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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밭을 가꾸고 비로소 행복해졌습니다

독일인 주부 유디트의 좀 다른 시선

기획 | 한여진 기자 글 | 유디트

2012. 06. 07

꽃밭을 가꾸고 비로소 행복해졌습니다


요즘 내가 가장 즐기는 일은 집 앞에 있는 꽃밭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것이다. 봄에 심은 꽃이 얼마나 자랐는지 매일 확인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새싹이 나오는 것을 보면 가슴이 뛴다. 올해 처음 심은 꽃이 어떤 모양일지 상상하다 드디어 싹이 나면 신기하고 기쁘다. 새로운 꽃은 모두 잘 자랄까? 어떤 모양이고 색일까?

지난겨울 집 밖에 눈이 쌓였을 때, 나는 집 안에 머물면서 봄에 만들 꽃밭에 대해 꿈꿨다. 꽃가게에서 받아온 카탈로그를 꼼꼼히 보며 심을 꽃을 결정하고, 꽃에 관한 정보도 모으면서 꽃밭 계획을 꼼꼼하게 세웠다. 꿈에서 본 나의 꽃밭은 참 예쁘고 매혹적이었다. 추운 겨울날 내 머릿속에는 전 세계의 예쁜 꽃이 가득한 꽃밭이 펼쳐지곤 했다.

드디어 봄이 됐다. 날씨가 조금 따뜻해졌을 때, 나는 서둘러 꽃을 주문했다. 택배가 도착한 날 축제를 앞둔 아이처럼 마음이 들떴다. 꽃을 심기 시작했다. 택배 상자 안의 못생긴 구근과 꽃의 뿌리들이 소중한 보물 같았다. 아스틸베, 아스트란티아, 에키나시아, 작약, 플록스…. 박스에서 나오는 구근과 뿌리들은 내 머릿속에서 이미 아름답게 꽃을 피우고 있었다. 아! 꽃을 심을 위치를 신중하게 선택하고 조심스레 꽃을 심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을 주는지 말로 설명하기가 참 어렵다.

남편은 꽃에 대한 나의 열정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도 나는 자꾸 남편의 소매를 당겨 꽃밭으로 데리고 간다. 그리고 이렇게 묻는다. “이것 예쁘지?”, “이건 어때?”, “이놈은 가을에 꽃이 피어. 당신도 기대되지?” 이렇게 물을 때마다 남편은 그냥 웃기만 한다. 남편이 웃기만 해도 나는 행복하다. 동네 사람들도 내가 꽃을 열심히 가꾸는 것이 이상한가 보다. 얼마 전 꽃밭에서 호미질을 하고 있는데, 옆집 할머니께서 오시더니 뭐를 심느냐고 물으셨다. 꽃을 심는다고 하자 할머니는 “아이고, 열매가 달리는 것을 심어야지! 꽃을 심는 것이 무슨 소용 있어?”라고 말씀하셨다. 할머니는 분명 내가 조금 모자란다고 생각하셨을 것이다.

할머니가 집으로 돌아간 후 나는 꽃밭 사이에 앉아 생각에 빠졌다. ‘소용? 맞아. 꽃을 심는 것은 아무 데도 소용이 없지. 그런데 나는 꽃을 왜 이렇게 좋아하지?’ 이런 생각을 하면서 우리 집 맞은편에 있는 육백산으로 시선을 돌렸다. 맑은 하늘 아래 햇빛에 젖은 거대한 산은 나무들의 연두색 잎과 화사한 봄꽃으로 덮여 있었다. 참 인상적인 그림이었다. 육백산의 아름다움이 강하게 느껴졌다. 이 아름다움은 내 마음을 꽉 잡았다. 육백산이 아름다움을 발산하는 것처럼 나의 꽃밭도 햇살을 받아 아름답게 빛을 내고 있었다. 바로 그 순간, ‘내 꽃밭의 소용’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이제 확실히 알게 됐다. 아름다운 꽃을 심고 돌보는 것을 통해 나는 행복한 마음을 표현하고 있던 것이다.

꽃밭을 가꾸고 비로소 행복해졌습니다


처음 한국에 왔을 때 나는 참 힘들었다. 완전히 낯선 땅에서 사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한국말도 전혀 못하고 친구도 없고 문화 차이도 심하게 느꼈다. 참 외로웠다. 복잡한 서울도 나에게 충격이었다. 건물, 자동차,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 도시를 이전에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시멘트 밀림에서 개미와 잡초를 발견하기만 해도 나는 반가웠다. 그럴 때마다 나는 서울을 떠나고 싶었다. 한국에서 산 지 7년쯤 됐을 때 서울을 떠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강릉에 일자리가 생겼고, 삼척의 깊은 산속에 작지만 예쁜 집도 구했다. 그때부터 내 인생은 또 한 번 바뀌기 시작했다. 한국에는 ‘서울’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산과 해안 그리고 평화로운 시골 마을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때 강원도로 오지 않았더라면 난 아마 독일로 돌아갔을지도 모른다. 시골 생활에 적응하면서 나는 마침내 한국에 정들기 시작했다.



나는 매일 꽃밭에 앉아 새로 피는 꽃을 구경한다. 꽃들을 지켜보면서 깨닫는다. 자기에게 맞는 자리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는다. 햇빛을 사랑하는 꽃은 그늘에 심으면 안 된다. 그러면 꽃이 괴로워한다. 괴로워하다 죽을 수도 있다. 마른 땅을 사랑하는 꽃을 젖은 땅에 심으면 안 된다. 꽃마다 딱 맞는 자리가 있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나의 자리’에 대해 생각한다. 이 지역에서, 이 산 위에서, 이 하늘 아래에서, 이 집에서, 나의 자리를 찾았다.

내가 이곳에서 뿌리 내릴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며 나의 꽃들에게도 자리를 찾아주고 싶다. 꽃들이 내 옆에서 뿌리를 내릴 수 있게 도와주고 싶다. 내가 이곳에서 찾은 행복을 꽃들이 표현해주면 좋겠다. 이런 행복한 나의 마음을 나를 아는 모든 이에게 전하고 싶다. 내가 살고 있는 아름다운 이곳을 나의 꽃들이 조금이라도 더 아름답게 만들길 바란다. 그렇게 되기만 한다면 나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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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디트(41) 씨는…
독일에서 정치철학을 전공하고 독일로 유학 온 한국인 남편을 만나 한국으로 왔다. 현재는 강릉대학교 독어독문학과에 강의를 나가면서 강원도 삼척에서 남편과 고양이 루이, 야옹이와 함께 살고 있다.

일러스트 | 한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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