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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기사

LIFE IN HOKKAIDO

‘카페 닛싱’ 한국 문화 사랑방 되다

나는야 홋카이도의 무인역장

글·사진 | 황경성(일본 나요로시립대학 보건복지학부 교수)

2012. 03. 05

일본 홋카이도의 최대 도시 삿포로와 최북단에 자리한 도시 와카나이(稚內)의 중간쯤에 있는 나요로(名寄) 시. 그 낯선 땅에 한국인이 4년 전 ‘카페 닛싱’의 문을 열었다. 무인역에 내린 여행자들의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이 카페로 향한다.

‘카페 닛싱’ 한국 문화 사랑방 되다

미국 시애틀에서 살다 은퇴 후 파리로 거주지를 옮기고 일 년에 절반은 세계 곳곳을 여행하며 살고 있는 미국인 부부. 닛싱역에서 손을 흔드는 모습.



언젠가 한 미국인이 자신의 집터에 작은 기차역을 만들어 개인용 기관차를 몰고 일반 선로를 통해 여행을 다닌다는 낭만적인 내용의 기사를 읽고 부러워한 적이 있다. 그러나 홋카이도 나요로 시 외곽의 ‘카페 닛싱’에 앉아 있는 지금, 나는 그 미국인이 조금도 부럽지 않다. 카페 창을 통해 보이는 무인역은 우리 가족의 전용역이나 다름없다. 몇 걸음만 가면 기차를 타고 아름다운 스키장과 골프장, 온천으로 유명한 홋카이도 제2의 도시 아사히카와(旭川)까지 단숨에 갈 수 있다. 그리고 이 역을 통해 먼 곳으로부터 지인들과 낯선 손님들이 우리 가족을 보러 찾아온다.
4년 전 시내의 안락한 아파트를 포기하고 이곳으로 이사하던 날은 늦가을 빗물을 잔뜩 머금은 첫눈이 내렸다. 무인역 선로 곁에는 찢어진 헝겊처럼 초라한 창고 건물이 세월의 풍파에 지쳐 금세라도 쓰러질 듯 기울어져 있어 을씨년스러웠다. 그 창고를 부수고 카페로 쓸 집을 짓는 과정이 쉽지는 않았다. 일단 자금이 필요해서 은행에 융자 신청을 했다. 하지만 은행 담당자가 직접 찾아와 그 허름한 집을 보더니 난색을 표했다. 도심도 아닌 외지고 삭막한 이곳에 카페를 만들면 누가 찾아오겠느냐는 거였다. 자존심이 상한 나는 그 은행원의 안목 없음을 탓하며 “카페가 문을 열고 반년쯤 지나 다시 와보라”고 큰소리를 친 뒤 그를 내쫓듯 돌려보냈다. 이후 지인의 소개로 융자를 받아 창고를 허문 뒤 카페를 지었다. 눈이 많이 내리는 이 지역의 특성상 경사가 가파른 초록 지붕의 예쁜 카페가 탄생했다. 자초지종을 듣고 흔쾌히 융자를 결정해준 은행장은 나중에 내게 행원들을 위해 강연을 해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이웃의 도움으로 카페 메뉴 완성
건물은 완성됐지만 카페 운영은 우리 부부에게 매우 생소한 일이었다. 나야 학교 일이 우선이니 카페 운영은 대부분 아내 몫이 됐다. 메뉴는 쌍화차와 구기자차 등 계절에 맞는 한국 전통차와 원두커피를 내는 정도로 소박하게 구상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이웃들의 도움과 조언이 쏟아졌다. 지난 호에 소개한 길 건너 이웃집 고야(古屋)씨가 가장 적극적이었다. 고야씨는 20여 년간 호텔 주방에서 일하다 고향으로 돌아와 아담한 전원 레스토랑을 경영하고 있는 전문가였다. 그는 나요로 시 안에 한국 식당이 한 군데도 없는 데다 한류 붐을 감안할 때 커피와 같은 음료만 취급하지 말고 비빔밥과 같이 잘 알려진 한식 메뉴를 몇 가지 곁들이라고 조언했다.
이때 새로운 응원군이 나타났다. 북쪽 지방 ‘오코페(興部)’라는 곳에서 ‘North Plain Farm’ 목장을 경영하고 있는 다이코쿠(大黑) 사장이다. 그는 젖소 50마리를 키우며 최근 일본 매스컴이 떠들썩할 정도로 화제가 됐던 생캐러멜을 개발하는 등 부가가치가 높은 유제품과 각종 아이디어 상품으로 연매출 1천억원 이상을 올리는 부농이자 지역 발전에도 크게 기여하고 있는 인물이다. 다이코쿠 사장은 우리 부부가 카페를 연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달려왔다. 특히 노스 플레인 목장의 대표 상품인 소프트크림을 제공하기 위해 고가의 소프트크림 기계를 직접 가지고 와서 설치까지 해줬다. 노스 플레인 목장의 크림으로 만든 아이스크림은 홋카이도 내에서도 좀처럼 맛보기 힘들 만큼 맛이 특별하기에 절대적인 인기 상품이다. 다이코쿠 사장 덕분에 우리 카페에서는 소프트아이스크림을 곁들인 고급 커피 메뉴를 개발할 수 있었다. 이것이 지금도 카페 닛싱의 최고 인기 메뉴인 ‘아보가드’다. 처음에는 카페라는 분위기를 고려해 음료에 치중했지만 점차 고야씨의 조언대로 한국 음식 팬들을 위한 메뉴 개발에 나섰다. 비빔밥 외에도 부침개, 잡채, 삼계탕, 오징어덮밥 등이 인기 메뉴로 자리 잡으면서 제법 식당 티가 나기 시작했다.

한국말 배운 뒤 한국여행까지
애초에 카페 닛싱은 한국 문화를 알리는 사랑방으로 만들었다. 때마침 불어닥친 한류 붐과 맞물려 이곳으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2011년에는 이 카페에서 한삼숙씨의 그림 전시회가 열렸다. 한씨는 목우회 대상을 받았고, 한국미술대전 심사위원을 지낸 화가. 한국 화가의 그림이 먼 이국 땅에서 큰 관심과 사랑을 받는 것을 지켜보면서 벅차오르는 감동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카페 닛싱에 찾아오는 이들은 간혹 홋카이도 관광을 하다가 우연히 들르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한국 마니아들이다. 그들은 ‘겨울연가’ ‘대장금’ ‘올인’ 같은 유명 드라마는 물론이고 최신 드라마까지 한국에 대해서라면 모르는 게 없다. 정작 우리 가족이 한국 연예계 사정에 어두워 거꾸로 그들로부터 한국 소식을 들으며 어리둥절해 하는 경우가 있을 정도다.
드라마 OST(삽입곡)를 녹음해 와서 틀어달라고 부탁하기도 하고, 서툰 한국말을 한 마디라도 더 구사해보려 애쓰는 등 한국에 대해 하나라도 더 배우려는 그들의 의지는 놀랍기까지 하다. 어느새 아내는 그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게 됐다. 이들 중에는 은퇴한 고령자도 있고 현직 교사 등 젊은이들도 적지 않은데 한국말을 배운 뒤에는 꼭 한국을 가보고 싶어 한다. 카페를 연 뒤 손님들로부터 단체 또는 개인적으로 한국을 방문하고 싶은데 어떻게 가면 좋으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시청 공무원으로 정년 퇴직하게 된 여성과 동료들이 한국 여행을 하겠다며 찾아와 아내와 상의를 하고 있다. 우리는 일본에 거주한 경험이 있는 한국의 지인들에게 연락해 이들의 여행 안내를 요청한다. 이렇게 우리의 소개로 한국에 다녀온 일본인들은 열이면 열 모두 인상 깊은 여행이었다며 감격해했고, 이후 더욱 열렬한 한국 팬이 됐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카페 닛싱’ 한국 문화 사랑방 되다

1 홋카이도 북쪽지방 오코페에서 노스 플레인 목장을 경영하고 있는 다이코쿠 사장. 이 목장에서 만든 소프트크림과 생캐러멜은 누구나 한번 먹어보고 싶어할 만큼 인기 상품이다. 2 한국어를 배우러 카페에 모인 일본인들과 이들의 한국어 선생님이 된 아내 홍지령(맨 오른쪽).





‘카페 닛싱’ 한국 문화 사랑방 되다

카페 닛싱의 창으로 본 나요로의 눈 내린 풍경.



카페 닛싱의 또 다른 즐거움은 예기치 않은 손님의 방문과 그들을 통해 삶의 지혜를 배우는 경우다. 2008년 7월 초여름 미국의 유명 컨트리 가수 케니 로저스를 쏙 빼닮은 턱수염이 인상적인 서양인 부부가 무인역에 내렸다. 이곳 무인역에 내리는 여행객 대부분이 카페의 동쪽 창을 통해 보이는 오렌지색 유스호스텔에 투숙한다. 유스호스텔을 경영하고 있는 젊은 부부도 이 지역으로 여행을 왔다가 아름다운 자연에 반해 눌러앉은 이들이다.
미국인 부부는 무인역에 내리자마자 우리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클래식 음악 소리에 이끌려 자연스럽게 발길을 옮겼다고 했다. 아들이 의사인데 본래 피아노를 전공하다 그만둬 음악과 인연이 많다며 자신들이 사는 이야기를 들려줬다. 미국 시애틀에서 신문보급소를 여러 곳 운영하던 부부는 오래전부터 일정 시기가 되면 은퇴해서 프랑스 파리로 이주할 계획을 세웠고 실천에 옮겼다. 현재 1년의 반은 파리에 머물고 나머지 반은 세계 각국을 여행하는데 그렇게 살다가 생을 마감하는 것이 꿈이라고 했다. 일본에 오기 전 한국을 여행했고, 부산에서 시모노세키로 들어와 교토 등을 거쳐 남에서 북으로 일본을 종단하는 중인데 최종 목적지가 일본 최북단인 홋카이도의 와카나이라고도 했다. 부부는 이곳에 이틀 동안 머물며 낮에는 와카나이 등을 여행하고 밤에는 카페를 찾아와 우리 부부와 함께 이야기꽃을 피웠다. 나중에 그들 부부의 홈페이지를 보니 지명조차 들어본 적이 없는 생소한 곳까지 많은 곳을 여행했다. 노인 문제를 전공하고 가르치고 있는 나로서는 현역 시절 은퇴 계획을 세우고 그것을 실천하며 사는 이 노부부의 삶 자체가 매우 흥미로운 연구 대상이었다.

영화 ‘별을 지키는 개’의 무대

‘카페 닛싱’ 한국 문화 사랑방 되다

‘기타스바루’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나요로 시립천문대와 ‘별에 미친 남자’ 사노 야스오씨.



홋카이도 나요로 시는 천혜의 경관을 지니고 있음에도 일본인들에게조차 잘 알려지지 않은 낯선 땅이다. 그런데 최근 이곳이 갑자기 유명해진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일본에서 수많은 독자를 울린 무라카미 다카시의 만화 ‘별을 지키는 개’가 영화화되면서(2011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됐다고 한다), 이곳의 광활한 해바라기 밭이 배경이 된 것. 물론 일본 인기 배우인 니시다 도시유키(西田敏行)가 주연을 했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또 다른 이유는 별에 미친 남자 사노 야스오(佐野康男)씨 덕분이다. 홋카이도 나요로 시립천문대(통상 기타스바루라고 함)에는 태양계 관측용 광학망원경으로 세계 최대급인 1.6m짜리 ‘피리카’가 설치돼 있다. 이 작은 도시에 세계 최고 수준의 천문대가 들어서기까지 결정적인 기여를 한 인물이 바로 사노 야스오씨다. 원래 간호사였던 사노씨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직접 망원경을 조립해 관측을 했다고 한다. 그는 1997년 초신성(태양과 같은 항성의 10배 전후의 큰 별이 대폭발을 하고 사라지는 현상)을 처음 발견한 후 지금까지 세 개나 찾아냈다. 전문 연구자도 평생 하나 발견할까 말까 한 초신성을 세 개나 찾아냈으니 얼마나 대단한 업적인가. 이를 높이 평가한 홋카이도대학이 이 천문대에 부설 천문대 간판을 내걸고 세계 수준의 망원경을 설치한 것이다.
사노씨는 드럼 연주 솜씨도 수준급이어서 이 고장의 다른 연주자들과 함께 초신성을 뜻하는 ‘슈퍼노바’라는 이름의 그룹을 결성해 틈틈이 연주 활동을 병행하고 있다. 슈퍼노바의 크리스마스 연주를 시작으로 점차 삿포로 등 외지에서도 연주 그룹들이 찾아와 카페는 지역 이벤트의 장으로 정착하게 됐다. 모든 게 사노씨의 적극적인 선전 활동 덕분이다. 이를 계기로 우리는 천문대와 카페를 중심으로 닛싱 지역을 문화의 장으로 활성화하자는 데 의기투합했다. 2년 전 새로 문을 연 천문대 1층에 순전히 연주회를 위한 무대와 객석이 마련돼 이곳을 찾은 관람객은 별을 보며 음악을 감상하는 색다른 경험을 할 수 있다. 훗날 사노씨는 이 아이디어가 카페 닛싱에서 벤치마킹한 것이라고 했다. 그는 계획대로 천문대에 마련된 공연장에서 별과 음악을 동시에 감상하는 그림 같은 연주회를 하고 있다.
이 밖에도 카페는 지역 주민들의 모임 공간으로 널리 사랑받고 있다. 한국어 교실이자 동네 피아노 교실 발표회장이고 시민합창단의 연습실이자 무대로 쓰인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한 달에 한 번씩 ‘닛싱포럼’을 개최하고 있다. 처음에는 나를 비롯해 대학 동료들을 중심으로 포럼을 시작했으나 회를 거듭할수록 일반 시민들의 참여가 늘어나 진정한 지식 공유의 장이 되고 있다. 회원들이 자진해서 강사로 나서기도 하고 주제에 따라 외부 강사를 모셔오는 등 이제는 포럼이 저절로 굴러간다. 강의료는 처음부터 일관되게 무보수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 이는 회원들 각자의 지식과 경험을 공유한다는 포럼의 목표에 충실하기 위해서다. 대학이 지역 사회 시민들과 연계하는 바람직한 모델로서 닛싱 포럼에 대한 입소문이 나자 벤치마킹하려는 대학들이 늘고 있다. 3월에는 멀리 오사카 소재 대학 관계자들이 포럼을 참관하러 온다. 이때 시민들은 오사카의 홈리스의 실태에 관한 발표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카페 닛싱은 언제나 사람들의 온기가 흐른다.

‘카페 닛싱’ 한국 문화 사랑방 되다


홋카이도 닛싱 역의 명예역장 황경성은…
고교를 중퇴하고 검정고시를 거쳐 대학에서는 체육교육을 전공했으나 복지에 뜻을 두고 일본 도쿄대 대학원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일본 나요로 시립대학 보건복지학부 교수로 재직하며 지역 사회의 문화·예술 진흥에 힘을 쏟고 있다. kyungsungh@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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