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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초 ‘아르 브뤼’ 컬렉터 김통원

환영·환청·열망… 사이키 에너지로 그린 그림

글 | 김현미 기자 사진 | 조영철 기자

입력 2011.12.07 14:07:00

아르 브뤼(Art Brut)란 프랑스어로 ‘원시 예술’이라는 뜻. 정신장애인이나 재소자, 어린이 등 정규 미술 교육을 받은 적이 없는 사람들의 그림에서 나타나는 다듬어지지 않은 순수한 형태의 미술을 지칭한다. 성균관대 김통원 교수는 국내 아르 브뤼 작가를 발굴하고 이들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차별을 없애는 데 앞장서고 있다.
한국 최초 ‘아르 브뤼’ 컬렉터 김통원

중광 스님을 한국의 ‘아르 브뤼’ 작가로 꼽는 김통원 교수와 중광 컬렉션.



검은 머리카락을 단정히 빗어 내리고 검붉은 원피스에 멋지게 스카프를 드리운 여인이 하얀 찻잔을 들고 앉아 우아하게 당신 쪽으로 몸을 돌린다. 그러나 눈코, 입이 있어야 할 자리가 텅 비어 있다. 손톱만큼의 여백도 없이 굵고 검은 선과 화려한 색채로 꽉 채운 바탕과는 대조적으로 텅 빈 얼굴에선 침묵이 흐른다. 저 여인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걸까?(주영애 작 ‘티파니 스튜디오에서 아침을’ 2009, 105×150cm)
김통원 성균관대 사회복지 전공 교수(54)는 주저 없이 주영애씨(45)를 한국 ‘아르 브뤼’의 대표 작가로 꼽는다.
“주영애씨 그림 속 여인들은 유난히 화려하고 역동적인데, 이렇게 살고 싶다는 작가의 소망과 열정을 반영한 것이죠. 특이하게도 얼굴을 그리지 않은 게 많아요. 작가는 이목구비를 표현하기가 어려워 여백으로 남겨둔다고 고백했는데, 얼굴을 그리다 말았거나 얼굴 일부분이 잘려나갔거나 어딘가 미완성인 채로 남겨지는 것이 아르 브뤼의 특징 중 하나입니다. 의도적으로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 그린 흔적이 있으면 이미 아르 브뤼가 아니죠.”
주씨는 초등학교 때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지만 따로 미술 교육을 받은 적은 없다. 2003년 조현병(정신분열증)이 발병한 후 입원과 퇴원을 밥 먹듯 하면서도 그림만큼은 포기하지 않았다. 해가 노을 사이로 넘어갈 무렵 여러 장을 이어 붙여 이불만 하게 만든 화지 위에 검정 크레파스로 밑그림을 그리는 것으로 주씨의 작업은 시작된다. 주씨의 크레파스 그림들은 국내 전시에서 호평을 받았고, 2009년 일본 아르 브뤼 전용 미술관 ‘노마(NO-MA)’에 초대되기도 했다.
부산에 사는 김정명씨(31)는 특이하게도 대학에서 디자인을 전공하고 대학원까지 졸업한 케이스. 어릴 때부터 누구와도 말을 하지 않는 외톨이였지만 ‘그냥 남과 조금 다른’ 줄만 알았다. 어느 날 지도 교수로부터 “너는 아프다. 병원에 가야 한다”는 말을 듣고 자신의 병(조현병)과 조우했다. 병을 알고 나서 달라진 점은 머릿속에 떠오르는 환영들을 좀 더 솔직하게 표현한다는 것. 물고기의 분리된 머리와 몸통 사이에서 식물이 자라고, 사람 머리에 나무가 심어져 있고, 칼로 두 동강 난 머리에서 흐르는 피에 환호하는 손들, 외눈박이 얼굴에서 벌레처럼 뻗어 나오는 신경 다발 등이 일러스트로 표현됐다.

정신장애에 대한 편견 없앨 기회, 해외 무대에서도 호평
두 사람 외에도 국내에는 김용안(56), 곽규섭(23), 이종우(21), 김동기(52), 박윤호(36) 등 50여 명의 아르 브뤼 작가들이 활동하고 있다. 이들의 존재를 세상에 알린 것은 국내 최초로 아르 브뤼 컬렉터가 된 김통원 교수다.
“제 전공이 정신 건강과 관련해 각종 사회복지 정책·프로그램을 평가하는 것입니다. 2006년 정신장애인 사회복지 시설인 ‘태화샘솟는집’에 처음으로 아시아훈련센터를 만들었습니다. 각국 사회복지사들이 이곳에서 연수를 받아요. 그런데 유독 일본인들이 정신장애인이 그린 그림에 관심을 갖는 거예요. ‘그냥 한번 보고 싶다’고 말하는데 사실 아르 브뤼의 가치를 알고 있었던 거죠. 주영애씨 작품을 보자마자 탐을 내더군요.”

한국 최초 ‘아르 브뤼’ 컬렉터 김통원

1 주영애 작 ‘티파니 스튜디오에서 아침을’. 2 김정명 작 ‘물고기’.


이러다 국내 작품을 일본인들에게 다 뺏기겠다 싶어 그때부터 작품을 하나씩 사들이기 시작한 게 벌써 5천여 점. 처음부터 가격이 없는 그림이었으니 그 가치를 돈으로 환산할 순 없지만 그림을 수집하느라 집 한 채 값을 날리고 “미쳤다” 소리도 수없이 들었단다.
“2007년 용인정신병원이 ‘정신건강의 날’을 맞아 환자들이 그린 그림을 전시·판매했는데 단돈 5만원에도 사는 사람이 없었어요. 주영애씨 작품을 처음 보고 병력을 들어보니 딱 ‘아르 브뤼’였죠. 그 자리에서 주씨 작품을 전부 샀어요.”
환자 가족들은 보관하기도 귀찮은 작품들을 사주기까지 하니 고마워하며 작품을 내놓았다. 전국의 정신병원을 샅샅이 뒤지고 사회복지사나 미술치료사들에게 “아무리 말려도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있으면 바로 연락을 달라”고 해서 새로운 작가를 발굴했다. 주로 조현증 환자의 작품을 중심으로 수집해왔으나 최근에는 자폐와 정신지체 작가들의 작품으로까지 확대하고 있다.
“아르 브뤼 작가가 나올 확률은 3백만 명 중 한 명꼴이라고 해요. 5천만 인구라면 20명이 채 안 되는 셈이죠. 그만큼 희소 가치가 있어서 선진국에서는 하나의 아트로 자리 잡았고 내년 1월에 뉴욕 아트 페어가 열려요. 이들은 그림을 배운 적이 없기 때문에 셀프 토트(Self Taught)라고 합니다. 일종의 ‘사이키 에너지(Psyche Energy)’로 그림을 그리는데 보통 사람은 상상할 수 없는 파워풀한 작품이 나와요. 그래서 주류 작가들이 이를 부러워하고 모방하려는 현상도 나타나고 있어요. 아이로니컬하게도 정신병 치료를 하면 이 에너지가 줄어들어서 그림의 힘도 떨어지죠.”

한국 최초 ‘아르 브뤼’ 컬렉터 김통원

김정명 작 ‘이상 vs 현실’.





김통원 교수는 2008년 ‘한국 아르 브뤼’라는 비영리 단체를 결성하고 2009년 10월 한국 최초로 아르 브뤼 전시회를 연 이래 지금까지 세 차례 전시회를 했다. 올해는 ‘코리안 아르 브뤼’라는 제목으로 21명의 작품 3백40여 점을 담은 도록을 제작했는데, 한국어·영어·프랑스어를 병기해 한국 아르 브뤼를 세계에 알리는 작업에 시동을 걸었다. 이 작업에는 염아림, 정다향, 신미래, 김태엽(대원외고), 염유진(용인외고) 학생들이 서포터로 참여했다.
“그전까지는 이런 미술도 있구나 하고 신기하게만 여기던 이들이 이제는 작품으로서 가치를 인정하기 시작했어요. 저는 사회적 소수자이자 약자로서 정신장애인을 바라보기 때문에 ‘소수자 예술’이라고 칭하죠. 이들을 예술가로 인정하면 그만큼 사회적 자산이 됩니다. 죽으면 제 이름은 잊혀도 주영애란 이름은 남을 겁니다.”

여성동아 2011년 12월 57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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