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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OLYMPIC BEHIND STORY

금메달로 인생 역전, 양학선 요술 비닐하우스에 가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늘 선하게 살아온 부모, 그 마음 헤아린 아들이 일궈낸 기적”

글 | 김명희 기자 사진 | 조영철 기자, 로이터AP연합 제공

2012. 09. 18

체조 선수 양학선은 런던행 비행기에 오르기 전 “금메달을 따서 비닐하우스에 사는 부모님께 번듯한 집을 지어드리고 싶다”고 했다. 거짓말처럼 그의 꿈은 현실이 됐다. 양 선수의 부모가 광주 달동네에서 비닐하우스를 전전하면서도 자식 농사만큼은 최고로 지어낸 비결은 무엇일까.

금메달로 인생 역전, 양학선 요술 비닐하우스에 가다


전북 고창군 공음면 석교리 남동마을, 올림픽 체조(도마) 금메달리스트 양학선(20·한체대) 선수의 집까지 가는 데 서울에서 승용차로 꼬박 4시간이 넘게 걸렸다. 양 선수가 금메달을 딴 지 이틀 뒤, 고창 톨게이트에 들어서자 곳곳에 양 선수의 금메달 획득을 축하하는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 그의 집 근처에 도착하자 마을 사람들이 취재 차량을 보며 단박에 “양학선 집은 저짝인디” 하며 집 쪽을 가리킨다. 동네 사람들이 일러주는 방향을 따라 도착한 마을회관엔 라면 박스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양 선수가 라면을 좋아한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라면 회사에서 득달같이 보내온 것이다. 양 선수 아버지 양관권(54) 씨는 마침 폭염을 피해 마을회관에서 이웃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잠시 후 양 선수 어머니 기숙향(43) 씨가 선물로 들어온 케이크며 음료수, 과일 등을 들고 마을회관으로 들어섰다. 기씨는 전날 취재진이 1백 명 이상 찾아오는 바람에 하루 종일 먹지도 자지도 못해 허리 디스크가 악화됐다며 읍내 병원으로 치료를 받으러 간다고 했다.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었던 아들의 결선 경기
양관권 씨는 아내를 병원에 보내고, 기자를 집으로 안내했다. 마을회관을 나서 풀숲과 논두렁을 지났다. 무성하게 자란 풀잎에 종아리가 따끔거릴 무렵, 검은 천을 덮은 비닐하우스 한 동이 눈에 들어왔다. 겉으로 보기엔 비닐하우스일망정 제법 큰 듯했지만, 들어가보니 생각보다 좁았다. 입구에는 양파, 고추 등 밭에서 수확한 채소들이 널려 있었고 조금 더 안쪽에 방이 있었다. 선뜻 남의 집 안방으로 밀고 들어가기 미안해 망설이는데 양 선수의 아버지가 불렀다.
“아따 구경 그만하고 어서 들어오소.”
방 안은 생각보다 시원했다. 더위도 더위지만 습도 때문에 에어컨을 켜놓지 않으면 살 수가 없다고 했다. 세간은 TV와 이불 몇 채가 전부였다. 방 한쪽을 막아서 쓰는 부엌에는 냉장고, 가스레인지와 주방 살림 몇 가지가 있었다. 이 집에서 가장 빛나는 곳은 양 선수의 사진과 상장, 트로피로 도배된 벽이었다.
“우리 학선이가 사진보다 인물이 더 나서(나아). 실제로는 눈이 훨씬 더 큰데, 사진만 찍으면 눈이 감겨버린당게. 이것은 광저우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 땄을 때인디, 그때도 ‘아버지 걱정 마소. 내가 다 (메달을) 휩쓸고 올랑게’ 그랬제.”
그런데 한쪽 벽면에 걸린 사진 5장은 전부 이상했다. 제대로 된 자세가 하나도 없었다. 양 선수의 자세 중 잘못된 것만 찍어서 걸어놓았단다.
“이것은 링이 한쪽으로 기울어서 감점, 이것도 링인데 십(十)자가 안 돼서 감점, 이것은 어깨가 벌어져서 감점, 저쪽은 목을 들어야 하는데 안 들어서 감점. 다 이유가 있어서 찍어놓은 것이여. 학선이가 보고 고치라고.”
하지만 양씨는 정작 아들의 올림픽 결선 경기 장면을 보지 못했다. 깨어 있어도 어차피 경기 장면을 눈 뜨고 보지 못할 게 뻔했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마음을 비우자는 심정으로 그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고 한다.
“TV에서 아나운서가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깨보니 학선이가 금메달을 땄더라고(웃음). 그래서 마을회관에 내려가봤더니 잔치가 벌어졌더구먼. 아무리 간이 큰 사람도 자기 자식 경기하는 장면은 못 봐. 착지하다가 넘어지는 놈, 부상 당하는 놈… 학선이는 부상당하지 않고 여기까지 와서 꿈을 이뤘으니 감사한 일이제.”

금메달로 인생 역전, 양학선 요술 비닐하우스에 가다


금메달로 인생 역전, 양학선 요술 비닐하우스에 가다

1 고된 환경에서도 자식 농사만큼은 끝내주게 잘 지은 양학선 선수의 부모 양관권·기숙향 씨. 2 옹색한 비닐하우스를 빛내는 양 선수의 사진과 트로피, 메달들.



아파트에 격려금까지, 학선이 이제 살맛 나겠다
양 선수가 어려운 환경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열심히 노력해 금메달을 땄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각계에서 후원이 답지했다. 광주의 건설업체 SM에서 아파트 한 채를 기부하겠다고 약속했고, 구본무 LG그룹 회장이 격려금 5억원을 내놓았다. 하지만 양 선수의 아버지는 의외로 담담했다.
“나는 ‘내 아들 장하다’ 그런 말도 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요. 우리가 해준 것도 없고, 지가 잘될라고 그란 것이제. 배고플 때 밥 한 그릇 제대로 사 먹여야 그런 말 할 자격도 있는 것인데, 나는 그것을 못했소. 학선이 앞으로 아파트를 준다고 하던데, 그것은 학선이 앞으로 해놓으면 될 것이고. 이제 ‘우리 학선이는 살맛 나겄다’ 하는 것이제, 우리는 덕 볼 일도 없소.”
병원 치료를 받고 돌아온 기숙향 씨는 올림픽 전에 꾼 꿈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여러 사람이 메달을 나눠 갖는데, 양학선 선수가 그중에서 가장 빛나는 금메달을 집어 들더니 ‘이것은 내 것이여’ 하면서 허리춤에 집어넣더라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아무 말 안 했는데, 그게 금메달 딸 꿈이었던 가봐요.”(기숙향)
그러고 보면 아들을 키우는 동안 희한하게 꿈이 딱딱 들어맞았다고 한다. 아들을 낳을 때는 연못의 물고기가 황금잉어가 돼 멀리 헤엄쳐가는 태몽을 꿨다고 한다. 양학선은 양관권 씨와 기숙향 씨의 두 아들 중 막내다. 관권 씨는 젊어서 건축 현장에서 미장일을 하고, 기숙향 씨는 공장에 나갔다. 부모가 모두 일을 나가면 양 선수는 두 살 위 형과 광주 달동네, 비좁은 골목을 누비며 놀았다. 양씨는 “다른 아이들이 뛰어다닐 때 학선이는 재주를 넘으며 다녔다”고 했다. 무뚝뚝한 형과 달리 양 선수는 딸처럼 애교 많고 살가운 아들이었다.
“형이 있으니까 둘째는 딸이었으면 했제. 학선이를 낳던 날, 내가 일을 나가는데 집사람이 ‘딸잉게 걱정 말고 다녀오세요’ 그러더라고. 같이 일하는 아줌마들한테도 ‘딸잉게 오늘은 내가 한턱 쏠게’ 했는데 시간 맞춰서 병원에 전화해보니 집사람이 울먹울먹하더라고. 그래서 ‘아들이구나’ 했제. 병원에 가니 애기가 요만해(손목에서 팔꿈치까지 짚어 보이며). 하도 작아서 내가 팔로 재봤지. 2.3kg이라고 하던데, 그보다 더 작았던 것 같아. 포대기에 쌌는데도 으스러질까봐 들지를 못하겠더라고. 지금도 크지는 않지만(160cm) 그때 생각허믄 많이 큰 것이여. 우리는 애기가 영 안 자랄 줄 알았구만.”
광주 달동네 단칸방에서 살던 시절, 일하러 간 부모가 온종일 집을 비우자 심심해진 형제는 다니던 광천초등학교 체조부에 들어갔다. 형 학진 씨가 4학년, 학선이 2학년 때였다.
“집에 있는 것보다 나을 것 같아서 하라고 했어. 그런데 생각보다 힘들더라고. 손목에 보호대를 하는데, 살이 하나도 없고 살갗이 다 까져서 애기가 만날 손을 뒤로 해서 숨기고 다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못하게 했더니 학교 코치랑 감독이 집으로 찾아와서 ‘학선이는 재능이 있으니 계속 시켜야 한다’고 무릎을 꿇고 사정을 하더구만. 그래서 계속 시키게 됐제. 감독님들이 고생이 많았제. 다른 아이들이랑 허는 것이 다르니까 항상 옆에서 지키고 있다가 받아주고….”
이렇게 체조를 시작한 양학선은 3년 만인 초등학교 5학년 때 소년체전 동메달을 땄다. 중·고등학교 때는 전국체육대회 등에서 상을 휩쓸다시피 했다.
“다른 친구들은 경기에 부모가 오는 걸 싫어했는데, 학선이는 우리한테 꼭 경기장에 오라고 하더만. 자신감이 있었다는 얘기제. 웬만한 경기에는 다 따라다녔지만, 한 번도 의자에 앉아서 본 적은 없어. 착지가 끝났을 즈음 고개를 들어 보면 항상 발이 앞으로 한 발짝 나가 있어. 이번처럼 정확하게 착지를 한 게 몇 번이 안 돼(웃음).”
양 선수가 이처럼 두각을 드러낸 데는 타고난 재능과 균형감각, 피나는 노력과 승부 근성이 큰 몫을 했다.
“학선이가 어릴 때부터 낚시를 엄청나게 좋아하는데, 한 번은 월척을 놓친 적이 있어. 고놈 잡을 때까지 낚시 가자고 얼마나 조르던지. ‘고놈 다른 사람이 벌써 잡아가부렀다’고 달래느라 혼났어. 고집이 얼마나 센지 경기장에서도 지 뜻대로 안 풀리면 폴짝폴짝 뛰고 어쩔 줄 몰러. 연습할 때도 온몸이 멍투성이가 돼 쉬라고 하면 ‘암씨랑토 안 혀. 하도 찍어분 게(넘어지니까) 아픈 줄도 몰러’ 그랬제.”



금메달로 인생 역전, 양학선 요술 비닐하우스에 가다


착한 부모 밑에서 자란 효자 아들
양 선수에게도 고비는 있었다. 사춘기 시절 고된 훈련과 가난에 쪼들리는 삶을 견디지 못해 가출까지 하며 방황했다. 그를 붙잡아준 건 아버지와 형이 몸으로 보여준 사랑, 어머니의 눈물, 그리고 광주체중 오상봉 감독의 정성이었다. 오 감독은 “키가 작고 탄력이 뛰어나니 도마에 승부를 걸어라. 네가 잘하는 특기로 홀로 서라”고 격려했다. 그때부터 양학선의 도마 실력은 급속도로 발전했다. 고1이 되자 양학선의 도마 기술은 성인 대표팀 선수들과 별 차이가 없어졌다.
지난해 도쿄 세계선수권대회에서는 구름판을 정면으로 밟은 뒤 3바퀴, 즉 1080도를 비튼 뒤 착지하는 난도 7.4의 기술 ‘양1’을 선보이며 세계 체조의 역사를 새로 썼다. 양 선수는 금메달을 딴 후 인터뷰를 하면서 “한국에 돌아가면 아버지, 형과 낚시를 하고 싶다”고 말했다. 어려운 환경에서 가족은 그만큼 그에게 든든한 울타리였다.
“어릴 때 학선이가 고집이 싱게(세서) 형인 학진이가 대신 나한테 혼이 많이 났제. 그래도 우리 학진이는 한 번도 동생 탓을 한 적이 없어. 그러니까 형제간에 우애가 좋을 수밖에 없지. 태릉에서도 휴가 나오면 형이 복무하는 군부대에 면회를 가곤 했당게. 그 부대에서도 유별난 형제라고 소문이 났다고 하더만. 학진이도 체조를 했는데 초등학교 때 위에 구멍이 날 정도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그만뒀어. 그러니 학선이가 금메달을 딴 게 더 자랑스럽고 짠할 것이여.”
양 선수는 자랄수록 실력이 향상됐지만 반대로 가세는 점점 기울었다. 미장일을 하던 관권 씨는 90년대 후반부터 동료들과 함께 건설업체에서 하청을 받아 공사를 했는데, 1998년 외환위기 때 건설 회사의 부도로 큰 위기를 맞았다.
“(공사판에서)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사람들이니까, 일한 돈을 떼이면 뭘 먹고 살 겄소. 그래서 우리 살던 집 전세금 빼서 돈을 나눠줬지. 그랬더니 기분은 하늘을 날 것처럼 가벼운데 아이들 데리고 갈 곳이 없더라고. 아는 사람이 ‘빈 집이 있는데 수리해서 살지 않겠느냐’고 해서 거기서 몇 년 살다가 여기 비닐하우스로 왔제. 그 후부터 우울증이 생겼어. 한번은 칼을 들고 큰일 날뻔 한 적도 있제. 약을 안 먹으면 나도 모르게 순식간에 그렇게 돼서 약을 꾸준히 먹어야 한다고 합디다.”
힘든 환경이었지만 양관권 씨는 자신보다 더 어려운 사람을 보면 그냥 넘어가지 못했다. 품삯을 받아 친구 집 쌀독 채워주고, 연탄 쟁여 주고 나면 자신의 집 쌀독은 비어 있기 일쑤였다. 아버지는 가난했지만 부끄럽게 살지는 않았다. 아이들에게도 거짓말하지 마라, 사기 치지 마라 등등 15가지 덕목을 주입식으로 외우게 했다. 양학선 형제는 지금도 이 15가지 덕목을 또렷하게 기억한다고 한다. 이런 부모 밑에서 자란 양 선수는 가난한 형편에도 늘 당당했다. 친구들을 스스럼없이 집에 데려오고, 대회에 나가 상금을 받으면 그 돈으로 친구들에게 밥을 샀다.
“지금까지 속을 한 번도 안 썩였어. 대학 다니면서도 부모가 돈을 줘야 하는데, 지가 우리한테 줬어. 한 2~3년 됐지. 집에 오면 형이랑 농사일 집안일 다 하고. 그렇게 한번씩 왔다가면 맘이 짠하고 허전해.”
양 선수의 부모는 이곳에서 콩과 고추 농사를 짓고, 칠면조·토끼 등을 키운다. 양 선수가 보내준 선수촌 월급을 꼬박꼬박 모아 비닐하우스 인근에 땅을 사두었다. 터는 이미 닦아 놓고, 곧 집을 짓기 시작할 것이라고 한다. 멋지게 이층집을 지을 테니 그때 다시 놀러오라는 인사도 잊지 않았다.
인터뷰를 마친 후 양학선의 아버지는 너무 힘들게 살아온 얘기는 빼고 아들에게 도움이 되는 이야기로 기사를 써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고는 비닐하우스 밖까지 나와 기자가 시야에서 벗어날 때까지 오래도록 손을 흔들며 배웅했다. 그는 아들을 위해 해준 게 아무것도 없어서 미안하다고 했지만, 최선을 다해 착하게 살아온 삶이야말로 아들을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로 키운 최고의 자양분이었을 것이다.
양학선 선수에게 궁금한 것 10가지

신체 사이즈 160cm, 51kg 신체 비밀 어깨가 좁아 공중 회전하는 데 유리하다. 어릴 적 꿈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후 대학교수가 되는 것. 학창시절 성적 초등학교 땐 상위권이라 부모가 운동하는 걸 반대했다. 승부 근성이 강해서 누가 시험 성적이 더 잘 나오나 친구와 내기를 하곤 했다. 좋아하는 음식 라면(한 번에 3개씩 먹는다), 김치찌개, 붕어찜, 칠면조 샤브샤브 즐겨 부르는 노래 노라조의 ‘형’ 징크스 없다. 큰 무대에서 오히려 강하다. 운동 외 취미 낚시 멘토로 삼고 있는 인물 중고등학교 시절 6년 동안 지도해 준 광주체육고등학교 오상봉 감독. 양 선수를 자식처럼 보살폈다. 마인드 컨트롤법 경기에 나가선 자기 차례가 올 때까지 음악을 들으며 마음을 가다듬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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