어요(웃음). 그런데 호준이가 중학교 갈 때가 되니까 불현듯 ‘그때 우리 아버지가 이런 마음이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열 일 제쳐두고 학교에 찾아가 선생님도 만나뵙고, 이것저것 챙겼죠. 부모가 모든 걸 해줄 순 없지만 사랑받고 있다는 확신을 갖게 하고, 대화를 통해 스스로 길을 찾을 수 있게끔 도와주는 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최경주는 최근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와 인간적인 모습을 담은 책 ‘코리안 탱크, 최경주’(비전과리더십)라는 책을 펴냈다. 인세 전액은 그가 2007년 설립한 최경주재단을 통해 골프아카데미를 포함한 복합 교육 문화시설 ‘꿈의 둥지’ 건립 기금으로 쓰일 예정이다. 그는 인터뷰를 마치며 자신을 성공이 아닌 노력의 아이콘으로 봐주면 좋겠다고 했다.
“제가 살아온 길을 돌아보면 바닥도 그런 바닥이 없었어요. 1999년 처음 미국에 진출했을 때는 한국에선 시기상조다, 잘되는지 두고 보자는 이야기도 많았고, 막상 미국에선 말도 안 통했고 Q스쿨에도 떨어지고… 참담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죠. 하지만 장갑을 벗기 전엔 절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요즘 젊은이들 쉽게 포기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지금 하는 거 포기하고 다른 걸 하면 잘될 것 같지만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자질과 실력은 만들어가는 것이지 타고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좋은 조건을 타고나도 연습하고 훈련하지 않으면 자기 것이 될 수 없고, 그럼 즐길 수가 없어요. 즐거운 인생은 꾸준한 연습과 훈련 뒤에 오는 겁니다.”

여성동아 2012년 11월 58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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